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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으로부터 오순절을 지키러 모여든 유대인들은 그전에는 전혀 경험해 본 일이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듣게 되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했던 일들이 마침내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 속에 이루어져서 사람의 이성으로나 감정으로는 이해할 수조차 없는 일들이 나타남을 보고 놀람 속에서 그들은 양심에 찔림을 받고 회계를 요청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만 인류의 죄를 해결하시려는 절대적인 은혜와 사랑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것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엄밀하게 말하면 인생에 있어서 이것을 이루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죄진 인류는 하나님의 십자가 아래의 초청에 나아가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사실 이 땅에 태어나서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인간 성취이다. 여러분들은 이 은혜를 누리고 있는가? 그렇다면 육신적 삶이 어떠하든지 이미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긴 역사에서 자연을 통해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말씀하시든 한나님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히1:2) 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선언한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지 못해도 괜찮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메시지를 듣지 못하면 이 사람은 진정으로 귀를 가진 것이 아니다.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다 베드로를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그 구원의 초청에 응답한 사람들은 전체의 수에서 비교한다면 참으로 많은 수가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 약 2천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동일한 말씀으로 듣는 여러분 모두가 회개한 3천명처럼 참으로 복된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복되신 …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죄인의 거듭남에 대한 놀라운 역사와 그것에 응답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다음 주까지 상고하면서 먼저는 우리 구원에 대한 확신과 감사와 함께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어찌할꼬!’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같은 진리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을 확신하는 …
Ⅰ.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었다.(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37)
언제나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어떤 경우에는 대상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계속 말씀하시고 또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완악해진 이스라엘을 향하여 3번씩이나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겔2:5, 7, 11)고 선언하신다.
구약 율법의 최종 판이라고 하는 신명기 서에서도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6:4) 라고 말씀하셨고 복음 시대에도 믿음은 다른 데서 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고 바울 사도는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희가 이 말을 듣고 …” 라는 사실은 구원을 위한 출발이다. 오늘도 말씀을 다 듣는 것은 아니다. 듣고자 하는 사람이 듣고, 순종하려는 사람이 듣고, 섬기려는 사람이 듣고, 겸손한 사람이 듣고, 착한 사람이 듣고, 하늘의 사람이 듣고, 살고자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나 모든 역사 속에서는 물론이고 이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듣는 것보다 말하고 싶어 한다.
이런 속성을 너무나 잘 아는 성령의 사람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1:19) 그러므로 오늘도 말하는 저보다 잘 듣는 여러분들이 복된 사람들인 줄로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던 저들은 그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려” 라는 반응을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리한 영혼의 칼이기 때문에 찔리는 반응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이 사도행전 속에서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찔려[헬, 카타륏소(katanysso), 심하게 찌르다, 동요시키다, 따끔하게 찌르다]” 라는 반응이 두 번이나 기록되고 있다. 한 번은 이 베드로의 오늘 본문이고 또 다른 한 곳은 7:54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이라는 전혀 상반된 반응을 보게 된다.
영혼과 양심에 쇼크를 받고 회개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책망하시고 회개를 요청하시는 사랑의 일침에 복된 반응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책망에 어린아이처럼 반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 다음의 반응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37) “우리가 어찌할꼬” 사람으로서는 죄를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할 바를 알 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한 순수한 자세가 바로 “우리가 어찌할꼬” 이다. 모두가 말씀 앞에 이런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심성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죄의 사람들은 “우리가 어찌할꼬” 보다는 스데반의 반응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더 흔한 것이 사실이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성경에서는 이를 가는 모습조차가 지옥에서의 저주의 모습으로 비유되고 있는 것을 주님의 말씀에서도 보게 된다.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22:13, 24:51, 25:30; 눅13:28)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는 골로새서 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3:16) 라고 하늘의 사람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도 귀 기울여서 말씀을 잘 듣고 깨닫는 사람들이 되어서 “우리가 어찌할꼬” 라는 회개의 자세로 응답하는 …
Ⅱ.순종을 명한다.(38~40)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회개의 요청에 바르게 응답하는 사람들에게만 다음의 은혜는 내려질 수 있음을 본다. 몇 십만이나 운집해 있던 그 많은 유대인들 대다수는 사도들로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 버렸기 때문에 다만 3천명만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것을 본다.
그 많은 사람들이 오순절을 사랑하는 것처럼 주님의 사랑의 요청을 받아들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도 반응하는 자세는 모두가 각각이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내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행17:32)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회개의 고백을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시던 말씀의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물과 성령으로 난다고 하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늘 분명한 해답이 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38)
회개와 세례는 단체적일 수 없다. 각각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 반드시 세상과 죄악과 절망과 저주를 향해 가던 인생을 180℃ 돌아서야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고 사실 [회개, 헬, 메타노에오(metanoeo),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바꾸다]는 단순히 슬퍼함으로 탄식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건 용기로만 할 수 있는 결단이다.
삶의 방향을 바꾼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거져 바뀌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마음먹고 돌이켜도 여전히 제자리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 죄로 인하여 무능해진 인간의 연약 성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죽을 자리에서 온 갓 모멸과 수치와 고통을 당하시면서 대신 죽으시고 그 주님의 십자가에 하나가 되는 의식이 바로 세례이다.
