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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을 몰라서가 아니라 분명한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조물주 하나님보다 위하고 섬기는 것에 대한 종교적인 타락상을 다룬바 있다. 세상의 많은 다른 종교들이 있고 그러한 비진리들이 대상이 되겠지만 그보다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대상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주신 양심의 법과 이 세상 모든 피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창조주요 섭리자 되시는 피조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그보다 더 완벽한 계시인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주심으로서 이제는 핑계치 못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더 큰 경계를 가져야 함을 지적한 바 있다.
오늘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밀어내 버린 일반세계의 타락의 심각성을 보게 된다. 그것은 온전한 하나가 되게 하신 남녀의 귀중한 부부의 관계가 깨어져서 스스로 사람됨을 거절하고 동물화 된 성적인 타락상과 옆으로 인간관계의 부조화를 보일 수 밖에 없는 결과들은 하나님을 거절한 자리에는 어둠과 부조화만 가득하게 되는 사회상의 비극을 불러 올 수 밖에 없다.
오늘 다루게 되는 이 부분도 대단히 침울하고 불유쾌한 부분이지만 역시 우리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분임도 사실이다.
오늘도 모든 삐뚤어진 관계나 부조화는 근본을 부정해 버리거나 섬겨야 할 대상인 하나님을 거절해 버리는 인간 중심에서 출발하는데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28f) 라는 한마디로 판단할 수 있다. 사람은 마음을 무엇이 차지하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행동양식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것을 지적하셨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4~35)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면 나타나는 결과도 당연히 아름다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적을 받고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보실 때는 자신들이 무어라고 해도 하나님을 그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있지 않은 것을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그 상실한 마음대로’ 즉 섬김의 대상의 자리를 비워 두면 거기에는 온 갓 것들이 들락거리고[눅11:24~26-때로 소제를 한다고 해도 사람의 경건은 때로 더 많은 귀신을 불러들일 수 있다.] 마치 키가 없는 배처럼 표류하고 마는데, 그것이 바로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린 가련한 인간 군상이다. 근본이 삐뚤어지면 그 다음 단계는 한가지도 바로 되는 것이 없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진리이다.
이래서 하나님을 우리 마음의 중심 즉, 첫번째 자리에 모시는 것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과 이 우리들의 삶의 반경이 되는 자연에까지도 대단히 중요함을 배우게 된다. 어느 순간도 우리의 마음의 왕좌에 하나님 아버지를 변함없이 모심으로 천국은 물론 이 땅에서 조차도 영육의 균형 잡힌 삶이 되어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유익한 천국의 백성 됨을 나타내는 …
Ⅰ.성(性)의 비뚤어진 사용을 본다.(26~27)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이 사회에 가장 치명적인 삐뚤어진 행위가 바로 성에서 나타남을 보는데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사회일수록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창조 질서인 부부와 가정의 붕괴를 본다.
믿음에 있다고 하는 우리 신앙 하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희미해지고 무사 안일해지면 되면 다윗처럼 범죄 하는 일의 수순을 거치게 되는 것들을 이 역사 속에서 더러 본다. 이것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당연히 다음 단계로는 살인을 저지르는 일까지도 역시 다윗의 경우와 같다.
1.질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은 완벽하게 질서를 유지한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만이 이 우주 속에 가장 질서를 무시하는 주범들이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마귀 사탄의 사주를 받는 인간만이 가장 흔하게 질서를 어기는 존재들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버려둘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내어 버려 두셨으니’ 헬,파라디도미(paradidomi), 포기하다, 던지다.]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여기서도 타락된 성의 주도를 여인들이 먼저 언급되고 있는 것이 타락 상의 또 다른 고발이다. [여인 헬, 델뤼스(thelys), famale, 암컷; 남자 헬, 아르헨(arrhen), male, 수컷]
이 성(性)의 문제에 있어서도 사실 짐승보다도 사람이 더 추한 것이 사실이다. 적어도 짐승들은 순리를 깨는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부분은 순리대로 쓸 때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어그러지고 삐뚤어진 세대는 모든 것들을 그릇되게 억지로 쓰기 때문에 계속 부작용을 낳고 있다. 이 시대가 많은 것들을 순리대로 쓰지 않고 역리로 쓰지만 가장 치명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남녀 간의 성의 역리 문제이다.
