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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엡 5:15~21 2018-02-04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오늘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주제는 신령한 노래가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하는 방법을 생각하면서 자주 읽고 나누는 신령한 노래는 오히려 결과적이고 부수적이다.

읽은 말씀은 죄악의 마지막 시대를 신앙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경계하는 동시에 영적인 지혜를 가능케 함을 일깨워주는 교훈이라서 우리의 푯대 세움 말씀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조화를 이뤄가는 하늘의 백성으로 서의 삶을 잘 교훈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큰 행운이지만 이러한 행운을 지속적으로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은 단순한 우리의 각오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고 역시 하늘의 도움을 끓임 없이 받음으로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삶의 힘이 이 세상에서의 어떤 것이 아니라 하늘의 능력을 의지함으로 가능함도 말씀해 주고 있다.

우리의 믿음을 지켜갈 수 있는 영적인 힘은 세상의 좋은 것들이 풍족히 주어진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세상의 것들이 너무 풍족해도 영적인 갈증을 잃어 버리게 되어서 육신적인 삶으로 뒷걸음 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영적이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너무 신비적인 경향을 상상하는 것도 우리 시대의 종교적 문화의 오해에서 비롯되고 영적인 삶을 유지한다는 것이 어떤 신비한 언어나 말하고 기도만 하면서 사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들도 더러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영적인 삶은 결코 그런 것에 국한 되지 않는다. 세상에 살면서 ‘삶의 힘과 목표가 어디로부터 어디를 항하고 있는가!’ 사실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의 간격이다. 아무리 성경을 탐독하고 기도하면서도 이 세상만의 기준과 가치로 모든 시간과 상황을 채워간다면 그것은 영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삶의 차이는 시간이나 공간의 차이가 아니라 삶의 내용의 차이라고 말 할 수 있는 데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는 우리 주님의 고백은 당연한 것이다.

아울러 우리 시대는 스마트 시대라 모든 기기가 충전이 되어야 작동한다는 이치는 알고 그런 것에는 익숙하면서도 영적인 상태는 방전이 되어 있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움도 함께 나누었으면 한다..



Ⅰ. 지혜 있게 살아야 한다.(15~16)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어느 시대는 물론, 어떤 직업을 막론하고 보다 가치 있는 삶을 바라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바라고 애쓰는 부분이 바로 지혜로운 삶이다. 어느 부모나 선생들을 물론하고 자신의 자녀나 배우는 제자가 어리석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실에 있어서는 철학자들이라는 사람들도 자신의 철학적 논리를 팔아먹으면서도 자신조차 지혜롭게 살지 못하니 모순일 수 밖에 없다. 하물며 상대적인 세상의 진리가 아닌 절대적인 하늘의 지혜로 산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바른 지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교훈을 주셨다. 그러한 내용을 오늘 말씀의 첫 부분에서 깨닫게 된다.

그럼 ‘과연 지혜 있게 행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고민하는 것처럼 복잡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님을 주께서는 바울을 통해서 일깨워 주신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15f) 간략하면서도 쉬운 만고의 진리이다.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을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세상 사람들이 하는 그대가 아니어야 한다. 이 말씀을 좀더 우리에게 가까이 가져오면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행할지를’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 ‘지혜롭게 산다고 하는 것’은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을 주의 하는 것이다.’ 오늘 믿음의 사람들이 신앙인으로서 ‘주의 하지 않는 삶’이 늘 실패를 만들고 좌절하고 낙심하는 것이다.

무엇을 통해서 자세히 주의해야 하는가? 세상의 가치로 자세히 주의 하라는 말씀이 분명히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자세히 주의하여”야 할까! 그것은 바로 우리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미 주어진 말씀을 통해서 주의하는 것이다.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이 말씀은 바로 앞의 말씀의 결과이다.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 하는 것’이 바로 ‘지혜 있는 자로 행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되는대로 사는 삶이 지혜 없는 자’의 삶이란 의미이다.

