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란?
2004-09-14



1. 예배(Worship)란



(이 글은 원래 방명록에 올려져 있었으나 글의 성격이 방명록에 맞지 않아 관리자가 이곳 질문/답변 게시판으로 옮긴 것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사하"라고 하는데 "섬기다, 절하다, 엎드리다"의 뜻이며, 헬라어로는 "프로스쿠네인"이라고 하는데 "존경하다, 섬기다, 모시다, 순복하다"는 뜻을 가졌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요리문답 제일조에 보면,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원히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고 했다. 이런 정의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를 즐거워한다는 말은 예배하는 마음의 태도를 묘사한 것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창조되었다. 고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성호를 높이기 위하여 생활하는 것은 인생의 최대의 목적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생활 그 자체가 바로 예배하는 생활이다. 예배의 생활이란 자기 중심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중심의 생활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예배 의식은 기도, 찬미, 성서낭독, 설교, 세례, 주의만찬, 연보, 축도로 성립된다. 크게 구분하면 주의만찬, 설교, 성서낭독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미치는 면이고, 찬미, 기도, 연보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다. 세례와 축도는 양면을 포함한다. 고로 완전한 예배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내려오는 것과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올라가는 두 면이 조화될 때 성립된다. 만일 하나님에게 받은 것만 생각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소홀히 하면 건전한 예배가 될 수 없다. 주의만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념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을 전하는 행동이다. 성서낭독은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고로 성서는 경건한 태도로 읽어야 하고, 듣는 청중으로 하여금 말씀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읽어야 한다. 설교는 예배에 대상인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도록 가르치려는 데 목적이 있다. 또한 회중으로 하여금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참 마음을 갖게 해 주는 것이 설교의 사명이다. 바울은 "유대인은 기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1:22-23)고 설교의 사명이 십자가를 전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고로 십자가 없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로서 찬미는 예배의 중요한 요소다. 예배에 있어서 구속의 감격을 마음으로부터 노래할 때, 인간들의 메마른 마음을 청산하게 하며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든다.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이 대화하는 것이다. 연보는 감사의 표현이다. 금액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고 감사하는 정신에 그 가치가 있다. 예배의 참 목적은 하나님을 찬미하고 자신을 잊어버리는 데 있다. 고로 예배할 때에 주의할 것은 예배드리는 자의 경건한 정신과 엄숙한 자세를 갖는 것이다.



2. 공동예배일은 주일이다.



주일은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안식후 첫날) 즉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말한다. 이날은 성경은 주의 날 이라고도 한다. 초대교회가 안식 후 첫날 주의만찬중심의 예배를 드린 기록이 행20:7에 있다. 또 고전16:1-2에도 매주일첫날(주일은 1주일의 첫날) 예배를 드린 기록을 찾을 수 있고, 밧모섬에 귀향간 사도요한은 홀로 주일날(주의 날) 예배를 드렸다(계1:10)

주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 그리고 지금은 온 인류에게 복음이 전해졌다. 고로 안식일은 천지 창조 후 쉬신 날로서 유대교의 성일 이지만 주일은 주님이 부활하심을 지키는 성일로써 초대교회가 행20:7이전에는 안식일에 예배를 드렸으나 그 이후에는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행20:7이후에서 안식일 예배에 대한 기록이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안식일을 주장하는 자들은 또한 콘스탄틴대제가 주일을 기독교의 예배일로 선포했다는 근거를 내세우며 비성경적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단지 초대교회부터 지켜온 예배일인 주일을 콘스탄틴대제가 공휴일로 인정하고 공포한 것에 불과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콘스탄틴대제가 임으로 만든 예배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안식일 예배는 유대교의 예배일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초대교회는 주일에 모여 주의만찬(성만찬) 중심의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살후3:6에서 경고하기를 사도들에게 받은 유전대로 하라고 했고, 사도들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않는 자와는 교제를 중단하라 했다. 고로 안식일 예배를 주장하는 자들과는 교제하면 안 된다.



