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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2:1~13 2008-02-10
우리가 다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우리는 지난 주까지 성령의 오시기까지의 약속과 거기에 상응하는 사도들의 준비 작업에 까지 사도들의 자세를 상고한바 있다. 물론 거기에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으면서도 성경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부분들도 다시 정리를 하며 이해를 했었다.

누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함에 있어서도 그의 복음서는 물론이려니와 이 사도행전역시 정밀하게 내용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추종을 불허한다. 누가복음에서 1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심에 준비된 모습의 소개였다면 2장에서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다루는 것처럼 이 사도행전 역시 1장에서 성령의 오심의 준비작업으로서의 분위기를 먼저 말한 다음에 여기에 따른 추이로 성령의 오심이 약속대로 이루어짐을 기록 함으로서 마치 창세기의 인간 창조의 이전에 사람이 살 수 있는 바탕을 먼저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사람을 창조 하심의 진행처럼 계획적이고 논리적인 전개를 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승천이전에는 말할 것도 없이 마지막 제자들과 만찬석상에서부터 수없이 성령의 오심과 역할을 증거 하신바 있으셨다. 때문에 누가는 이 성령의 행전을 시작하면서 이런 일련의 사실들을 환기시키고 있는 내용을 시작에서부터 기록하였다.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행1:2)

이 땅에 남겨두어 복음의 사역을 완성하기 위하여 사도들을 두고 가시면서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b)는 약속은 결국 성령으로 함께 하실 것임에 대한 약속이었음이 분명하다.

이제 이 약속을 받은 사도들은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비록 하나님의 직접적인 성령의 지시는 아닐지라도 자신의 영광의 지위를 은 30에 팔고 비극으로 이 세상을 떠난 가룟 유다 대신에 “제비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행1:26) 하였고 언약의 순간을 기다리며 모두가 한 곳에 모여있었다.

이 땅에 성령의 오심은 분명 우리 사람들의 이성적인 관점에서 볼 때 술 취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오해 되었지만 이 성령의 충만함 없이는 이 역사의 마지막까지 그리고 땅끝까지 복음을 들고 성령과 함께 달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한번 드림으로 완성된 제사는 그 동일한 주님의 말씀과 함께 인간의 모든 생각과 판단을 밀쳐두고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희생과 부활의 증인으로 주님 오실 때까지 복음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할 것이다.

오늘의 말씀은 주님의 약속대로 성령의 충만을 받은 자들과 반대로 겉으로 그 모습을 보면서 놀라는 두 가지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과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는 나는 오늘 어떤 자세로 그 역사를 받아드리는가! 우리 각자가 생각하자…



Ⅰ.성령의 오심.(1~4)

“제비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행1:26)에 이어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1) 라고 연이은 말씀이 오늘 첫 절에 자연스럽게 전개되어 진다.

‘오순절’은 유대인들의 중요한 절기 가운데 하나로 장막절과 함께 성전에 모이는 절기였고 첫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라 해서 ‘초실절’로 보리의 첫곡식을 드리기 때문에 ‘맥추절’ 또는 ‘칠칠절’이라고도 한다.(출34:22) 이는 유월절 둘째 날에서 계산해서 50일이 된다고 하는 데서 우리말 표현이다.

신명기16:16에서 하나님께서는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라고 계명으로 성전에 모이게 한 절기이고 또 이 날을 계산하면 안식후 첫날 곧 요즘의 태양력으로 일요일이 된다.

오순절은 언제나 주일이다.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레23:15-16)

먼저 이 첫 단락의 내용들은 완벽하게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사건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라는 내용이 사도를 보선하던 120명 가량의 사람들인지 사도들을 말함인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나중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반응과 사도들의 자세를 볼 때 12 사도들이라는 이해가 더 호소력을 갖는다.

