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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17:22~29 2018-10-07
하나님을 기술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22)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종교적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인데 모든 피조물가운데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대체하는 것이 우상숭배이고 잘못된 종교형태이다.

사람의 상태나 상황과 종류에 따라 종교 형태는 다를 수 있지만 극단적인 절망의 상태에서는 절대적인 어떤 힘을 기대하고 바라며 의지하려고 하는 것이 사람이다.

당시 세계의 지성의 본산인 아테네의 아레오바고는 철학의 산실 역할을 하는 곳이고 고상한 철학 이론이 논의 되고 결정되는 곳이었지만 이곳에서 조차 사람들의 종교성은 어쩔 수 없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종교는 결코 무식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닌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러한 종교적 관심이나 행위가 가장 높은 차원의 인간욕구이고 자연적인 사람의 본성이라고 할지라도 본래적인 창조의 목적에서 주어진 목표인 창조주를 만나거나 누리지 못하고 특히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이러한 종교 행위는 오히려 우상숭배가 되어서 행복이 아니라 비극이 된다.

또,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힘입는다고 할지라도 인격적인 관계가 되지 못하면 또 다른 우상숭배가 되고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나님을 또 다른 우상으로 대우할 수 있는 것도 믿음의 사람들이면 반드시 경계해야할 신앙적 자세이다.



Ⅰ. 하나님을 형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23, 29)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 아닌 다른 사람의 기술과 방법으로 만든 것이나 하나님 아닌 어떤 것을 하나님보다 더 위하는 것을 쉽게 우상숭배라고 한다. 그렇지만 오늘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지 못했던 하나님을 우상으로만 섬기는 경우를 좀 깊이 다루었으면 한다.

이 말을 듣는 이들 중에서는 ‘어떻게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길 수 있나!’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 생각이 잘 못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오늘날의 경우는 오히려 이런 일이 더 많은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을 마치 그림에 새겨진 하나님, 사진에 찍힌 하나님으로 취급하는 경우를 더러 본다.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은 이 우주의 창조자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곧잘 고백을 하면서도 사실적인 삶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각자가 깊이 고민해야만 할 오늘 우리시대의 영적인 문제이다.

이사야가 말한 것이 아마도 그런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이해하게 된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 마15:8)

고민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고백은 하면서 마치 병풍 속에 그려져 있는 하나님으로 대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마치 그림 속의 호랑이 정도로 생각하고 대하는 것이다.

아니 사실 하나님을 바로 보이는 사진으로 둔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인격이 아니라 새겨진 그림으로 취급 당하고 계심은 안타까운 일이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가 대하는 만큼 밖에는 우리의 삶에 역사하실 수 없다. 우리가 글로나 그림으로 새겨진 하나님으로 취급하는 한 그런 사람에게는 역시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림 한 장을 보는 정도의 역할 밖에는 다른 능력을 나타내실 수 없다.

오늘 본문 속에서 먼저 다루는 내용은 그런 것이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이스라엘의 우상이 이스라엘의 성읍 수와 같다고 예레미야를 통해서 책망한다. “너를 위하여 네가 만든 네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네가 환난을 당할 때에 구원할 수 있으면 일어날 것이니라 유다여 너의 신들이 너의 성읍 수와 같도다”(렘2:28)

세상의 지혜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다 모인 아덴에서 바울은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29)

그럼에도 1세기 아덴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 이 과학의 최첨단의 시대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역시 같은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충만하게 계신다는 의미를 우리는 신앙적으로는 대부분 다 이해하고 받아 들이지만 바울이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 온다면 같은 지적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오늘의 시대에 다는 아니겠지만 나이든 부모를 대하는 것같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종이호랑이처럼 종이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다르지 않은 것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왜 이렇게 표현하느냐 하면 나이 드신 어른인 부모님을 뒷방에 모셔두고 말씀하시는 것이나 명령을 곧잘 무시하게 되는데 이런 것들을 가리켜 ‘뒷방 신세’라고 하고 서운하고 안타깝지만 그러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이제는 실제적인 힘이 없기 때문이지만 사람도 이런 일을 서운하게 생각하는데 살아계시고 영원토록 변함없으신(히13:8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약1:17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하나님께서 이런 취급을 당하시는 것은 모르긴 해도 더 서운해 하실 것이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셨는데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말씀을 들어도 뒷방 어른의 말 듣는 것처럼 무시하고 외면한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뒷방 신세나 종이 호랑이 정도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이 바로 “…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29)는 경계의 교훈이다. 특히 이 끝부분의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29b)는 경계를 가지고 영원 속에서 상 주시고 심판하실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반드시 바르게 판단하고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종이에 그린 호랑이나 실제로 힘을 다 잃은 뒷방 신세의 노인으로나 그림에 그려진 분으로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우상숭배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때로 어려움을 당할 때만 하소연 한다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을 보이실까 반드시 생각해야만 한다.

