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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벧전 1:13~17 2018-02-11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믿음의 사람들의 최고의 소망과 기대는 최후의 승리를 가져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죄와 상관없이 그의 피로 씻김을 받고 거듭난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시는 재림이야말로 최고의 정점(climax)이 될 것을 성경의 여러 곳에서 격려하고 있다.

나그네 같이 불편한 삶을 살면서도 이 하나의 소망으로 모든 것을 이겨가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이유이다. 1세기 당시의 박해와 고난을 감수하면서 주님의 재림만을 학수고대(鶴首苦待)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격려와 함께 기다리는 가운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가를 일깨워 주고 있다.

아무리 좋은 일이 다가온다 하여도 그 일에 나 자신이 합당한 모습이 되지 못하면 그 기다림은 허사가 되고 그 좋은 일에 참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최고의 영광과 승리를 약속하시지만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모습으로 만나지 못하면 그 약속은 적어도 나에게는 허사가 된다.

인간 관계 속에서도 이런 예들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말하고 있다.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12:20~21)

안타깝게도 마지막 주님을 만날 때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이러한 안타까움을 마지막 주님 앞에서의 경계를 인간관계 속에 찾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모함으로 맞아야 하겠지만 그 영광과 위엄으로 오실 주님 앞에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기대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우리 각자는 두려워할 수 있어야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고 기대하는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 수 있는 자세로 우리 각자를 준비할 수 있도록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도전을 주고 있다. 이 말씀을 들으며 주님을 예배하는 여러분은 재림하실 때 가져오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며 기다리고 있는지 묻고 계시다.



Ⅰ. 근신하며 소망의 삶을 살아야 한다.(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림의 자세를 먼저 말씀한다. 먼저 여기 “그러므로”는 앞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고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으로 하늘에 간직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면’이라는 즉, ‘하늘의 상속자가 되었다면…’ 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런 사람들이 누구인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는 첫 번째 당부는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이다. 허리를 동여맨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동이고[ἀναζώννυμι, 새로이 매다, 허리를 동이다]’라는 의미로 ‘급한 일을 당할 때 취하는 태도’(출12:11- 허리에 띠를 띠고)로 주님께서는 혼인집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자세에 이 말씀을 사용하고 계시다.(눅12: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허리를 동이는 것은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활동하는데 걸리는 것이 없고 힘을 최대한 쓸 수 있고 움직임이 민첩할 수 있도록 간편하게 단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외모의 모양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허리’라고 하는 데서 신앙인의 자세를 묘사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의 백성 된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곧바로 순종할 수 있는 자세를 의미하는 데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9:62)는 말씀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것이든지 주님께서 부르시면 거리낌이 없이 훌훌 털어버리고 바로 일어설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그대로 묘사한다. 벌여놓은 것이 많은 사람은 급히 어디를 가자고 하면 이것에 매이고 저것에 매여서 마음대로 출발할 수가 없다.(출발할 때 여자들이 더러 그렇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근신하여’[νήφω, 금주하다, 삼가다(abstain), 분별 있다, 지켜보다, 자제력이 있다] 앞의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와 상관된 표현이다. 이 모든 표현들은 앞에 주어지는 어떤 과제를 잘 감당하기 위해서 자신을 단장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는 세상 속에서 근신하며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법적인 징계를 받은 사람이다. ‘근신처분을 받았다.’ 같은 내용들을 듣는데 자신의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자재 한다는 입장에서 영적인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

이런 자세를 요구하는 때와 이유를 연이어 기록하고 있다.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그렇다 하나님은 이유 없이 그의 백성들을 단속하시거나 명령하지 않으신다. 특히 끝부분의 ‘온전히 바랄지어다’ 하였는데 바라고 기대하는 것은 기다리는 사람의 소망이지만 어떤 사람은 기다림이 두려움이 될 수도 있고 기다림이 점점 어려움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기다리는 각자의 자세와 생각에 따라서 차이가 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온전히[τελείως, 완전히, 흔들림 없이, 끝까지] 바랄지어다’라고 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집중해야 할 삶의 자세를 이름이다. 이 말을 더 가까이 이해하면 주님께서 ‘가져다 주실 은혜를 바라고 기다리는데 집중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주님께 넘치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럼에도 주님을 통한 은혜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주신 은혜, 받은 은혜가 있다면 또 다시 가져오실 은혜가 아직도 남아있고 믿음의 사람들은 그것을 기다리는데 온 인생을 걸고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그 은혜를 가져올 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라는 것이다. 두 말 할 필요 없이 주님께서 두 번째 이 땅에 오실 때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첫 절의 말씀을 새롭게 이해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 삶이 되기 위하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삶을 살아라!” 하는 당부의 말씀이다.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대하는 까닭에 천로역정(天路歷程)의 길에 걸림이 되는 요소들을 모두 다 벗어 던지고 오직 가져다 주실 은혜를 받아 누리기 위해 온 힘과 시간을 드리는 삶이 바로 종말의 역사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Ⅱ. 거룩함으로 나아가야 한다.(14~16)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 삶이 되기 위하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삶을 살라!”는 첫 번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를 좀더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먼저 14절에서는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ἐπιθυμία, (특히 금지된 것) 정욕, 욕망, 갈망] 본받지 말고”라고 해서 부정적인 당부로 과거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 개개인의 욕심을 반복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베드로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4:3)라고 더 이상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행했던 육신적인 욕망에 붙잡히지 말아야 할 것을 경계한다.

