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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며 준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은 오셨고 이 역사적 사실을 목격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천하에서 모여든 유대인들은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12)했고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13)고 빈정거리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사도들 가운데 늘 수장(首長)이었던 베드로가 이렇게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 할 필요가 있다고 이들의 반응에 자연스럽게 답변한 것이 결국 이땅에 성령이 오시고 완성된 복음 속에서 최초의 강론(설교)이 되었다.
이 최초의 복음 증거에는 구약의 하나님의 약속이 인용되면서 요엘서와 시편을 통한 다윗의 글들이 증거 되는 것들을 다음시간까지 보게 된다.
이러한 순서에서도 우리는 복음증거의 자연스러운 역사와 순서를 보게 된다. 먼저 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있었고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복음 증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벧전3:15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또 이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행전 속에서의 복음을 증거 하는 모습들을 살펴보는 것도 오늘 우리 시대의 소위 말하는 설교들과 비교하여 이해할 때 중요한 깨달음을 가지게 한다.
이 땅에 교회가 탄생하고 증거 된 메시지는 주님의 말씀 그대로 기교나 유머, 군중을 의식하는 것 보다는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그대로 전달하는 꾸밈없는 진리의 증거를 접하게 된다. 물론 1세기에도 많은 사람들은 언어에 대한 개발을 학문적으로 다루었고 이런 것들이 철학과 학문의 영역으로 수사학이라는 분야를 이끌어 왔다.
이런 경계가 성경에서도 직접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도 읽게 된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4:3~4)
또 말을 그릇으로 하여 그 언어에 주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라면 보다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용어나 관심거리로 접근하는 것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고민도 거론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전혀 그런 부분들이 고려 되지 않는 것을 느낀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앞으로 우리는 이 베드로의 말씀 선포에서 스데반과 바울을 비롯한 말씀 증거들을 접하게 되면서 이런 부분을 상고하고 고민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어떤 사람들에게나 놀라움을 일으키고 그 놀라움은 당연히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으로 해설되고 또 다시 그 복음의 해설은 많은 사람들을 십자가의 복음 속으로 불러들이게 된다. 오늘 이 십자가의 희생과 성령의 역사하심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 놀라움을 일으키고 인간의 기술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여 이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보다 많은 구원 받는 사람들이 더해질 수 있기를 …
Ⅰ.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14~15)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나타남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빈정거림으로 반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사랑이신 하나님은 이런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사람들에게도 긍휼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눅6:35b)
우리 사람들의 한계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좋은 것을 줘도 좋지 않게 반응하는 사람들에게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아라!’는 식이지만 주님의 인내와 사랑은 십자가의 희생 만큼이나 놀랍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사람들은 오히려 이러한 주님의 풍성함을 멸시하지만 그럼에도 주님의 인내는 끝간데 없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계속 믿음 안에 있다. 감사하지 않는가! 그러나 계속 인내로 회개를 요청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것이 계속 회개하지 않는 것을 변명하게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 사도는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롬2:4) 하였고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를 통하여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계2:21) 라고 책망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베드로 사도의 요청처럼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14b)는 자세가 중요하다.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롬10:17)기 때문에 사실 들을 귀를 가진 것이 중요하다. 이래서 주님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4:9, 23; 눅8:8)는 말씀은 중요하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때가 제 삼 시(아침 9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15)고 증거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 것은 선지자를 통하여 경계 되어지고 있는 내용이다.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사5:11) 그러므로 아침 일찍부터 취할 수 없다는 증거는 저들의 일반적인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비록 오해를 하였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러한 무지를 일깨우시고 타이르시는 주님이시다. 우리 또한 이러한 주님의 인내와 사랑을 배워 하나님의 진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과 같은 인내와 사랑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도 오래 참음의 은사는 참으로 귀한 주님의 성품을 가지는 것이다. 모두모두 오래 참음의 은사를 풍성히 …
Ⅱ.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이 이루어 진 것이다.(16~21)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앞의 변명이 일반적인 것이었다면 여기에서부터는 보다 영적인 부분에서 하나님의 하신 일을 변증(辯證)한다. 요엘 선지자의 글은 주로 불순종으로 형벌 받는 백성들과 그럼에도 회개를 요청하시는 종말적인 예언들이다. 특히 17~18절이 성령의 오심과 그 결과들을 예언하는 내용들이라면 19~20절은 말세의 징조들을 증거하면서 주님의 구원을 받을 자세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 앞부분이 이 베드로가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 오순절부터 이 역사의 마지막까지 이루어질 구원의 약속이라면 뒷부분인 19~20절은 이 역사의 종말적인 증거로 요한 계시록에 증거 되고 있는 그 당시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말세론적인 예언이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이루어진, 그리고 오늘도 이루어져 가고 있는, 그리고 이루어질 미래의 역사들을 동시에 선언하는 것이다. 이런 구분이 없이 이 말씀을 이해한다면 혼란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17~18)
이스라엘에게 말세는 바로 메시아의 탄생이전부터라고 증거 되어지고 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사2:2; 미4:1) 그러므로 말세는 먼저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의 때로부터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람들의 기준에서는 말세의 기간이 벌써 2천년여가 되고 있는 샘이다.