역사 속에 최고의 지혜의 왕으로 추앙 받는 솔로몬이 이를 잘 가르쳐주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이 우주와 모든 삼라만상과 사람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에게 삶의 지침서 즉, 매뉴얼을 주셨고 그 매뉴얼 대로 사는 것이 바로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고 이것이 이 역사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더욱 절실한 이유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경계해 주고 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16) 이 말씀을 공동번역에서는 “이 시대는 악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 성경에서 인간의 에덴의 타락 이후에 ‘이 세대’나 ‘이 세상’은 대부분 악한 것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지적을 요한 사도가 하고 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이 말씀은 같은 요한이 말하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는 내용과는 의미가 다른 내용이다.

여기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16)는 말씀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시간의 사용을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지 않고 되는대로 행하는 시간은 어둠의 권세아래 흘리는 시간이 되기 때문에 악한 시간이 되는 것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요 방탕한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시간을 그리스도의 피로 산 구속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이 마지막 죄악으로 넘치는 시간은 그냥 두면 죄와 어둠의 역사가 어둡게 또 어두움으로 끌고 가겠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은총의 피의 효력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시간으로 구속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일주일 중 그리스도의 피에 효력을 발휘하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Ⅱ.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17~19)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이 두 번째 석 절의 말씀은 지적한 지혜롭게 살기 위한 방법과 자세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는 새해를 시작할 때마다 새롭게 각오하고 결심하지만 그러한 결심은 대부분 ‘작심 삼 일’이 되고 마는 이유는 우리의 결심(決心)과 의지(意志)는 허약하기 때문에, 우리의 약한 결심과 의지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하게 하시려고 주시는 방법과 힘이 약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이 말씀은 바로 앞의 말씀의 확인이다.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라는 말로 반복되고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라는 말씀은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는 말씀과 같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나 하나님을 쉽게 ‘주님’이라고 부르고 고백한다. 이 호칭이나 부름은 사실 우리의 뜻이나 의지를 거절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는 적어도 ‘나 자신의 의지나 뜻’은 거절되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표현이다.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주님’ ‘주님’을 반복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뜻보다는 나(우리)의 뜻이 항상 우선되고 있기 때문에 사실 모순이다.

그 모순을 해결할 방법은 복잡하지 않다. 바로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는 것이다.

또 다른 내용으로는 이 17, 18 두 절 속에서는 반복적으로 영과 육의 원리가 대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17);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18) 그러면서 영적인 면을 강조할 때마다 “오직”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눈 여겨 봐야만 할 과제이다.

당연히 앞의 15절 하 반절의 연장이다. ←“…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18f) 이 말씀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지 못하는 가장 구체적인 방법을 예로 든 것이다. 실제적으로도 그리스도인이 술에 취해서 횡설수설하면 안되겠지만 그리스도인이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다른 뜻이 그를 사로 잡고 있다면 술 취한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여기 “방탕[ἀσώτως, 방종, (돈과 육욕의 무절제한) 낭비]”은 누가복음15:13 아버지를 떠난 탕자의 무절제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뜻을 잃고 사는 것 자체가 방탕한 것이다.

그런 방탕이 왜 나타나느냐 하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삶 속에서 거절한 이유 때문이다. 거기에 대한 치료책이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이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밖에 없는 가장 분명한 이유가 된다. 여기 ‘오직’은 역시 ‘이것만이’라는 의미는 당연하다.



여기서 경계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꼭 신비한 언어나 은사가 나타나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인데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각종은사를 말한 후에 그런 은사는 없어지겠지만 가장 중요하고 영원한 은사가 바로 사랑이라고 고린도전서 13장으로 넘어 간다.

또 한가지 이 성령의 열매를 나열하는 갈라디아5:22~23의 아홉 가지도 대부분이 도덕적인 덕목이라는 점들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믿는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영적인 것들은 사라지고 없어질 때 세상의 것들이 다스리고 지배한다면 그것은 술 취한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특히 “충만함을 받으라[πληρόω, (πλήρης, 가득 찬, 덮인, 채운 )에서 유래 ‘가득 차게 하다’, 꽉 채우다, 만족하다, 마치다, 확증하다, 성취하다, 완성하다, 만기되다, 공급하다]” 믿음의 사람들의 삶은 성령으로 차고 넘쳐야 어두움의 것들이 끼어들 수 없을 것이다.