이사야가 자기 백성들의 우상숭배를 말하는 것을 보면서 숲에 나무를 베어 “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사44:16~17) 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에 나타나는 대로 영원토록 동일 하시고 불변하시며 능력이 다함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히1:12b,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그림과 새겨진 종이호랑이 취급을 당하시거나 무시당하시는 것에 대해서 생명 없는 것들처럼 어떤 대우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대로 계실 분은 절대 아니시다. 당장은 대응하지 않으실 지라도 반드시 보응 하실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솔로몬은 그의 영광의 때에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불순종하고 주변의 나라들의 공주들과 혼인하고 하나님을 그림 호랑이 같이 대하다가 생애 말년에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는 내용이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잠24:12) 하였다.

불순종하는 유다에게 바벨론의 침략을 앞두고 진정으로 회개할 것을 예레미야를 통해서 당부하는 말씀도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10) 각 사람의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반드시 그대로 보응 하실 것을 말씀하심을 듣는다.

더 이상 힘을 잃고 뒷방 신세가 된 부모를 무시하는 것에도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찬다. 이것은 분명 도덕과 윤리의 기준에서 볼 때도 옳지 못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물며 당장에 보응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시하고 그림 취급을 한다면 히브리서 기자의 경고를 들어야만 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10:31)



Ⅱ. 하나님은 우리가 아니라도 충분히 영광스러운 분이시다.(24~26)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사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자신을 위한 것이다. 이 세상에 아무리 영화로운 성전을 짓는다고 해도 그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다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고 천지에 충만해 계신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 되고 말뿐만 아니라 무한하신 한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솔로몬은 가장 영화로운 성전을 짓고도

“누가 능히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내가 누구이기에 어찌 능히 그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그 앞에 분향하려 할 따름이니이다”(대하2:6; 왕상8:27; 대하6:18)라고 고백한다.

그러고 보면 결국 솔로몬도 이러한 고백은 자신을 위한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율법 속에서 모세는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신10:14) 라 하였고 욥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욥41:11)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 고백하였고 시편89:11에도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찬양하고 있다.

자연이 존재하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1)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지어다”(시148:3~4)

바울이 아테네의 철학을 사모하는 자들을 위하여 선포한 것이 바로 이러한 내용이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24~25f)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 이심도 선언한다. “…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25b) 하나님께서 오히려 모든 인생에게 ‘생명과 호흡’을 친히 주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필요 즉, ‘만물’을 친히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그럼으로 주님께서 산상보훈에서 “…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5b) 말씀하신 것은 성경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본다.

그럼 왜,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골고루 필요를 주실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되는데 이에 대해 바울은 거기에 다음과 같이 해답하고 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26)

즉,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들에 대해서 그들의 반응에 관계없이 창조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시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범죄하여 영원을 잃게 되자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자신의 독생자까지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런 넓은 범주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게 된다면 결코 그 하나님께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을 거역한 그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이리 보면 하나님이 참으로 사랑 때문에 바보스럽기까지 하다. 하나님은 오늘 내(우리)가 찬양하지 않아도 삼라만상을 통하여 찬양을 받으시는 분이시다.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할지어다”(시98:8) 그럼으로 오늘 내(우리)가 찬양과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나(우리)를 위해서이다.



Ⅲ. 인격적으로 함께 사는 것이 생명이다.(27~28)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스스로 영광스러우시고 모자람이 없으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27) 하신 것은 더욱 감사해야 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다.

앞에서 살핀 대로 어떤 면에서도 결코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랑을 구걸 하듯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 …”(27f)이라는 표현은 지극한 죄인들을 사랑하신 은혜의 속성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스스로 존귀 하시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께서 아직 하나님을 온전히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더듬어서라도 발견되려 하심은 무한하신 인자하심 덕택이다.

범죄하여 멸망으로 가도 당연한 인생들로 하여금 더듬어서라도 발견되어 그들의 삶 속에 생명과 영원을 주고 싶으신 사랑의 발로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하나님은 역시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어디에나 충만해 계시는 그런 이유에서 “…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27b)라고 확인해 주신다.

사실에 있어서 모든 인생의 삶이 앞에서 말했던 대로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25)로 자신을 인정하여 섬기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긍휼을 베푸시면서도 이사야를 통하여 미래의 구원의 메시야를 예언하시면서도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65:1)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영원 속에서 버림을 당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발견되시려고 애쓰시고 자신을 주시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은 그야말로 복된 사람이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28f) 모든 사람은 사실에 있어서는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존재와 행동은 그 힘이 하나님께 있음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다. 특히 믿음의 사람들은 “그를 힘입어 살고 행동한다.”

일반적인 자연에 민감한 시인들조차 어렴풋이 이러한 사실을 감성적으로 느끼게 됨을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28b)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씀은 진리이다. 사람은 아담의 한 혈통으로 태어나 존재하고 그 존재케 하시는 하나님을 힘입어 살고 활동할 수 있음을 모두가 알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멀리하고 외면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영원 속에서의 삶까지 구속 받은 믿음의 사람이라면 더욱 하나님을 단순히 돌에나 종이에 새겨놓은 있으나마나 한 무가치한 존재로 대우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약속을 현실 속에서 믿고 순종하며 따르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현재로부터 영원까지 생명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