구약의 하나님의 영은 언제나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부어져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말세’의 어간에는 모든 육체에게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이고 이것은 사실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백성 됨과 아님의 차이는 육체의 할례와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언약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육체적인 혈통의 언약이 아닌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언약 즉, 새 언약의 약속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순종으로 세례를 받으므로 물속에 장사 지내고 물에서 올라올 때 즉, 거듭난 하늘의 자녀에게 성령을 선물로 부으시는 역사를 모범으로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죄가 없으시지만 세례를 받으시고 하늘로부터 성령이 내려오시는 모습을 보이셨고 이 사도행전 속에 구원 받은 모습들도 역시 한결 같은 것을 배우게 된다.
이제는 그의 자녀들이요 섬김에 있어서 종들인 새 이스라엘 사람인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받고 거듭남으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미래를 보고 하늘의 영광을 보며 남녀노소(男女老少)에 관계없이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마침내는 이 역사의 마지막이 되어서 이 세상에 비극적인 상황이 닥치는, 물론 이것은 성령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오순절 당일에 이루어 진 일은 아니지만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19~20) 하는 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구원 얻을 약속을 누리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21) 이 말씀 역시 요엘서를 그대로 인용한 말씀이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욜2:32f)
그러나 평상시에 주님을 부르지 않던 거듭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알지도 못하는 주님을 부를 수 없어서 멸망으로 가게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 하였지만 연이어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라고 이 말세어간 동안 증거 하는 것을 듣고 믿는 자들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을 함께 증거하고 있다.
모두가 말세어간동안 성령을 충만이 받고 이 역사의 마지막이 오더라도 확신과 기쁨으로 구원의 주님을 부름으로 구원을 얻는 이 말씀을 듣는 …
Ⅲ.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 증거.(22~24)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구원의 복음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귀결되고 부활의 영광으로 마무리 된다. 이제 성령의 충만을 받은 베드로는 예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속에 계속적으로 증거 해왔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그의 십자가 이전의 행적을 통하여 증거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22)
이스라엘 사람들이 비웃던 이름 “나사렛 예수” 그러나 실상은 이 이름은 감추어진 이름 신비의 이름 이적의 이름이다. 나사렛 사람이라고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구약의 예언대로 그는 메시아의 탄생지인 베들레헴이서 낫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추어진 이름이요 육신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한 낫 천한 ‘나사렛 목수’로 보이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서는 “…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1:46)하였지만, 그러나 이 예수로 하나님은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 하셨다” 즉 하늘의 능력으로 자연을 명령하시고 사람의 약한 부분을 치료하시는 역사로 그가 메시아 되심을 증거하신 것이다.
이 주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에게 “십자가의 도가 …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그 주님의 큰 권능은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이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바울은 증거 하고 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23)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정하신 것이요 이미 아신 것이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법을 갖지 못한 그 불법한 자들의 손을 빌어서 의로우시고 무죄한 주님을 죽임으로 결국 하나님의 예정과 정하신 뜻을 성취하고야 말았다. 사람들의 악함이 용서될 수는 없지만 결국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16:4)는 말씀처럼 그들은 악한 일에 적절하여 죄를 짓는 것으로 사용되고 말았다. 여러분 모두는 선한 일에 구원의 도구로 사용되는 복된 사람들 되시기를 …
그러나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이 끝났다면 죄인들의 사죄가 되었다 할지라도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장사 지낸바 되시고 살아나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죽어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으신 생명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24) 어두움은 절대로 빛을 가릴 수도 잡아둘 수도 없는 것처럼, 죄의 결과로 나타난 죽음은 절대로 생명을 잡아둘 수 없는 한계를 가진다. 사망의 세력에 매여계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결국 사망의 수치를 드러내시고 부활하셔서 이제 계속 죽음에 바쳐졌던 범죄 한 인류를 위해 죄와 상관없는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던 것처럼 그를 믿고 순종하는 그의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역사를 이루시고 다시는 죽음에 종 노릇하지 않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6:14)
다시 살리심의 이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후4:14) 약속하셨고 이 약속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적용되는 확신을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2)고 함으로서 세례라는 거룩한 예식을 통해서 성취됨을 분명히 하셨다.
하나님은 소돔의 멸망을 그의 벗으로 여기셨던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으셨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18:17) 그러나 이제는 모든 사람이 살 방도를 비록 죄악의 사람들이지만 사람들에게 숨기지 않으시고 인내하시며 알게 하셨다.
이 땅에 이루어지는 일들은 어떤 것 하나도 주님과 관계없는 것은 없다. 설령 악하여 버릴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로 쓰셨고 역사 속에 수많은 하나님의 언약들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없다.
설령 더딜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뤄질 수 밖에 없다. 어떤 것들은 이미 이루어진 언약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것들은 이 역사의 말미까지 반드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에 의지하여 마지막 진노의 날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는 생명의 약속을 누리는 자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형벌과 멸망의 날에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인데 우리모두는 물론이고 더 많은 사람을 이 구원에 참여 시키기 위하여 멸망이 홀연히 다가오기 전에 아직도 이 세상의 마지막을 모르고 사망의 잠을 자는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은혜에 참여 시켜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게 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시키는 일을 여기 베드로와 열한 사도들처럼 감당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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