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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4:39~45 2019-05-12
세상의 구세주,  
모든 전도의 결과가 이정도만 된다면 사실 누가 전도를 안하겠는가! 자신의 수치를 들어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이 수가성의 여인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9)라고 증거한 주님에 대한 증거는 적중하여 오늘 읽은 말씀에서는 구체적인 열매를 보게 된다.

물론 자신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한 이 여인에 대한 감사를 잃은 안타까움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런 확신이 되어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재생산이 가능하게 됨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믿는 것은 …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42)고 모두가 고백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특히 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고백 이야말로 바른 고백으로 이런 믿음이 가능한 것도 역시 다른 이들로부터 전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의 고백이라고 하는 내용이 중요하다. 그분과 함께 살아보니 참으로 그분이 나와 세상의 구세주임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고백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만날 때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이지만 바람직한 신앙의 성장은 자신이 직접 주님을 경험하고 삶 속에서 가르침을 받는 일이 되어 질 때 진정한 구세주를 경험하게 됨을 확인하는 샘이다.

인생에 있어 만나야 될 사람이 많지만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주님을 만나 죄를 해결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긴박하고 중요한 일로 어떤 은인이라고 하는 대상보다도 주님과의 올바른 만남은 나머지 인생이 걸린 귀중한 만남이다.

이렇게 사마리아 전도를 끝내신 예수 그리스도 일행은 본래 가시려던 대로 갈릴리로 가시지만 고향에서는 믿음을 기대하지 못하시고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절기를 지키러 왔다가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보았던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는 모습으로 진행이 된다.

진정 복음에 감격한 사람들은 자신이 그 복음에서 버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기뻐할 수 있다는 바울의 고백을 듣는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오늘 여러분들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만났다면 이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감격하고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생을 고치시는 그리스도, 인생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인도나 가르침보다는 주님께 인생을 드리고 맡길 때 가능할 것이다.

오늘 이 말씀과 함께 하는 여러분들도 다를 것이 없다. 이왕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알기를 원한다면 새로운 신앙의 시작에서부터 철저하게 주님께 순종하는 삶이 될 때 가능할 것이다. 언제까지 다른 사람이 전해주는 예수를 듣겠는가!

이제는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볼 차례이다. 비록 여러분들이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이종배를 통한 말씀을 듣는 것 때문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는 고백을 한다고 해도 여한이 없겠다.



Ⅰ. 증거를 통한 열매,(39~41)

“여자의 말이 그가 내가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바울은 로마서에서 증거하기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말 한 다음에 다시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라고 복음의 통로를 지적하고 있다.

연이어 하는 말이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v15)라고 증언하는데 우리는 ‘그러면 보내심을 받은 자가 누구냐?’라고 물을 수 있지만 이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만난 사람이고 그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복음을 확인했다면 그런 사람은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맛본 생수의 맛을 소개할 것이고 이 여인처럼 사람들에게 가게 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사람을 기도하며 훈련시켜서 특별히 보내기도 하는 것은 성경에나 교회에서 있는 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의 은혜를 맛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이해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도행전13:2~3, 안디옥교회 - “…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보낸 바 된 대상이 다를 뿐이다.

이 여인이 증거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하신 일을 증거한 것뿐이었다. “여자의 말이 그가 내가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39f) 그러나 이러한 어설픈 증거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39b) 이런 이유에서 복음의 능력은 바울이 고리도서에 고백하는 것처럼 사람의 생각과 다름을 보는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라는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짐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삶은 좀더 주님께로 다가서고 있는 것을 본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40f) 복음은 단순히 듣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주님과 함께 살기를 청하는 이들의 모습은 당연한 것이다. 또 이러한 결과는 더욱 바람직한 모습으로 옮겨가고 있다.

“…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40b) 분주하신 주님이시지만 그들의 기대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우리 주님이시다. 주님과 단 이틀을 살고도 사람들의 변화는 계속됨을 보게 된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41)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람은 주위에 더 많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불러들였음을 요한은 증거해 주고 있다.

그 인간적으로는 불완전한 사마리아 여인의 증거와 생명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의 차이를 역시 느끼기도 하는 내용이지만 이 부분은 다음 부분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상고해 보도록 하자.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마리아의 죄 많은 한 여인이 만들어 낸 이 결과는!’ 그녀 보다야 나은 사람이라고 우리 각자가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크다.



Ⅱ. 삶에서의 확인,(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이 두번째의 말씀은 어찌 보면 복음 속에서도 몰인정한 사람들의 모습과 그러면서도 복음을 삶 속에 확인하고 그 확신에 머무르는 보다 바람직한 모습을 함께 보게 된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42f) 이 말은 어느 편에서 볼 때는 너무 몰인정하고 서운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어찌 보면 인간사가 그렇다. 겉으로 표현된 이 말 속에는 가시 돋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

‘우리가 이제 믿는 것은 너 같은 하찮은 여자에게서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의미로만 들었다면 이 이름없는 여인은 다시 한번 상처를 받을 수도 있는 표현이지만 역시 그들이 바람직하게 믿음으로 자라고 있다면 그것으로 전한 자는 위로를 삼아야 함을 배운다.

바울의 자세가 그런 것들을 감안하고 하는 말 같이 들린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6~7) 결국 자신에게 복음으로 베푼 사람들의 이름은 잊혀지게 되겠지만 이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믿음이 확고해 진다면 그것으로 감사를 해야 할 것이다.

이 여인이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그래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랑하며 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갖기도 한다.