3. 신약의 예배



신약성경에 예배순서에 대한 말이 없으나 행2:42-47과 사도바울의 서신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설교 / 예언(고전14:), 교훈과 권면(롬12:7-8), 사도의 가르침 (행2:42)

2) 찬양 / 시(시편)와 찬미와 신령한(성가) 노래(엡5:19, 골3:16) 하나님을 찬미(행2:47)

3) 주의만찬 / 안식 후 첫날 떡을 떼며(행20:7) 주의만찬에 대 하여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부탁(고전11:20-34)

4) 연보 / 매주일첫날(고전16:1-2)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둠(행4:37)

5) 기도(행2:42)



4. 오늘의 예배의 신학과 경향



1)초대교회로 돌아가고자 하는 경향



오늘날의 예배신학의 동향은 예전갱신에 대한 관심이 큰 것이 사실이지만 전반적으로는 각 교파와 교단마다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예전갱신운동의 주요 특징은 예배 안에서 성례전적 기능을 회복하거나 강화하고자 하는 노력이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 동안 개신교에서 예배가 너무 인지적(cognitive) 측면에만 기울어 설교만이 예배의 전부인양 이해될 만큼 예배가 지성화 되어졌던 것을 반성하고 성례전적 기능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즉 초대교회에 대한 연구를 통해 예배의 균형적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성례전적 예배에 대한 초대교회의 전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경향을 말한다. 초대교회로 돌아가고자 하는 경향의 예배는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육기관 : 그리스도신학대학교/총장기준서박사, 서울기독대학교/총장이강평박사)에서 드리는 예배에서 찾을 수 있다.



2) 경험주의적 예배를 강조하는 경향



성령의 현재적인 역사를 강조하는 경험주의적 예배경향의 대표적인 그룹들은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를 들 수 있다. 오순절 및 은사주의적 예배성향이 현대교회의 주요한 예배형식임을 부인하기는 더 이상 어렵다. 교회성장의 추세에 있어서 타 교파들의 정체 혹은 퇴조에도 불구하고 가장 왕성하고 역동적인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 진영이기 때문이다.

이들 예배들은 분명 교리적 설교나 예배순서 등으로 채워진 전통개신교회의 단조롭고 무거운 예배형식과는 대조적으로 현재적인 경험 등을 내세워, 예배의 역동성을 높여 주고 예배자들의 자발적인 참여의지를 높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색다른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예배들은 예배가 지니는 균형적인 신학의 틀을 지나치게 경험주의 일변도로 끌고 갈 위험이 자주 지적되고 있다.



3) 시대적 상황에 적응하려는 경향



최근 많이 알려진 열린예배(구도자예배)가 있다. 이 예배의 전략 중의 중요한 내용은 '사람들을 지루하게 하지 않기 위해 시대적이며, 창의적인 예배를 드리자'는 것이며 '기독교와 구도자의 일상적 삶 사이의 상관적 연계를 제공토록 하자'는 것이다. 형식적인 면에서도 사람들이 익숙해져 있는 예술과 드라마 등의 장르를 사용하고 예배의 주제도 가정과 사회에서 발생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룬다는 특징을 지닌다. 참여자들에게 흥미 있는 공연으로 예배에 대한 참여에의 관심을 높이는 긍정적인 점이 있는가 하면 회중을 관객의 위치로 전락시킨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참여한 사람들에게 자발적으로 교회의 회원이 되기까지 등록이나 결단을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불필요한 부담이나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전도의 절박성에 대해 안이한 시각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열린예배가 지루하고 무미한 예배에 식상한 현대인들을 다시금 예배 속에 흡인키 위해 시도하는 전략과 기지를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일산의 어느 지역에서는 토요일에 이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있는데, 교인들의 상당수가 이 예배에 참여하면서(타 교회 교인까지가세)주일예배를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다.



5. 한국교회 예배에 대한 제언



1) 주의만찬중심의 예배로 바꾸자



이제는 설교중심 예배에서 주의만찬은 중심의 예배로 바뀌어야 한다. 그간 한국교회에서는 주의만찬에 사용되는 떡을 카스테라를 사용하는 우를 범했다. 성경에서 금하고 있는 유교병을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주의만찬의 의미를 충분히 살리기에는 적절치 못한 잘못된 관행이었다. 실상 예수님의 주의만찬 제정시 성물로서 사용되었던 빵은 그가 살아가셨던 유대 사회의 배경에서 나온 문화적 산물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식사 중 떡과 잔을 취하여 주의만찬을 시행하였는데 이것들 속에는 유대인들의 주식이면서 생명의 음식이라는 상징성이 깊이 배어 있었다. 말하자면 백성들이 주로 먹는 주식을 사용하여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시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어 성경이 떡이라고 번역한 일은 참으로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주의만찬용 떡은 여전히 카스테라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총회, 노회, 개교회에서조차 자연스럽게 사용되어 오고 있다.

