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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5:39~47 2019-06-30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자신을 믿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선언하시면서 그 이유를 낱낱이 말씀하신다. 특히 이러한 말씀을 하시면서 성경이 자신에 대하여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여기서 만도 두 번씩이나 강조하고 계신다.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39) 모세의 기록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46)

또 하나 반복하시는 것이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는 다르게 사람의 영광을 취하려 하기 때문이라 말씀하신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41)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44)

가장 안타까운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생명의 책이라고 믿으면서 거기서 말씀하시는 바를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생명이요 구원의 언약 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라는 명령에 순종치 못하면 자격을 요구하지 않고 거저 주시는 약속이라도 그러한 사람에게는 무효 하다는 경계의 교훈이다.

우리 모두가 육신을 입고 육신에 갇혀 사는 인생이면서도 그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영생은 그러한 사람에게는 너무나 머나먼 언약이 되고 만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한계를 가지지 않는 영원을 벗으시고 우리와 꼭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종의 형체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빌2:5~)

그렇게 마련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육신의 한계를 벗어버리지 못하여 잃는다면 하나님 보시기에도 안타까우실 것이다. 유대인들이 생명의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표적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가르침이 부족해서도 아니었다.

결국 자존심과 세상의 영화를 포기할 수 없어서 그들은 영생을 포기하고 만다. 모세를 통해서 주신 궁극적인 약속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그 율법 속에서 예언하신 메시야에 대한 언약이고 사람 스스로는 절대로 지킬 수 없는 것이 율법 임을 깨달으면서 메시야에게로 와야 함을 교훈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다.

즉 율법은 메시야에게로 사람들을 이끌고 가르치는 화살표였지만 그 율법이 제시하는 메시야를 순종하지 못하면 그 화살은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쏘아 죽이는 역할을 할 것임을 주님은 말씀하신다.

이러한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당연히 유효한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듣고 경성해야 할 중요한 교훈이다.



Ⅰ. 영생을 원하면서도 주님께로 오지 않음,(39~40)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지난 시간에도 많이 등장했던 낱말인 ‘증언’이 오늘 첫 절에도 등장하고 있다. 사람들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전3:11) 자연히 자신의 보다 근본적인 출처를 알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막연하게라도 창조주를 알고자 하여 여러가지 영적인 세계를 기웃거리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에 대해 증거하는 성경을 읽으려 하지 않고 믿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자신을 가장 바르게 알려주시기 위해 주신 정보가 바로 성경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께 대한 정보를 가장 바르게 알고자 한다면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음성이나 신기한 역사로 자신을 알리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의 일꾼들을 통하여 기록해 주신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은 물론이고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지 모두 기록해 두셨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성경만 읽으면 주님의 뜻을 가장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39f) 당시의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오늘 우리도 성경을 읽는 진정한 이유는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일반적인 생각이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는 명령은 너무나 단순하고 분명하다.

여기에서 간략하게나마 살펴야 할 두 단어는 ‘성경’과 ‘연구하다’하는 낱말이다. ‘성경[γραφή, graphe 기록, 기록된]’이라는 의미이고 ‘연구하다[ἐραυνάω, eraunao 찾다, 조사하다, 살피다]’는 각각의 뜻으로 역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기록된 성경을 찾고 조사하는 자세를 가짐으로 연결되는 내용과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고 싶으면 성경을 읽으라!’는 하나님의 당부로; 그럼에도 읽지 않는 것은 영생을 얻을 마음이 없다는 논리가 된다. 여기에는 어떤 핑계도 변명도 합당하지 않다.

“…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39b) 여기에서 성경을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성경의 주제를 말씀하신다. 성경은 율법이건 시가서이건 선지서이건 역사서이건 예외없이 그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임을 확신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꼭 같은 내용의 말씀을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신 바 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7)

그럼에도 여기에 유대인들의 모순을 지적하신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40) 성경의 모든 내용은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있는데 정작 그 가르치는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에도 그분께 가지 않았다는 말씀은 가까이 하지 않고 멀리 피하기만 하였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덧붙이시는 말씀이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41)시는 것이다. 뒤에서도 말씀하시지만 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영광을 취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사라질 영광을 놓치지 않으려는 데 그 이유가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오는 영광만을 기대하신다는 말씀이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읽고 찾지만 그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라는 명령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성경의 가치와 역할을 잘 못 오해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썩어지고 없어질 것을 취하고 지키라고 성경은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확보하고 누리는 것을 위하여 말씀이 주어졌음을 안다면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 주님께 가는 것을 최고의 인생의 가치와 목표로 삼을 수 있어야만 한다.