물론 사도들이 대표격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는 생각도 가능하지만 예수께서 분명히 사도들과 같이 모여서 성령의 보내실 것을 약속하였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

또 이 사건을 목격하고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7)는 반응에서도 그렇다. 앞서 다락에서 함께 기도하던 여인들만 해도 갈릴리 출신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나중에 이 상황을 설명하는 사도들의 모습에서도 그렇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행2:14f)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2)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의 모습들에서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삼하22:11; 시18:10) “…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시104:3~4)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고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이라는 말로 번역된 “[히] 루하(ruhah)”나 “[헬] 프뉴마(pneuma)”가 [바람, 호흡] 등등과 같은 낱말로 신구약에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람]자체는 아니었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바람이 지나면 반드시 어떤 현상을 만드는 것처럼 성령은 눈으로 뵐 수 없는 분이지만 그분의 지배 하에 있는 사람의 모습은 확실히 변하게 되어 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3) 이것은 성령의 임하는 모습의 시각적(視覺的)인 묘사였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 강림하시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고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출19:18f) 사죄의 도구로 나타나기도 하고(사6:6~7)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말3:2) 정결의 역사로 역시 묘사되는 곳도 있다. 그런가 하면 심판의 도구로도 묘사되고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신4:24; 마3:11~12)

그러나 오늘 본문의 묘사는 분명히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묘사이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 그러므로 성령을 불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여하튼 이렇게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임하신 성령의 결과는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4)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미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예언하신 사실이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16:17)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이것은 넘치도록 채워짐을 의미하여 거꾸로 말하면 완전히 잠겨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이들의 행동을 성령께서 이끄셨음을 의미하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결과로서 사도들이 한번도 배워 본적이 없는 다른 언어를 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여기 [방언, 헬, 글로사(glossa), tongue, language]은 고린도전서의 은사의 한 부분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의 하나인 ‘방언’과 같은 표현이지만 그 곳과 다른 것은 오늘 본문의 방언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이 방언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듣는 자들에 의해 “…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2:11b) 라는 고백 속에서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14:2)는 내용과는 정 반대의 모습을 본다.

또 사도들이 여기서 시작해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 즉, 복음을 증거 하는 방언을 계속 말한 것이 아니었음을 볼 때 이 성령의 임재로 각 나라 말로 말한 것은 일회적이었던 것으로 즉, 성령께서 임재하셨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증거였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이 역사 속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위한 일들이 연속되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일회적인 것들도 분명히 있고 그것은 한번으로도 만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으로 확신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일들은 오히려 의도적으로 재현 하려는 것 자체가 신앙적이기 보다는 인간적인 요소가 되 수 있다는 경계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때나 이때나 성령의 충만하심 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뜻과 일을 가장 효과적으로 감당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Ⅱ.성령께서 임하심에 대한 또 다른 반응.(5~13)

인류의 말의 소통이 사람사이에 불가능하게 된 것은 분명 복이 아니라 저주였음을 창세기 11장에서 본다. 인간의 기술과 고안으로 흩어짐을 면하고 자신들의 명예를 내려고 시도하는 바벨 탑을 쌓는 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창11:7) 시는 내용을 본다.

그렇게 각 언어별로 흩어졌던 ‘바벨’ 즉, 혼란의 언어가 비로소 여기에서 하나가 된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벨의 저주가 치료된 역사가 바로 이 오순절 예루살렘 성전에서임을 보는 것도 의미가 크다.

앞에서 4절의 짧은 내용이지만 이 역사 속에 엄청난 변화의 역사를 이루었고, 여기에도 두 부류의 반응이 있었음을 본다. 즉, 성령에 의한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는 구원의 백성들로 인간적인 의도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경험한 대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또 다른 반대의 대열에 선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만 놀램으로 빈정대는 어두움의 자식들이 그것이다.

물론 이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속으로 옮겨지는 소수가 있긴 했지만(당시에 오순절에 오여 든 사람들은 수 십만이었다고 역사가들은 전한다. 이 중에서 3천명은 분명히 소수에 불과한 수일 뿐이다.) 다수는 여기 나타나는 그들의 표현대로 이 인간으로서 헤아릴 수 없는 역사 앞에서도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는 세속적이고 저급한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때나 구원의 은혜에 반응하는 자세는 이 두 부류이다.

