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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함께 성령의 오심의 약속을 따라 이 땅에 거듭난 자들 3천명으로 최초의 교회가 세워졌고 그 교회는 이 역사 속의 모든 교회의 모형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어떤 변질된 부분들을 처음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가장 완벽한 모형을 필요로 하고 다행히도 주님의 교회는 이 완벽한 모형을 가지고 있다는 데 대한 무한한 자부심과 감사를 갖는다. 오늘의 교회에 대한 검증도 어느 시대 속의 교회가 모형이 아니라 바로 이 사도행전과 신약성경 속의 교회가 회복되어야 할 모형이다.
어떤 사람들처럼 ‘신약성경 속의 교회는 아직 원시적인 교회로 완성되지 않은 교회’ 라고까지 말하지만 그렇다면 다른 모형을 찾는다면 과연 ‘어느 때의 교회인가?’ 라는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고, 물론 오늘 우리가 다루는 처음 교회의 모습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함께 어떤 부분들 속에서는 점점 완성되어 가는 부분들도 있긴 하지만 이 사도행전과 신약성경 속에 교회의 모든 부분에서 예배, 교제, 섬김, 조직, 선교 등등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모형으로 채워지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하나님의 주신 기준은 완전하고 분명하지만 그 진리를 적용하고 지키는 데는 이 지상에 완벽한 교회나 개인은 없음을 본다. 우리는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10)는 자세가 필요한 것은 진리가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실행해야 하는 인간이 온전치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지나칠 수 없는 한가지는 그러면 애당초 ‘온전하지 못한 인간이기 때문에 온전함을 지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온전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당연한 의무가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전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놓으시고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당부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꿀 필요가 없는 완벽한 진리를 주신 것을 부정한다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기준은 없는 것이고, 거기에는 혼란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결국 ‘성경의 진리를 부정해 버린다면 인간 세계에 삶과 도덕, 윤리를 지탱해 줄만한 기준이 있는가?’를 오늘날 성경이 부정되고 상대화 되어 버리는 사회들이 겪고 있는 무질서를 보면서 더욱 실감하게 된다.
하나님은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는 완벽한 기준을 주셨고 그 절대적인 생명의 진리가 우리 각자의 손에 들려졌다. 이 진리는 세상의 사람으로부터 나온 상대적인 교훈들과 섞거나 함께 다룰 그런 종류의 교훈이 아니다. 아무리 듣기 좋은 위대하다는 사람들의 어록(語錄)이나 가르침들도 생명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시대를 따라 바뀌고 좋아하는 기준이 자리 다툼을 하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어느 시대고 다른 것을 첨가해야 할 만큼 불완전하지 않는 완전한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히1:11~12) 고 주님과 그의 말씀을 두고 증거한다.
오늘 우리는 처음 탄생된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믿음과 삶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배우게 된다.
Ⅰ.사람들의 경외심을 받았다.(43, 47f)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두려움”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경외(敬畏) - 공경하고 두려워함” 이라는 말이고 이것은 적어도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자세이다. 여기에 쓰인 대로 “두려워하는데” 라는 표현이 5:5에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말씀과 같이 쓰인 표현이다.
물론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이유를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적어도 마술을 보는 사람들이 마술사를 보며 재미 있어는 하지만 두려워하는 예는 없다. 왜냐하면 마술은 단순한 눈 속임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라는 이유는 사람과 자연 속에 나타나는 일반적이지 않는 특별한 일이지만 그것이 당시에도 학문하는 사람들의 한 분야인 ‘마술’이 아니라 사도들에게 “기사와 표적”을 나타나게 하는 힘이 인간의 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또 나중에 복음이 널리 증거 되어지자 실제로 마술 하는 사람들이 책을 불사른 일들도 에베소에서 있었다.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행19:18~19)
사도행전 속에 기록되고 있고 이 마술로 사람들을 속여 자칭 큰 자라고 으름장을 놓던 시몬이라는 사람조차 사도들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사마리아에 복음이 증거되면서 있었던 사건을 통해서도 보게 된다.(8:9~11)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연히 경외감을 갖게 한다. 이 천지 만물과 우주와 자연은 물론이고 젖소 한 마리만 봐도 너무나 신기하다.(어떻게 저 풀을 먹고 우유를 만들까?)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을 향하여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단순한 공포심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공경심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기 때문이었고, 그러한 일들의 근원이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이 사람들의 능력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베드로 사도도 이미 증거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33)
사실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는 사람들로부터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하나님을 바로 경외하는 즉,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사람들로부터 같은 경외 감을 갖게 됨을 사도들에게서 보는데 우리의 시대에는 그런 경외의 대상 즉, 경건성을 초대 교회처럼 갖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차이가 될 것이다.