순리대로가 아닌 역리 때문에 자신이 로마의 감옥에 갇힌 바울은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빌2:15) 라는 당부를 주고 있다. 분명 마지막 시대인 이 때는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이다. 그런 세대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질서를 따라 사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에덴에서 하나님과의 법을 먼저 깨뜨린 당사자가 여자인 하와였다면 남자와의 부부관계의 문제를 일으키는데 거론되는 것도 남자보다 ‘여인’이 먼저 등장한다고 하는 것이 특이하다. 최근의 교육으로 대두되는 기러기 아빠 이야기들에서도 여인들이 앞선다는 보도는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질서가 무너진 곳에는 무질서가 판칠 수밖에 없다. 보시기에 좋았던 이 아름다운 피조세계에는 가시와 엉겅퀴가 나서 불편을 가져오게 되었고 에덴에서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제의 환희(歡喜)는 죄로 인해서 두려움으로 바뀌고 맒을 본다.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라는 표현은 여러 형태로 이해된다. 어떤 것들이 허용된 것을 넘어서 사용될 때 나타나는 부작용들은 이 사회에서 너무나 흔하게 보는 것들이다.[①상류층 부부 스와핑(Swapping)으로 깨어지는 가정들; ②동성연애의 폐해들]
2.무질서는 반드시 행한 자들에게 부정적인 보응(報應)을 한다.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27b) 질서는 아름다운 것 편한 것이라는 슬로건을 더러 듣는다. 어느 사거리에 교통신호만 꺼져버려도 아수라장이 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질서는 편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초록과 노랑색과 붉은 세 가지의 불빛이 사거리의 차들의 교행을 지도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에도 하나님은 신호등을 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붉은 피를 흘리심으로 더 이상 하나님을 등지고 나가는 것을 중지 시켰고 그 은혜와 사랑의 신호를 따라 순종하는 자들은 영원한 천국의 아름다움과 편함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릇됨의 보응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릇 행한 당사자에게 그릇된 보응을 끼치게 되어 있고 그 그릇됨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 것이 그릇됨의 특징이다. 여자의 그릇됨은 자신에게 그리고 남자에게 뿐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도 아픔과 슬픔을 드리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행하는 그릇된 성행위는 가장 치명적인 해악을 자신과 상대에게 가져오는 것을 AIDS 라는 불치의 병이 증명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께서 유황불로 멸망시키실 수 밖에 없었던 죄의 절정은 역시 그들의 남색하는 것이 너무나 흔해 있는 멸망직전의 모습은 이 역사 속에 영원한 경계가 되기 위해서 sodomy 라는 아름답지 못한 새 단어를 만들게 된 것인데도 이런 수순이 진행됨을 알고도 타락한 이 시대는 여전히 같은 죄악을 반복하고 있음을 볼 때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의 굴레의 무서움을 몸서리 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은 평화와 희락과 소망을 충만이 가져오는 것이 사실인데도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얻는 기쁨보다도 죄악을 더 탐닉하려고 하는 죄성을 더 강하게 느낀다고 하는 것이 에덴 이후의 사람들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우리모두가 하나님의 선물인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을 지금에도 영원히 순종으로 누리는 모두가 되시기를 …
Ⅱ.모든 인간관계의 부조화를 본다.(28~31)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누군가를 자신의 추앙의 대상, 섬김의 대상으로 모실 수 밖에 없고 본래적으로는 그 자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었다. 그러나 죄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것을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비극이라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서 가만히 좇아내 버린다. 그러나 사실 죄성의 당사자는 모르지만 이렇게 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는 나는 것이다.
1.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으로 출발한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태초에 뱀의 간계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은 것은 사실은 생명의 하나님을 거절해버린 배은망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아담과 하와에게서 밀려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고 거역했을 때 아담과 하와는 아직 에덴에서 나가지 않았지만 이미 하나님께서 내보내시기 전에 이미 쫓겨난 것이었다.
