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세례에 대해서 질문입니다.
2008-10-14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성령을 부어주심”이라는 것에 대해 선지서를 통해 예언하십니다.

구체적으로, “내가(여호와) 그들을(이스라엘 백성) 두 번 다시 버리지 않을 것이니 이는 내가 나의 신을(성령) 그들에게 쏟아 부었음이니라.” 라고 하시며 그들과 세우신 언약을 저버리시지 않을 것임을 맹세하십니다.



요엘서에서는 “내가 나의 신을 만민에게 부어줄 것이며....”라고 하시면서 성령의 부어주심 을 받은 자들이 장래 일을 말하며 예언하고 꿈을 꾸게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이것도 언약 적인 성격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사복음서에서도 세례 요한이 “성령 세례”에 관해 말하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의 나라(여호와 의 날)가 가까왔기 때문에 하는 선포이며 구원과 심판에 관한 것을 단호하게 얘기하는 장면 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에 하신 말씀인데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 것을 당부하시면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성령 강림)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성령 세례”와 “성령이 임하심”이란 단어를 교호적으로 쓰셨습니다. 즉 “성령세례=성령이 임함”은 같다는 설명입니다.



사도행전 전체적으로 볼 때에도 “성령을 받음”이라는 단어나 “성령 세례”, “성령을 부어주심”이라는 단어들은 항시 교호적으로 같은 의미에서 쓰여졌습니다. 대표적으로 고넬료 집안에 베드로가 방문했을 때 이 말들을 서로 같은 의미의 말로서 표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서신서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을 받는다는 것 외에는 달리 특별한 사건으로서 의 2차적 은혜를 언급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신학자들은 성령론을 통해 너무도 복잡할 정도로 이런 단어들을 구별하며 쓰고 있는데 오히려 성경을 통해 볼 때 너무도 부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성경은 자연스럽게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나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이 항상 동의어로서 쓰는 것으로 얘기하는데 왜 이렇게 성령론을 복잡하게 설명을 하는 것인가요?



성령세례의 가장 분명한 차이는 구원 받을 자들과 심판 받을 자들의 간격으로 나타납니다.(마 3:11)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 사도조차도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령 부어주심은 바로 하늘에 속한 백성들의 표로 인침이라고도 표현되는 것입니다.(엡 1:13)



그러나 말씀하신 ‘내가 그들을 두 번 다시 버리지 않을 것이니 이는 내가 나의 신을 그들에게 쏟아 부었음이니라.’는 내용은 성경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다만 사도행전의 내용은 (욜 2:28~29)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지적하신 “성령을 받음, 성령 세례, 성령을 부어주심”을 어원적으로 살피고 그 차이들을 이해하는 것으로 답변을 개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에 인용한 요엘서에 두번쓰인 [부어주다, (샤파크, shaphak)] 라는 단어는 히브리말로 ‘(물을) 따르다, 붓다, 쏟다; (피를) 흘리다.’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말씀의 인용구인 (행 2:17~18)의 헬라어는 (엑케오, ekcheo)로 역시 ‘붓다, 주다, (피를) 쏟다, 흘리다.’ 라는 같은 의를 가지는 말이며



신약성경에서 가장 분명한 성령의 약속인 요엘서와 시편을 인용한 후에 결론적인 말씀인 같은 장의 38절 말씀은 “…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라는 말씀의 “…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는 (람바노, lambano)로 시제에 따른 차이에도 불구하고 ‘취하다, ~을 잡다, 주어지다, 받다’ 라는 능동과 수동형에서 상대적인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 편에서는 주시 것이요 사람 입장에서는 받는다는 의미이지요…



먼저 (행 8:17)의 성령을 ‘받는지라’는 람바노, lambano로 쓰였으며 (행 1:5)과 (행 11:16)의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에서는 (밥티조, baptizo)로 (행 10:45)의 ‘성령을 부어주심’은 앞의 ‘받다’ 라는 말과 같은 ‘람바노’입니다.



결국 지적하신 3가지 성령 주심의 표현은 어원 상으로 2가지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같은 성령의 사람에게 주심이 사도행전 속에서 조차 외향적으로도 차이가 있었음은 인정해야만 할 것 같고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이방인에게까지 복음과 구원을 끼치심에 있어지는 특별한 상황들을 일반화 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하는 사도들 조차도 이런 부분에서는 혼란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엑시스테미(eksistemi)]”(행 10:45) 라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특별한 사람들에게 권능을 주셔서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외부적으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행 2:2~3) 라고 성령 부어 주심을 보는 사람들로 듣고 보게 하였고 이와 같은 현상이 나중 사도들도 경험하였습니다.(행 8:17), (행 10:44~46)



간과 할 수 없는 사실은 오순절에 사도들이 받았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성령을 주신 사람들은 표현이 적절치는 않지만, 이스라엘 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개처럼 취급하던 사마리아 사람들과 베드로조차도 구원을 인정할 수 없었던(특히 욥바의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해서 보여주시기 까지 하셨지만) 최초의 이방인구원자들인 고넬료의 가정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령 부어주심을 통하여 구원이 이방인에게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으셨다면 ‘성령의 충만을 받고 능력을 행했던 사도 베드로’조차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놀랄만한 역사를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은” 거듭난 사람들에게 주시는 ‘인(印) 침으로서의 성령’(엡 1:13)의 선물은 이 말씀에 연이어 그 말씀을 순종하여 세례를 받은 3천명에게 조차도 보이는 현상으로서가 아니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행 2:41)



오늘 날도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은사집회라는 모임을 행하면서 성령 임하심을 확신시키기 위해 강단 위에서 인위적으로 “휙~ 휙~” 소리를 흉내 내고 하는 것들을 보는데 그렇다면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은 왜 흉내내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한 성령은 여러 모양과 형태로 그 영향이 나타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분명한 모델을 성경이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혼란할 필요는 없다고 확신합니다.



결론적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에 의해서 움직이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상한 언어나 행동보다는 세상의 죄의 사람들과 구별된 변화된 하늘에 속한 경건한 삶의 변화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성령 충만을 주장하면서도 비도덕적이고 이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부도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안타까운 모습이요, 그들이 의지하여 산다는 성령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갈라디아서의 육체의 사람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들의 차이가 몇 항목을 제외하고 특히 성령의 열매는 모두 도덕적인 항목들이라는 데서 더욱 그렇습니다. 비교해 보십시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갈 5:19~20)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



하나님의 성령의 법은 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보다 상위 법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의 사람들 즉 영에 의해 지배를 받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고 확신시켜 줍니다.



용어의 차이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가 하는 생명과 죄의 삶의 차이를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기를 바라고 용어의 차이를 물으셨는데 너무 많은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