이 명령에 대해서는 다시 “순종하는 자식처럼”이라고 말하는데 물론 일반적으로는 부모의 말씀에 기쁘게 응답하는 자녀들의 모범이지만,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한 자식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이 말씀 역시 예수 우리 주님께서 모범이시다.

다음으로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15)하시는데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닮아가야 함을 말씀하신다. 비록 죄인이었지만 우리를 죄 가운데서 십자가의 피를 지불하시고 불러내신 그분을 기대한다면 장차 함께할 주님과 같지 못하면 결국 함께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거룩의 기준은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꼭 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33년을 사셨지만 우리처럼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그 거룩함을 잃지 않으셨음을 히브리서 기자가 증거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그리고 연이어 그 거룩함을 유지해야 할 범위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명하신다. 예배에만 주님의 날 만이 아니라 ‘모든 행실’ 즉, 모든 삶에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여기에 대한 모범을 정확하게 말씀하신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16) 이 말씀은 레위기11:44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는 말씀의 그대로의 인용이다.

인용된 다음 절(45)도 참고할 필요가 있는데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가져오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세상에서 구별하여 낸 예수 그리스도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전혀 변화가 없어도 하나님이 은혜로 부르셨기 때문에 재림하셨을 때도 또한 은혜로 불러가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래서 영적인 삶에 전혀 진보가 없는 모습을 보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한 말씀과 성령을 주신 것은 우리 스스로 거룩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를 닮게 하려고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죄인 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그 피 값으로 우리를 사신 후에 이제는 완전한 구원 즉, 죄의 유혹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지 않는 완전한 삶을 위하여 우리를 다시 데리러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바로 이것이다.

주님의 피를 힘입기 이전의 썩어질 정욕 특히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킬 수 밖에 없는 같은 표현이 골로새서3:5~8에 그대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이러한 육신적 사욕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본받지 말고 모든 삶에 있어서 장차 영원히 함께할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죄악 된 세상의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를 부르신 분이 이 세상과 다른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Ⅲ. 두려움으로 지내야 한다.(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성경의 우리 말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표현이 정확하게 71회 나타나고 있지만 대표적으로 두 곳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당부를 찾아 보면 먼저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말씀하신 것이다.

NT에서는 전도하러 내보내시는 제자들을 향하여 같은 당부를 주셨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10:26)

그렇지만 “두려워하지 말라!”는 그 대상은 언제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나 군대나 민족이나 권력이나 힘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겁낼만한 대상을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될 대상은 있다가도 없어지거나 여기서는 귀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귀하지 못한 그런 상대적인 것이 아닌 우리의 삶이나 행동을 시종일관(始終一貫)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 한 분뿐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 …”(17f) 앞에서 거론했던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은 어떤 것을 막론하고 속일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유한한 것들이다.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이 바로 겉으로만 보지 않고 우리의 몰래 행한 모든 일까지도 보고 계시며 그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공정하신 분이심은 여기 기록된 심판도 ‘각 사람의 행위대로’ 하시지만 상급도 역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2:6)하셨다.

특히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마지막 주님께서 재림하신 후에도 같은 약속을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그럼에도 이 약속을 주시는 대상이 우리에게 아주 가까운 분 이심도 증거해 주고 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17m) 이 말씀에는 귀중한 의무도 포함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르는” 한 것은 우리가 그분의 아들이요 딸이라면 당연히 그러한 아버지의 처분을 존경하고 기뻐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처분에 순종하는 성숙함을 가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7b) 베드로 사도는 계속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는 ‘나그네’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히브리서 기자 역시 믿음으로 살았던 과거의 신앙의 선진들이 그런 자세로 살았음을 증거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히11:13)

‘나그네’라는 말은 꼭 원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외국이나 타향 거주자, 지나가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되는 단어이다. 우리에게 적용되는 ‘나그네’는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처럼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의미이다.

아버지가 하늘에 계신 사람들이기 때문에 본 고향은 하늘에 속한 사람들임으로 이 세상은 우리의 임시거처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앙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현 세상이 더 본 고향같이 살아진다면 우리의 하늘의 시민권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7b)는 당부는 단순히 이해되는 것보다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라는 의미는 ‘땅에 육신을 가지고 있을 때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뜻이지만 그 대상이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자세이다.

여기 “두려움[φόβος, 놀람, 공포]”은 성경에 지속적으로 당부하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을 말씀하는 것이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34:9)

베드로는 조금 뒤에서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벧전3:6)는 요즘 상황 속에서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고 있다.

사라는 자신의 남편이면서도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자였던 남편을 [주]라고 하는 것 때문에 세상에 일어나는 두려운 일조차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약속을 지키는 한 어떤 세상적인 두려움에서도 지키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고 이것은 사라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그녀의 딸이 된 모든 여인들도 동일하게 누릴 수 있는 자유라는 의미이다.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7b)는 말씀이 당부하는 또 다른 의미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만 두려움으로 지난다.’는 시간적인 의미도 가진다. 범죄한 이후의 사람은 수치와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피해 숨었다.

이 죄의 결과는 우리가 이 세상에 거주하는 동안은 육신을 입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공포감을 갖고 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힘입는 모든 하늘의 백성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이 육신을 벗고 영원한 영광 속에 들어간 후에는 더 이상 갖지 않아도 되는 공포감이다.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세 가지의 질문을 자신들 속에 던져보자. ①오늘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라고 있는가! ②하늘의 영원한 아버지의 거룩함을 비록 세상이지만 본받아 구별된 삶을 살라고 당부하시는 주님의 명령을 예수님처럼 순종하려 하는가! ③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속마음과 행동을 아신다는 확신으로 육신의 삶을 살면서도 매 순간 주님을 경외함으로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