1.사람들의 반응.(5~8, 12~13)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5)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이후의 유대인들은 천하각지로 흩어졌고 이 사람들이 율법에서 명한 대로 3대 절기 때면 고향에 대한 향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경건한 유대인]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에 [경건한, 헬,율라베스(eulabes), 용의주도한(꼼꼼한), 종교적으로 경건한] 이란 말은 하나님을 잘 예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경건, 헬, 유세베이아(eusebeia), 잘 예배하는]이 아니라 지극히 종교적인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 종교적인 사람들이 바르게 변화를 받으면 하나님을 잘 예배하는 경건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6) 이들은 모르긴 해도 이 오순절을 지키기 위하여 매년 천하 각국으로부터 많은 비용을 들여 모여든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은 난생 처음 대하는 신기한 현상을 듣고 보면서 소동케 된다. 먼저는 저들의 심령에 소요를 일으켰고 행동에도 부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자신들의 난 곳의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감사할 이유이고 상황인데도 저들은 오히려 혼란케 됨을 보인 바벨의 후손들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연이어 이 사람들의 반응을 “다 놀라 기이히 여겨”(7ff) 또는 “다 놀라며 의혹하여”(12ff)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는 언제나 그것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놀람을 준다. 그러나 그 놀람에 대한 반응이 중요하다.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12) ‘이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 일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님을 알았어야 했다. 그러나 심지어 저들은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13)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자처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조롱하는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술에 취해 이성을 잃은 사람들이 외국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벌써 잘 못된 판단이고 비뚤어진 생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도 베드로를 통한 강론을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요즘 우리의 시대에도 복음에 대한 반응은 그럴 수 있다고 각오해야만 한다. 사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보고도 조롱하고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것도 지극히 종교적인 사람들이면서도 그랬다면, 우리의 전하는 교훈들에 대하여 코웃음 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 하시기를 “사람들이 너희를 출 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요16:2)는 말씀까지 하셨고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마24:9; 눅6:22)고 말세의 상황을 예언 하셨다.

그러나 주님께서 같은 말씀을 주시면서도 격려하시기를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눅6:22) 하셨다.

사람은 천차만별(千差萬別)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으로 행하는 것들에 한 가지 반응 즉, 복 주실 것임에 분명하다.

2.사람들의 온 곳.(9~11)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말하는 사도들은 열 둘이었고 그 말을 들은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급하는 내용대로라면 15개국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우리는 이 상황을 정확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

각 사도들이 외국어 한 가지씩을 말했다고 할지라도 12사도가 함께 말하면 듣는 사람들은 웅성거림 외에는 어떤 의미도 듣지 못할 것이고 또 15개국의 언어였기 때문에 같은 말을 쓰는 다른 나라가 몇 개국 되었을 수도 있지만 이것 역시 분명치 않다.

그러나 분명한 저들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11) 라는 고백이다. 어떤 사람은 ‘사도들이 하나의 언어를 사용해서 같은 말을 했지만 하나님께서 듣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말로 듣도록 역사 하셨다.’고 합리적인 이해를 시도하지만 이것도 분명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무질서 속의 질서를 만드셨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1:2~3) 이 소란 속에서도 분명한 것은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11) 라는 고백이다.

이 땅에 오셔서 ‘바벨’이라는 거역으로 인한 무질서의 혼란의 세계에 가장 원형으로 오염되지 않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의 무질서와 혼란을 치유하시고 이제 이 혼란의 역사 위에 성령으로 통하여 광명의 빛으로 오신 주님이시고 이 역사를 통하여 이 죄악의 동산 죽음의 동산에 하나님의 순전한 구원의 진리를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 교회를 세우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도들에게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이루어졌다. 과거에 그러신 하나님 이시라면 오늘도 미래도 여전히 그러실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소에 반응하는 우리의 자세이다. 믿음으로 감격으로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엄청난 복과 감격이 함께 할 것이고 나타난 결과에도 비웃는 자들에게는 진노만이 예비 될 뿐이다. 오늘도 동일하게 복음을 맡은 우리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라 약속하셨으므로 약속대로 성령의 충만을 받고 이 혼란의 역사 속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게 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