Ⅱ.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음을 지적,(42~44)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여기서 주님은 자신의 선택된 백성들을 향한 안타까움이 자신들을 무한한 사랑으로 용납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하신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42)

어찌 보면 지속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의 귀중 함이나 복됨을 모른다. 흔하게 물을 쓰면서 물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러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 비극이다. 사실 이스라엘이 그랬고 이 인류가 그렇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에게 새 언약을 주시려 하신 것도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었다고 증거해 준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렘31:3)

이러한 자세를 호세야 선지자도 고발하고 있다.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호11:2) 주님께서 직접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42)는 선언은 이스라엘에게 비극적인 선언이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43f) 이러한 안타까움은 말씀 중에 계속되는 안타까움이다. 그들이 그토록 들먹이며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왔다고 말씀하시지만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

주님께서 행하시는 표적들이 모두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셨음에도 그들은 전혀 믿으려 들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요10:25)라고 확인하신다.

“…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43b) 당시 오히려 유명세를 가지고 있었던 힐렐(Hillel)이나 삼마이(Shammai) 같은 랍비들을 오히려 존경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자신을 소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저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들이 이렇게 된 원인을 주님은 바로 지적하신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44ff) 한 마디로 나눠먹기식으로 영광을 취하는 것인데 사람의 영광을 우선시 함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이미 마태복음에서도 경계하고 계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6:1)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잘 못된 자세를 지적하시면서도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마23:5)라는 말씀도 마찬가지다.

“…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44m) 사람에게서 영광을 얻으려고 하면 절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어렵다. 뒤에 가서도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12:43)는 요한의 평가도 이를 잘 증거해 주고 있다.

지난 제 7회 아카펠라 찬양잔치에서 눅17:11~19에서 제가 전했던 말씀도 여기에 연결된다. 10명의 나병 환자들 중에 나머지 9명은 모두 사람들에게 먼저 인정을 받으려는 것이 앞섰기 때문에 자신의 운명을 바꿔준 주님께 감사를 드리러 오지 못했다고 하였다.

오늘 우리 시대의 신앙의 위험성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는 자세보다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자세들이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44)는 주님의 안타까움을 들을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41) 말씀하셨음에도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취하여 애쓴다면 하늘에서는 어떤 영광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Ⅲ. 예언을 믿었다면 성취를 믿을 것이다.(45~47)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정죄의 두려움은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은 사람을 정죄하고 망하게 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심을 증거하신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45f)

주님께서는 사람을 고발하거나 정죄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죄로 정죄된 사람들을 그 죄에서 자유케 하여 살게 하려고 오신 분이다. 그런 이유에서 산상보훈에서도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마5:25)하여 고발하는 일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다.

사실 생명 없는 종교의 특징은 저주 받을 것에 대한 공포때문이다. 대부분의 미신을 믿는 사람들 조차 어떤 종교적 행위를 하는 것은 동티 만날까 봐 두려워하는 이유에서다. 복음은 공포의 종교나 저주의 종교와 다르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가 연보를 드리는 것은 저주나 동티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무한한 자유와 생명을 주신 사랑에 감사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세상의 제물을 드리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저들에게 바른 판단을 내리신다. “…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45b) 율법은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여지없이 정죄한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주신 법이기 때문에 당연히 정죄의 법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하였고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롬4:15f)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46)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전달하였지만 율법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면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18:15)고 당부한 바 있다.

오늘 v39의 말씀처럼 성경은 아담의 범죄 후부터 창세기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한 것으로부터 끊임없이 사람을 죄에서 구원할 메시야를 예언해 왔다.

그 후에 주어진 율법은 결국 이 메시야에게로 피하지 않는다면 저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의 저주의 두려움을 선언해 주면서 사탄의 뱀 독에 감염된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 노릇을 한다고 바울은 증거한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3:24)

그러므로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46)는 주님의 탄식은 당연한 것이다. 결국 성취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예언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선택된 이스라엘의 비극을 한 마디로 결론 지으신다.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47)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저들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가를 분명히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47f) 표면적으로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믿고 순종하는 것처럼 행동하며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께나 바울에게 율법을 어긴다고 정죄까지 하였지만 마음을 들여다 보시는 주님께서 보실 때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씀이다.

구체적인 불신의 증거들의 예를 들면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막7:10~12; 마15:4~6)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분명히 율법이 주는 계명을 믿지 않는 행위이다.

다른 한 곳을 참고하면 마23:16~22 내용이다. 다 읽어볼 수는 없지만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는 그야말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모습들이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불신의 극치를 달리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지적하신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씀이다. 그런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47) 탄식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경계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보고 계심을 믿고 의식한다면 하지 못할 행동을 더러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어떤 종교 행위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책이 아니라 인류의 유일한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책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인도하는 주님께 가는 것만이 영생을 얻는 비결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만 유익한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취하려는 것을 그만두고 영원 속에서 영광을 입혀 주실 수 있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매 순간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시며 우리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이심을 믿고 온전히 순종하여 예언된 영광과 존귀를 자신의 것으로 누릴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안타까워 하지 않으시고 기뻐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이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뿐만 아니라 살아 나셔서 하늘에 오르시고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