바울 사도는 세례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례 그리고, 부활에 하나가 되는 것을 로마서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3~5)
그럼으로 이 세례를 받은 결과는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는 약속이다. 죄의 사람이 물 속에 장사되고 물에서 일으킴을 받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의 일체가 되고 이 죄를 해결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에게 하나님은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라는 약속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난다고 하는 것은 동시적인 것임을 성경은 명료하게 가르친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또 성령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 즉, 은혜임이 분명하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다음으로 이 약속이 미치는 범위를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39)고 증거한다. 먼저는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여 이 말씀을 듣는 당사자들과 그의 자녀들 즉, 그들로부터 동일한 말씀을 듣고 약속을 누릴 그들의 미래의 후손들과 이 은혜의 초청에 응답하는 “모든 먼 데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이 약속은 이제 옛언약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소급된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9:15) 그러므로 이 약속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약속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 시대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도 모두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할렐루야!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물 세례와 성령의 세례를 혼돈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하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3:21)
오늘도 더러의 사람들이 세례 없이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말(우편강도를 예를 들어서)과 중생의 약속은 세례 이전에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오순절날 교회가 탄생하고 이 사도행전 속에서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중에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은 물론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40)
당시 구원의 진리는 베드로 사도의 이 선언이 구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과 이적 등등을 들어 확증하고 권한 것이었다면 말씀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과 사회 속에서 확증된 진리이며 목숨을 걸고 권해도 결코 손해 볼 것이 없는 진리이다. 믿습니까?
성경은 이 세대를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예가 없다. 이 세대의 지위나 부, 영광은 결코 천국에 가져갈 수 없는 것으로 단정한다. 또 역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 세대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애굽을 나왔지만 거기에서 마음을 챙겨 나오지 못한, 그곳에 마음을 두고 몸만 나온 사람들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보살핌 속에서도 늘 그 애굽을 추억했고 그런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약속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을 본다. 이러한 원리는 안타깝지만 복음 시대에도 마찬 가지이다.
이 패역한 세대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모진 고통을 당하시고 그 엄청난 희생의 대가로 우리를 사신 은혜를 매 순간 되새기면서 그리스도께 영광을 드리고 또 세상에 빠져 만신창이가 된 영혼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해야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사명이다. 그러나 이 은총은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 우리 하나님의 얼마든지 부르시는 사람, 초청에 응하는 사람들에게 유효한 약속이다. 할렐루야!
Ⅲ.순종하고 실천하는 복된 모습을 배운다.(41~42)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베드로에게 구원의 방법을 물었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탄식하는 말씀을 듣고 죄를 죄로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베드로로부터 응답을 들었고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들은 행함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1)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고 그 사람들 가운데서 전에는 없었던 전혀 새로운 신앙적 요청에 응답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베드로의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으매” 한 사람들은 바로 “그 말을 받는 사람들” 즉, 베드로를 통해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받은 말씀을 즉시로 순종하는 사람을 기뻐하신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지만 아직도 과거의 일들 때문에 머뭇 머뭇거리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통해서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22:16)고 다구쳤던 것을 본다.
과거에 교회를 핍박했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 죽이던 사울에게 “…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9:5) 하는 뜻밖의 상황조차도 사울이 머뭇거려야 할 이유는 아니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연거푸 회상하는 것들을 읽게 된다.(22:8, 26:15)
이런 입장에서도 바울은 처음 보는 아나니아 라는 하나님의 종에게 어쩌면 머뭇거리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그것이 거듭남을 방해하는 요소, 즉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을 늦출 이유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 날에 사도들에게 순종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이 무려 3천명이었고 이 무리를 통하여 ‘천국이 가까웠다’고 계속 증거되었던 말씀이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는 약속은 마침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믿음 생활이란 거듭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간난 아이는 계속 자라야만 한다. 그 성장하는 삶의 방법은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42)는 것이었다.
신앙적 성장은 가르침을 지속적으로 받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인용한 것처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고 하기 때문이다. 무엇으로 가르침을 받는가가 또한 중요하다.
“…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5~17) 이 교훈이 바로 사도들과 하나님의 종들로 통해서 주어진 성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은 계속 가르침만으로는 역시 안 된다. “서로 교제하며” 이것은 뒤에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교제(코이노니아)”를 통해서 기쁨은 키우고 아픔을 격려 받을 뿐만 아니라 물질과 마음과 사랑을 주고 받고 또 한눈을 팔고 애굽을 추억할 때는 책망 받을 필요가 있다.
“떡을 떼며” 이것은 주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예배를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넘치는 사랑을 확인하며 그 은혜로 오늘 내가 있고 우리가 있음을 감격하는 행사였고 이것은 적어도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며 나중에 바울 조차도 강조했던 부분이다.
그리고 이런 삶을 지속적으로 계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기도하기를 전혀(헬, 프로스카르테레오(proskartereo), ~에 대해 진지하다, 인내하다, 끈질기게 성실하다, 근실하게 일하다) 힘쓰니라”는 것이었다.
신앙에 있어서 모든 동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사람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도 있는데 그것은 충성된 것이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는 것이다. 믿음 생활에 있어서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됨”뿐으로 이 것은 ‘순종’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의 것으로 누리게 한다. 그러면 나머지는 다 주님께서 주신다.
그래서 믿음은 세상의 토양에서가 아니라 하늘의 생명으로부터라고 말하는 것이고 이 “충성됨”은 소위 우리가 말하는 “믿음[헬, 피스토스(pistos), 믿을 만한, 신실한, 신뢰하는, 확신하는, 진실한]”이라는 단어와 동의어이다.
그러므로 여기 신앙의 모든 삶이 이 한절 속에 포함되고 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42)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즉각적이어야 하며, 믿음의 삶은 우리 개인뿐 아니라 모두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며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이 한가지라도 제외된다면 사회적인 모임과 다름이 없을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다. 성경의 가르침, 삶의 나눔으로서의 교제, 예배와 끊임없는 기도가 그것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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