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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1:18~25 2007-01-28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이 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이 무엇인가를 말하면서 그 복음에는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신들의 의지에 상관없이 죄 아래 나서 영원한 절망으로 가는 인류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동시적으로 나타났다고 증거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왜 복음을 주셨는가 하는 복음의 위력과 이 복음이 적용됨으로 나타나는 결과들을 표현했다면, 오늘부터 다루게 되는 말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능력과 은혜의 복음이 사람에 의해서 거부되고 변질되어서 무익하게 되는 비극적인 부분들을 계속 살피게 될 것이다.

광명한 빛은 왔지만 어두움에 익숙한 사람들은 한사코 그 광명을 뒤로 등지고 여전히 예전의 어둠을 더 좋아하는 참으로 가련한 모습들을 보게 된다.

복음이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로만 적용된다면 죄를 이기는 능력이요 의롭게 살 수 있는 권능이지만,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알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실질적인 삶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름이 없이 부끄러운 모습과 초라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여전히 과거에 하나님의 능력의 약속을 가지고 광야 길이지만 이적과 표적과 함께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를 받으며 가나안을 향해 가면서도 애굽을 더 동경하고 추억하던 이스라엘과 같이 초라하고 불평으로 가득찬 삶을 살다가 마침내는 광야에서 다 시체가 되고만 불신의 사람들처럼, 진노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고 경고해 주고 있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요 빛이지만 그것을 거역하는 대상에게는 심판과 형벌의 어두움만이 있게 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에 대해서 경계를 주고 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10:26~27)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그것을 실천치 않는 이름뿐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고소하고 있다.

오늘 나누게 되는 이런 경계를 바로 이해하고 살펴서 적어도 우리 신앙의 삶 속에서만은 이런 부정적인 모습들이 없기를 바라고, 혹시 그런 모습이 있다면 회개하고 처음 사랑을 가지므로 은혜로 나아가는 삶이 …



Ⅰ.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18, 24~25)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범죄한 인류는 오늘 제 자신을 포함해서 진노의 대상이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 여기에 누구도 예외는 없다.

그러나 그 다음에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난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4~6)

전혀 소망이 없던 오로지 진노만이 당연한 가련한 존재들인 우리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지불하시고 사셔서 형벌 받을 자리에서 복의 자리로, 사랑 받는 자리로 옮기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사실 진노를 받아도 싸고 당연한 존재들인 우리들이 긍휼을 입게 된 것 조차가 우리 자신이 이룬 업적이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가 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진노를 받는 자리에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 모른다. 그러면 누가 진노의 대상인가를 살핌으로써 저주의 자리를 뛰쳐나와야만 할 것이다.

1.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다.(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사람의 욕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것이요, 인간의 것으로 하나님의 것을 막는 것이요, 죄의 습성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로막는 것이요, 거짓으로 참을 가리는 거시오, 어두움으로 빛을 가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의지는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진리요,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게 하시려는 사랑의 의지이다.

사도행전 13장에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을 받고 구부로 섬의 바보에 이르렀을 때에 그 곳의 총독 서기오 바울이 복음을 듣고자 하는데, 예전부터 이곳에 있던 바예수 라는 박수가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자 바울은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10)고 책망하자 이 박수는 소경이 되어 자기를 인도할 자를 찾게 된다.

이 박수야 말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인을 구원하려는 의지를 막는 것이야말로 진노 받아 마땅하기 때문에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눅17:2)는 무서운 저주를 듣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가 바로 진노의 대상인데 이것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반대되는 인간의 육신적 욕망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현저한 육체의 일들이다. 이러한 인간들에게 하늘로부터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선언하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세상이나 땅에서는 오히려 유리한 일들이 많다.

2.하나님께서 포기하시는 사람들이다.(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범죄한 인간이 최종적으로 긍휼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더 이상 상관하지 않으시고 내어 버려 두신다면 그 다음은 더 이상 소망이 없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포기해 버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아무리 말씀으로 경건을 지도해도 계속 그 마음이 성령의 감화를 거절하고 자신의 욕망에 이끌리는 사람은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심으로서 영과 육이 영원한 절망의 심연으로 내려갈 수 밖에 없는 모습 자체가 진노를 당할 수 밖에 없는 저주 받은 인생이다. 호세아의 고백처럼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호11:2)

사랑을 거절하고 점점 멀리 가는 고집스러워서 하나님께서 버려두실 수 밖에 없는 비극으로 나아가는 어리석음은 진노가 머무를 수 밖에 없는 인생이다.

3.예전의 진노의 삶에 여전히 머무르게 된다.(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을 알기 이전의 상태를 가르친다고 보여지는데 삶의 목적과 수단이 바뀌어버린 모습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알지 못해서 그랬다면 아직은 소망이 있지만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는 것을 보면 과거에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온 사람이 분명하고 참된 것을 거짓 것으로 덮어버리는 데까지 가는 사람은 더 이상 소망이 없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사람들을 가르쳐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4~6)고 탄식함을 듣는다.

베드로 사도는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벧후2:21~22)라고 한탄한다.

십자가의 도를 알았다면 과거 세상의 수치스런 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보다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것은 없다.