“…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42b) 우리의 믿음이 최종적으로 이렇게 가야만 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하다. 우리가 죄인인 것을 분명히 깨닫고 회개하고 믿고 침례를 받는다면 거기에 따르는 분명한 언약은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고 약속되고 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사람으로 통해서 들을 필요가 없이 친히 들을 수 있다. 이것은 꼭 하늘로부터 신비한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아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성경은 모든 사람이 구할 수 있고 읽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듣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유명한 말씀이지만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행17:11~12)라는 경험도 역시 성경에 나타나고 있다.

오늘도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고백이 바로 “…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42b)는 확신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그러한 확신은 흔들리지 않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 있게 전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렇지 못한 일들이 이 마지막 시대에 더 쉽게 나타날 것임을 바울은 경계하고 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4:3~4)

“…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42b) 이것은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한 사람들의 고백이기 때문에 역시 오늘 우리의 체험이 되어야만 한다. 여기에 “우리가 친히 듣고”와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는 결과가 나타나 있다. 아무리 잘 전달해줘도 친히 들은 것만 못하다. 사람들이 누구나 주님으로부터 친히 들을 때에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구주, 인류를 구원하신 구세주임을 확신하게 된다. 모두 친히 들을 수 있어서 그리스도를 세상의 구주로 전하고 자랑할 수 있기를 …



Ⅲ. 갈릴리 사람들의 영접,(43~45)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이제 상황이 바뀌어서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서 제자들에 말씀하시고 목적지인 갈릴리에서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는 상황을 본다.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43) 사마리아 사람들의 요청으로 이틀을 그들과 함께 머무신 주님은 가시려는 노중(路中)에서도 제자들을 교훈 하심이 기록되고 있다.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44)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시는 갈릴리 지방의 남쪽에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행하신 가나가 있고 그 바로 밑에 예수님이 나고 자라셨던 나사렛이 있고, 조금 오른 쪽으로 아래에 나인성이 위치해 있고 가릴리 바다는 그보다 오른쪽 위에 위치해 있는 것을 성경지도에서 볼 수 있다.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실망시키지 않게 하시려고 미리 경계해 주시는 말씀일 수도 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44)하신 것인데 영적이지 못할 때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과 함께 나고 자란 선지자에 대해 신비감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나중 고향에 가셨을 때 이런 일이 실제로 나타났던 것이 기록되고 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마13:55~56f; 눅4:22-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럼에도 그들이 우리 주님께 놀라는 것은 “…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v36b)고 신기해 하는 것을 본다. 아버지의 직업을 들먹이는 것이나 이름을 직접 거론하는 것은 그의 삶에 신비함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44)는 주님의 말씀은 현재도 가능성을 가진 표현이다.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편에서 보고 이해하는 깊은 경지의 신앙이 아니라면 이런 평가는 어디나 있을 수 있다. ‘제나 내나 다를 것이 뭐냐!’ 그러나 영적인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꾼이라면 그런 쪽에서 받아 들이는 것이 사실 자신에게 유익이 될 수 없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갈릴리에서는 그들이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데 그것도 그들이 듣고 영접한 것이 아니라 직접 본 것 때문이었음을 요한은 덧붙이고 있다.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45f)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여 이틀을 함께 하셨던 주님은 이 갈릴리에서도 환영을 받고 계시다.

다만 그렇게 된 이유가 “…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45b)고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부분은 여전히 안타까움이다. 결국 사마리아 사람들이 여인의 말을 듣고 주님의 가르치심을 듣는 가운데 함께 머물기를 청하여 이틀을 함께 하였던 것과도 같은 이유였음을 본다.

“…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45b) 이스라엘 사람들의 명절인 삼대 절기에 이들 모두는 아니지만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고 행하시는 일들을 보고 온 갈릴리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주님을 영접하였다는 요한 사도의 평가다.

그런데 이 기록이 좀더 자세하게 기록되고 있다. 이 갈릴리 사람들 일부가 예루살렘에 명절을 지키러 갔지만 그 명절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절 동안 “…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45b)는 표현을 보면 예수님의 움직이심에 함께 하였다는 의미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나중에 십자가에 희생되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한 주님께서 처음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던 도마에게 주님께서는 다시 만나 부활을 확인 시키시면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 도다”(요20:29) 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모든 것을 보고 듣고 확인하고라야 믿겠다는 것은 완전한 믿음이 아니다.

적어도 성경이 언약하신 사실에 대해서는 보지 않고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믿음 이라야 진정한 믿음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그렇기 때문에 “…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45)는 요한의 기록은 어쩌면 안타까운 표현이다. 이런 사람들의 불신의 성격을 미리 아셨던 주님께서 다음 주에 보겠지만 바로 뒤에서(v48) “…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신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가진 불변하는 증거는 이미 주어졌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기록된 말씀이다. 이 생명의 표징은 수많은 역사 속에서 어둠의 세력이 끊임없이 없애보려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였지만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순종하려는 백성들에게 성령과 더불어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이다. 할렐루야!

이틀을 주님과 함께 머물렀던 사마리아 사람들은 믿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 이래서 주님과 함께 임마누엘을 사는 것이 중요하고 오늘도 이 은혜는 순종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다.

이런 경험 후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전해 들어서 가 아니라 친히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구세주라고 고백한다. 그런 이유에서 전해 듣는 것보다 직접 들어야 한다.

선지자가 자기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을 수 없다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주신 경계에도 불구하고 가신 곳 갈릴리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였는데 이유는 그들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주님의 행하신 일을 본 사람들이었다. 앞의 이론과 연결한다면 보고 확신하는 것이 확실하지만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믿고 순종하는 것이 더욱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