우리 전통에서 볼 때 쌀과 떡 안에는 생명, 평화, 감사, 희생, 나눔 등의 의미가 들어 있다. 사람들은 떡을 먹으면서 더 깊고 친숙한 의미들을 풍부하게 경험하게 되고 주의만찬 예식의 본문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계시를 들으면서 구속사건의 현재화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떡이 토속종교와의 관련성 때문에 우려가 있을 수 있으나 전통적인 설교가 동반되는 예배에서 그것은 기우라고 생각한다. 문화적 변용이 된 주의만찬용 떡은 한국교회의 예배자들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을 주체적이면서 친숙하게 경험하고 삶 속에서 구현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2) 찬양과 악기를 우리의것을 사용하자



한국교회의 일부에서는 한국의 전통음악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찬송가의 대다수가 외국 곡조, 외국가사를 번역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세계교회와 동일한 곡조와 내용의 찬송가를 부른다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우리에게 친숙하고 우리의 정서에 어울리는 곡조들이 너무 적하다는 것은 매우 유감이다. 악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르간만이 장엄하고 성스럽다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예배의 악기는 예배 곡과 마찬가지로 엄밀히 말하면 중립적이어서 그 자체가 성과 속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가사를 담느냐에 의해 예배의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우리에게 익숙한 찬송가 중에 '천부여 의지 없어서'는 스코틀랜드 민요에서 온 것이고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는 스웨덴 민요에서 온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전통적인 가락이나 악기를 사용한 음악에 찬송가 가사를 덧붙여 사용한다면 서구화된 오늘의 상황이긴 하지만 우리들의 내면 속에 잠재된 친근한 정서로 인해 보다 깊이 공감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3) 우리의 명절, 기념일을 보다 적극적으로 관여하자



예배의 시간적 요소는 교회력에 따른 예배의 운용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년 중 모든 주일들 위에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의 소 주제들을 순서대로 부여하여 기념하는 것이 바로 교회력이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이 우리의 시간 혹은 역사와 동떨어진 채, 무시간적으로(timeless)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실제적 역사의 시간 안에서 일어난 일들인 것처럼 구속사건을 우리의 실제 시간과 연계시키는 노력이다.

한국 교회가 예배를 현실의 시간 안에 두어 현장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은 우선 우리의 문화 속에 있는 명절들과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기념일들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이용하여 교회의 관심영역을 통전적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배에서 우리의 명절과 기념일들에 따른 의미들의 반영은 예배자들로 하여금 예배에서 보다 깊은 현실감을 느끼게 도와줄 것이다. 그간 한국 교회에서는 역사적인 기념일들(예를 들어 삼일절, 육이오 기념주일, 해방기념주일 등등)을 예배에 비교적 잘 반영해 왔다고 평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절기의 반영이 주로 설교에만 국한되었을 뿐, 예배의 각종 순서 속에서는 잘 반영되지 못하는 감이 없지 않았다.



4) 우리의 건축양식과 디자인과 복장을 반영하자



한국의 보수교단 가운데 한국식 건축양식을 사용하고 기와로 꾸민 교회건물을 짓는 모습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과거의 건축물이 우리에게 친숙하다는 맹신은 곤란하지만 우리의 정서에 맞는 건축 구조와 그 속에서 예배와 삶을 연계시키는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밖에 예배 집례자나 성가대원들의 복식도 디자인이나 복장 자체의 색깔은 한국의 복식을 충분히 연구하여 반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성탄절이나 추수감사절과 같은 절기 때에 한복을 입고 교회에 모이는 모습은 이미 널리 보편화된 것을 보면 이러한 문화적 적용의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한국교회들이 그간의 분열의 양상을 벗어버리고 이런 부분에서라도 서로 합의된 결과들을 도출하도록 노력한다면 예배와 삶의 일치는 물론 교회와 교회의 일치도 한층 가속화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5) 사이버는 예배를 대신할수 없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프로그램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흘러 교인들이 프로그램따라 이동하는 기 현상을 낳고 있다. 이 때 한 가지 예배와 생활의 관계를 고찰함에 있어서 짚고 넘어 가야할 것은 첨단 정보화 시대의 중요한 수단으로 떠오른 사이버 세계와 그것이 예배에 주는 영향에 대한 고민이다. 사이버는 분명 현대인들에게 훌륭한 문명의 이기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사이버를 통한 예배를 생각할 때 매우 조심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사이버를 통해서 접하는 가상현실 속에서는 타자와의 만남 자체가 왜곡되거나 불완전한 만남이 되기 쉽다. 또한 사이버상의 만남은 실제적인 관계의 역동을 경험케 할 수 없다. 예배는 오히려 이런 불완전한 만남의 현실과는 달리 물리적 현실을 지닌 채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서로 어울리고 서로에 대해 연대와 책임을 느끼는 그런 만남이 되어야 한다. 예배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진실로 잇는 이음매가 되어야 하기에 서로 만남으로서 체득되는, 역동이 있는 예배가 결코 사이버 예배로 대치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상은 모 신학교 계절학기 특강시간에 저자가 강의한 논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