Ⅱ.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충분히 보여 주셨다.(19~20)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시기를 원하시고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신다.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동원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표현이 바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람들이 자신을 만나주기를 바라시느냐 하면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행17:27)

이제는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안다는 것 자체가 육신적인 죄에 사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모르는 체 억지를 부리기도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충분히 자신을 알도록 여러 모양으로 계시하셨다.

1.저희 속에 보이셨다.(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양심이라는 것을 두셨다. 이것이 바로 짐승과 다른 점이고, 죄로 인해서 무디어지긴 했어도 범죄 할 때 거기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양심이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2:15)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곧 양심이 하나님이라고 까지 말하지만 양심은 사실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범죄한 양심은 더 이상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1:15) 결국 이렇게 된 이유를 바울은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2)고 증거 한다.

이 양심이 회복되는 것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가능함을 베드로 사도는 가르친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3:21)

하나님은 자신을 사람들의 속에 양심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보이셨다.

2.삼라만상 하나님의 피조물들에 보이셨다.(20f)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이세상에 보이는 것들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을 가진 결과들을 나타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

범신론 주의자들은 이 세상에 존재한 것들은 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신(神)이라고 생각하고 숭배한다. 그러나 자연 자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신 분의 솜씨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 계절[봄-생명, 여름-뜨거운 사랑, 가을-심판, 겨울-사죄 등등]에도 계시가 있고 하늘에도 일기에도 나무나 풀 포기에도 하나님의 솜씨를 나타내고 오히려 이 자연은 창조주의 솜씨를 왜곡시키지 않고 그대로 나타낸다. 시편 19편은 이러한 사실을 잘 전달해주고 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1)로 시작해서 6절까지 이러한 계시의 증거를 소개한다.

독특한 표현은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영원하신 능력과 신성)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믿음으로 보기만 하면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다.

3.성경을 통해서 변명할 수 없는 진리를 주셨다.(20b)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통해서는 창조주요 우주의 운행자이신 하나님을 막연히 보여줄 뿐 생명의 구세주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보다 완전한 계시인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핑계치 못하게 하셨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1~2)

시편 19편을 말한바 있는데 그 시가 중요한 이유는 1~6까지는 자연 계시(啓示)를 소개한다면 7~11절까지는 이 기록된 계시의 완전무결(完全無缺)함을 증거 한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7~8) 그러므로 성경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는 더 이상 ‘몰라서 그랬습니다.’라고 변명할 수 없다.

결국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 속에 양심으로 보이시고, 보이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로 보이시고, 최종적으로 완벽한 구원의 메시지인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전히 우리에게 자신을 보이셨기 대문에 우리는 변명할 수 없게 되었다.



Ⅲ.하나님을 하나님 대접하지 않는 사람들을 책망하신다.(21~23)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예수께서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요15:24) 라고 아버지의 말씀과 율법을 온전히 지킴으로써 그렇지 못한 종교 지도자들이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선언을 하셨다.

1.안다고 하는 데는 책임이 따른다.(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분명 엄청난 복이다. 그러나 주님을 바로 안다면 앎에서 끝나서는 안된다. 앎이 실천되지 않으면 그것은 저주일 수 있다는 데서 두려워 해야 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41)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4:17)

2.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않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왜 존재하는가?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지으신 이유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고 분명히 선언하신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반드시 그 분께 영광을 돌리게 되어 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섬기는 사람들에게 “왜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가?” 묻는다면 예외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머리와 입술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가 되는데 삶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왜 그럴까? 그것은 오늘 대부분 우리의 신앙이 대단히 관념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도 관념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관념적인 것을 대단히 경계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우리가 머리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외치면서도 사실적인 모습이 죄를 짓는 모습에 있다면 과연 그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실까? 경계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의 모습의 대부분은 그런 모습이다. 그것이 죽은 믿음이고 죽은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 없고 자신을 구원하지도 못한다.

우리는 탄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나의 독생자를 보내주마” 라고 말에 그치고 생각에 그쳤다면 어떻게 우리가 죄를 벗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을까! 를 생각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 끔찍한 십자가에 사실로 달리신 결과로 오늘 우리가 탄생하게 되었다.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주님의 희생의 실체에 응답하는 신앙이 되지 못하면 우리의 모든 신앙의 구호는 공치사에 그치고 말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우리의 구원이 사실적이기 위해서 우리의 신앙도 사실적이어야만 한다.

3.마침내는 하나님의 자리에 속된 것들로 바꾸게 된다.(22~23)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위치에 모시지 못하면 우리는 영적으로 어리석게 되고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려주신 주님을 영광의 자리에 모시는 대신 그 자리에 온 갓 우리 육신이 좋아 하는 것을 올리게 되고, 오히려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을 우리가 그것들을 보다 편하게 얻게 하는 종으로 부릴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삶의 목적과 수단이 바뀌어버린 모습이다. 자신의 명예를 섬기는데 하나님을 이용할 수도 있고, 재산, 자녀, 부모 등등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는 것은 불신자들에게는 너무나 당연시 되고 있는 것인데 그러한 과거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때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주님은 찬송가 185장의 탄식을 하실 것이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하나님을 영화롭게 섬기지 못하는 삶은 우리에게 엄청난 영적인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게 되고 과거 불신의 삶과 다름이 없는 우상숭배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골고다의 붉은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우리의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눅10:27) 영화롭게 섬기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