이 성령은 세상 끝날까지 믿음의 사람들의 승리를 돕기 위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능력이고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충만함을 받으라”는 명령형이다. 그것은 거절해도 되고 받아들여도 되는 option 즉, 취사선택의 항목이 아니다. 이 명령이 순종되어야 신앙의 삶은 승리와 감사로 인한 찬양의 삶이 지속되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을 더 쉽게 이해하면 요즘의 충전기기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전기가 없이는 작동되는 것이 없고 모든 스마트폰 기기들은 전기가 바닥이 나면 사용이 불가능하다.

좀 지나친 표현이지만 이것을 영적인 의미에서 생각해보면 신앙의 삶은 성령의 충전이 없이는 작동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스마트폰이 배터리가 바닥이 나면 충전을 해야 하는 것은 누구나 어린아이까지도 아는데 성령의 방전에 너무나 무감각한 현대의 그리스도인의 상태는 탄식할 일이다.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19)라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늘 ‘신령한 노래’는 강조하면서 그 방법은 지나칠 때가 많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는 성령 충만에서만 나온다.

병행 구절인 골로새서3:16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는 내용을 확인하는데 같은 결과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참고할 필요가 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그런 결과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하였고 골로새서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에 같은 결과가 나타난다.

역시 다르지 않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한 것과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여”는 권면은 같은 것이고 뒤에 나타나는 결과들이 좀 앞뒤가 바꿔서 기록되고 있다.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는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는 내용을 비교해 보면 그렇다.

오늘 나는 성령의 방전 상태는 아닌가!



Ⅲ. 영적인 삶의 조화.(20~21)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 말씀을 한마디로 다시 표현하면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이다. 물론 이런 결과는 앞에 전제된 내용이 채워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악한 세월을 구속”하고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는 삶의 결과가 구체적으로 믿음 속에 나타나는 내용과 모습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20) 우리는 같은 표현을 데살로니가전서5:18에서 본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너무나 비슷한 표현이다.

어떻게 행할까를 자세히 주의하여 세월과 시간을 구속하는 성령충만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조건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데 그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능한 것이다. 세상의 조건이 전혀 감사할만한 상태가 아닐지라도 우리에게 구속을 허락하시고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를 매사에 승리케 하시는 성령의 충만으로 말미암아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좀더 높은 차원이라면 좀더 가까운 현상을 표현하는 내용이 오늘 마지막 21절이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나를 나 되게 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 주님께 경외감 즉, 두려움으로 복종하게 되는 것 역시 성령의 충만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다.

우리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의 주님, 희생의 주님, 은혜의 주님으로는 쉽게 생각하면서도 그분이 하나님이신 두려워해야 할 분 이시라는 사실을 쉽게 잊고 사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주님, 희생의 주님, 은혜의 주님이기도 하지만 불순종하는 대상에게는 두려워해야 할 주님이심을 잊지 말아야만 한다.

택함 받은 백성들에게는 거절되었던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11) 주님은 이 역사의 마지막에는 구원과 상관없는 사람들에게는 진노의 주님으로 오실 것을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계6:16) 그러기 전에 주님을 두려워할 대로 경외할 수 있다면 복중에 복이다.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히 주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주님을 두려워할 대로 두려워할 줄 안다면 “피차 복종하라”는 명령이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 말씀은 성도간의 복종을 이름이다.

그러나 죄를 짓게 하는 것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같은 성령의 충만으로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관계 속에서의 복종이므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이다. ‘복종’은 때로 인간관계 속에 순종이 어렵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권면하고 부탁하는 것들이 인간적으로는 수용이 불가능할지라도 그런 것들이 주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즉,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고 여기에 바른 교회의 질서가 있다.

세상에서 계급의 체계에 익숙해 진 사람들이지만 사실 복음 속에서는 종적인 계급이 없기 때문에 순종이 쉽지 않다. 그런 이유에서 왕 같은 제사장들 서로간에 복종이 쉽지 않지만 성령의 충만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라면 서로를 귀히 여기고 하나님의 뜻으로 권면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복종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이 마지막 시대를 어떻게 행할지 주의하여 지혜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스마트폰의 충전을 필요로 하듯이 영적으로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며 서로에게 복종하는 신령한 노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