오늘 본문의 뒷부분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47) 라는 기록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께 영광 보다는 욕을 돌리는 교회는 경외의 대상은 물론이고 칭송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모습이 되고 있는가를 점검하고 개선해야 할 것이다. 사실 사도행전 속의 교회는 완전히 생명을 주님께 맡겨두고 신앙생활을 했다. 적들이 지키고 잡아가고 순교를 당해도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들에만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 모습을 보면 그때의 교회와 큰 차이를 보이는 여러 가지 모습을 우리 스스로가 드러내고 있다.
경건은 이권이나 타협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함이며 절대적인 하나님께 영광이라면, 오늘 우리 시대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공경도 없다. 사실 너무나 이기적이고 타협적이고 하나님께 영광보다는 자신이 좋은 것이 먼저이다.
이런 이름뿐인 우리를 보는 세상은 더욱 한심하게 비아냥거린다. 비록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예수 믿는 것들이 더한다!’는 말이 더 쉽게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면 ‘너희들이나 제대로 믿어라!’고 핀잔을 준다. 교회 직분의 자격을 불신자들 속에서 거론하고 교회의 교회됨을 교회 밖에서 오히려 이야기 하는 안타까움을 본다.
이제 하나님께 영광이나 경외는 역시 사전 속에나 성경 속의 언어가 되어버린 안타까움을 가진다. 우리 모두가 회복해야 할 신앙적 과제는 이제 경건(敬虔)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대로 두려워하고 알량한 자신의 믿음을 의지하고 내세우기 보다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임금이요 주님으로 섬김이 필요한 회복의 시대가 되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있을 때 사람들은 그제서야 교회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말뿐이 아닌 온 몸으로 주님을 두려워할 대로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람들로부터도 두려운 경건과 존경과 칭찬의 대상이 되도록 우리의 신앙의 삶을 회복 하는…
Ⅱ.영육의 완벽한 교제가 이루어졌다.(44~46)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이 부분에서 눈 여겨 봐야 할 부분은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이다. 다 함께 있어, 진정으로 좋은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다. 연애하는 사람 중에 서로 만나서 시간이 안 간다고 투정하는 사람은 없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만약에 그런 관계라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관계이다. 만약에 서로의 관계에서 자신의 숨기고 있는 어떤 것이 탈로 날 것을 불안해 하는 사람은 절대로 함께 있는 것이 좋을 수가 없다.
그리고 여기의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는 장소적인 것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전반절과 대비가 되는 것은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고 하는 것이다. 마음이 가는 곳에 물질은 가고 사랑하는 대상에게 물질을 아끼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또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라는 표현이 오늘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수입(收入-income)을 공동의 것으로’ 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사용에 있어서도 당연히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45) 라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들처럼 공평분배가 아니라 “각 사람의 필요를 따른” 나눠줌이 되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는 앞 절의 “믿음의 사람들”의 소유로 연결되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어떤 경우 물질의 공산(共産)과 공평(公平) 분배(分配)가 공산주의의 기틀이었지만 그것은 절대로 오래 지탱될 수 없는 이론인 이유는 더 이상 나눌 물질이 없어지면 그 체제는 붕괴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앙 속에서 즉,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과 은혜의 바탕 위에 있는 사람들은 단순한 물질의 나눔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모임을 더욱 강렬하게 엮어주는 동력이 바로 그 모임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계속 감격하는 예배를 지속했기 때문이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46) 이러한 모임이 오늘과 같이 자유로운 것이 불가능했음에도 신앙의 사람들은 믿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십자가의 희생에 감격하는 예배를 쉬지 않았다.
‘날마다 모이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마음을 같이 하여 모이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에 성전은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는 사두개인들이 지배하면서 바리새인들과 함께 주님을 바로 섬기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출입을 제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성전을 주신 목적에 확신을 갖고 그곳을 찾아 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발길을 막지는 못했다.
다만 저들은 거룩한 예식인 그리스도의 희생의 떡과 피를 포도즙으로 기념하는 거룩한 예식은 집에서 행했던 것을 누가는 우리에게 기록하고 있다. 성령의 오심 속에 가장 하나님의 자녀 됨에 큰 확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이것이야 말로 보이는 말씀이요, 주님 오실 때까지 지켜갈 거룩한 약속이기 때문이었다.