우리 마음 중심의 자리에 가장 적절한 주인은 사실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이 적절치 않다고 그 자리에 자신을 모시거나 마귀사탄을 세운다. 이렇게 적절치 못한 대상이 왕좌에 있게 되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영육의 부조화를 이루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든지 “…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는 행복과의 이별의 시작이다. 모든 사람은 바른 주인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지 못하는 것 자체로서 두려움의 지배를 받게 되고 오든 영육의 부조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상실된 마음의 자리에 하나님을 다시 모실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것이다.
2.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신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이 표현이 좀 특이하다. [상실한, 헬, 아도키모스(adokimos), 훈련되지 않은, 공인되지 않은, 거절된, 가치 없는, 하나님께 버림 받은] 의미들을 가지는 말이다.
베드로 사도는 사람이 경건에 훈련되지 못하면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벧후2:14)는 경계를 주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영적인 채찍이 없는 자를 사생아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는 것이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6~8)
사람은 어떤 한 주인을 마음의 중심에 반드시 모셔야 하듯 연단되는 것에도 마찬가지이다. 경건에 연단이 되든지 탐욕에 연단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여러분들은 무엇으로부터 연단되기를 바라는가? 이왕에 연단을 받아야 한다면 경건에서 제련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3.이 세상에서 나타나는 모든 부정적인 인간관계들이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하나님과 근본이 비뚤어져 버린 사람은 그 다음의 관계가 뒤틀리고 꼬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모두가 비극적이요 절망적인 관계를 묘사하는 표현들이다. 여기 적어도 21가지나 되는 비극적인 항목들은 여러 가지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계속 입에 올리기에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표현들로 한 단어 한 단어를 분석할 필요는 느끼지 않지만 결국 발생 원인은 한가지라는 데서 더 충격적이다. 이 말은 한가지만 조심하고 경계하면 이런 일은 전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소망으로 이 말씀을 이해 했으면 한다.
예수께서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20~23)고 말씀하셨다.
바울 사도 역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 라는 같은 경계를 주고 있다.
4.자신들이 악을 행할 뿐만 아니라 악을 역성든다.(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라는 사실이 심각하다. 몰라서가 아니라 죄에 길들여진 인간은 자신이 범죄 할 뿐만 아니라 그 죄에 대한 형벌이 [사형에 해당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행하고 또 같은 범죄자들을 판결하지 못하고 옳다고 변호하는 죄의 무서운 연대성을 본다.
죄는 자신이 같은 죄인일 때 바른 판단을 할 수 없고, 이런 입장에서 공의와는 거리가 먼 판단이 이루어져 때로는 의인을 죽이는데 가편 투표를 던지게 되는 것이다. 죄인은 자신의 죄를 변명하고 함께 넘어질 동료를 찾을 뿐만 아니라 판단 자체가 흐려져서 의인을 죽음으로 몰아 넣게 되는 것이다. 이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스데반이 돌을 맞아 죽었고 바울 사도는 목 배임을 당했다.
결국 죄는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 함께 끌고 가는 무서운 괴력을 가졌기 때문에 이 저주의 사슬에서 우리를 끌러 주시려고 의로우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이런 모든 비극은 저희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결과들이다.(25, 28)
가장 큰 저주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24)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26)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28) 이 모든 원인은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28f) 이다.
하나님께서 포기하고 내던져버리시기 까지 가서는 안된다.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의 대부분은 실수가 없었던 완벽한 인물들이기 보다는 그 실수로 범한 죄에서 돌아서는 데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산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큰 행운이다. 이 우주의 창조주며 운행자요 죄에서 우리를 사 주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왕으로 모실 때 우리의 삶은 이 우주의 운행질서처럼 순리를 따라 질서를 잡고 천국에 이룰 때까지 하나님과 자연과 이웃과 우리 자신과 조화로운 삶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래서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류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영접하는 것이 일생에 가장 귀중한 과제이다. 또 믿음의 사람들이 주님 없이 살았던 과거를 돌아보면 몸서리 쳐지는 것이다.
우리 각자의 마음 중심에 주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 자체가 바른 질서의 시작이요 그것이 바로 순리이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요, 이웃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출발점이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이 비극적인 저주가 여러분 모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삶들이 되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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