구약의 제사가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태우는 의식이었다면 신약의 예배도 다르지 않다. 다만 우리가 직접 주님의 피를 흘리고 뿌리는 것이 아닐 뿐이지 예수 그리스도는 한번으로 완전한 제사를 드리고 그 드려진 제사를 매 주님의 날마다 기념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여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이 신약 시대에도 예배는 여전히 피의 제사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 죄 값으로 대신 짐승의 생명을 가지고 대속했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이렇게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셔서 그 은혜와 사랑으로 제가 오늘 이렇게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라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예식의 경건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자주하는 것이 아니고 일년에 두어 번 정도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한 생각 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함이 더 소중하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신하는 감격을 나누고 그러한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라는 모습으로 진행되었었다. 교회 속의 애찬은 성찬의 감격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영적인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육신의 음식도 나누게 될 때 그 음식은 양약이 되었을 것이다. 그 애찬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단순한 한끼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천상의 음식으로 나눠진다는 감격으로 준비하고, 참여하는 모두도 음식의 종류가 어떻든 같은 흥분과 감격을 가지고 나눌 때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서로가 하늘의 능력을 힘입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 외형적으로는 이 모든 것을 그대로 나누고 있다. 번거로움에도 경건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에도 이 예식을 계승하고 있다. 단순히 보이는 모습에서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성령의 충만 하심과 경건성을 회복함으로 처음 교회의 확신과 감격과 사랑을 그대로 누릴 수 있는 …
Ⅲ.주께서 구원 받는 백성을 더하셨다.(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마지막의 제목은 이 사도행전의 시작의 말씀들로 되돌아 간다. 오늘 교회들은 전도의 사명을 나름대로 다하려 하고 또 실재로 보이는 현상 속에서도 부흥하는 교회들이 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불신의 사람들에게 거룩한 모습으로 다가가는 거룩한 성결의 공동체로 칭찬 듣는 모습이기 보다는 수평 이동식으로 약육강식의 경재 원리가 그대로 적용하는 것과 함께 편리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성향과 함께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양상이 거룩한 공동체라고 하는 교회 속에 나타나고 있다.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일까 두려워하게 된다. 요즘 전도 프로그램으로 사용되는 어떤 것은 처음 6주간은 성경이나 신앙적인 교훈을 가르치기 보다는 최고의 대접을 해주는 것으로 사람을 접대하는 것들이 있는데 과연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경의 방법인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성경의 요구는 “복음을 전파하라!”는 요청이 있을 뿐이다. 그것을 선택하고 거부하는 것은 듣는 자의 책임이고 몫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죄로 죽어 저주 받을 나를 살게 했다는 복음이야 말로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초청하는 유일한 메시지다.
초대 교회처럼 구별된 성결의 모습 때문에 그 세상과 다른 공동체 속에 자신이 하나되고 싶어하는 그래서 마침내 거듭나서 교회 속에 꼭 같은 성결의 사람으로 더해지는 그런 모습의 더해 짐일 것이다. 교회의 더해짐은 단순히 교회 등록서를 작성하여 제출하는 것으로 온전치 못하다.
한 죄의 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께서 자신의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성부 성자의 이름으로 물 속에 자신을 장사 지내는 세례를 통해서 거듭나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그 속에 거하게 하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을 때 비로소 천국에 더해지는 것이고, 이것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먼저 거듭난 사람들을 도구로 한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래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신부 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로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영광을 돌림으로 온 백성들에게 칭송을 듣는 구별됨이 그 공동체에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변화시켜 더하시는 것보다도 먼저 되어 있어야 하고, 적어도 이것은 사람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처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고 그의 사도들에게 성령을 부으심으로 이 땅에 탄생시킨 교회는 그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주인 되시는 하나님처럼 거룩하였고, 사람들로부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거룩한 사람들 옆에만 있어도 자신들의 수치가 들어나기 때문이었고, 그러한 죄의 수치를 느끼게 될 때 먼저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인 됨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구속의 십자가를 증거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에 더해진 사람들은 육신의 혈연의 가족관계 이상으로 영과 육의 완벽한 나눔을 감격하였고 그러한 동력을 거룩한 예배 속에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새 언약인 떡과 잔을 통해서 예배 때마다 확인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을 찬미하며 자신의 삶의 이유를 영광 돌리는 것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구원 받은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 오늘 같은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도 이런 경건한 공동체요 예배가 되도록 믿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고 말씀을 가감 없이 순종하여 회복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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