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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탄생한 교회의 나눔과 교제의 모습을 2장 말미에서 봤다면 그 복음의 은혜와 위력은 단순히 교회 속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세상과 사회 속에 영향을 미치며 복을 끼치는 가를 이 3장부터 보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은혜의 역사가 기존의 사회의 기득권 층을 통해서 방해 받는 모습도 보게 될 것이다.
세상을 외면하는 교회는 사실 존재가치가 없다. 교회가 가진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사랑이다. 교회는 이 가진 구것을 나눠야 감격이 되고 하나님께도 영광이 될 것이다.
복음이 들어 가는 곳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예외 없이 빛으로 감격의 삶이 되고, 거절하는 자들 속에서는 여전히 자신들의 삶에 걸림돌이 되는 장애요소로 의식하는 것을 본다. 복음이 오기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어두움의 삶의 방법들이 남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거리낌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복음이 인간의 불행을 해결하고, 뒤에 베드로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라는 180℃ 반전되는 인생을 경험하게 된다.
성전이라는 보이는 웅장하고 거룩해 보이는 주변에서 하나님의 은혜나 생명은 맛보지 못하고 다만 육신의 하루 살기에 급급한 구걸의 인생은 종교인들의 연민에 호소해 보는 또 다른 더부살이 인생이지만 그러한 삶은 매일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기쁨도 감사도 없는 처절한 삶일 뿐이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면서도 이런 삶이 되어버린 이유는 사실 기득권의 종교지도자들이 주님의 표현처럼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23:13)는 안타까움을 들을 만 했다.
오늘도 많은 신앙인들의 주변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바라보지만 이 지체 부자유자가 성전 입구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이내 값싼 동정의 돈 몇 푼 밖에는 줄 것이 없는 모습이다. 왜냐하면 오순절 날 베드로와 요한처럼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능력을 받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하다.
오늘 우리는 이 가련한 인생이 삶의 변화를 받고 주님을 마음 것 찬미함을 우리 자신들의 삶 속에서 회복하고 베드로와 요한처럼 주어진 복음으로 생명을 끼치는 삶을 말씀을 통해서 회복할 수 있기를 복되신 이름으로 …
Ⅰ.여기에 가련한 한 인생이 있다.(1~3)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다른 사도들은 모르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도 야고보와 함께 중요한 장소마다 함께 다녔던 모습을 복음서에서도 보는데 유대인들의 관습대로 우리 시간 같으면 오후 3시 기도시간에(나중 10장에서는 제 육시 기도시간에 지붕에 올라가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v9) 성전에 올라 가는 길이었고, 예루살렘 성전은 문마다 이름이 붙여져 있고 ‘아름다운 문’이라는 출구를 통해서 성전을 올라가고 있었는데 이 나면서 걸어 본적이 없는 사건의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성전의 ‘아름다운 문’ 그것은 이 사람에게는 더 이상 아름다운 문이 아니었고 다만 종교적인 사람들의 연민을 자극해서 동정을 구해내는 이 사람의 유일한 진저리 나는 생계수단의 장소일 뿐이었고, 사람들에게도 또한 ‘아름다운 문’ 일 수 없었던 이유는 이 문을 들어가고자 할 때마다 이 지체 장애자가 누더기를 걸친 체로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또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이 사람 스스로가 성전 문에 올 수 없었기 때문에 그를 매고 오는 사람들, 그들이 친척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 가련한 인생의 육체의 약점을 이용하여 이 일을 해주고 적게나마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사람들일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는 예외 없이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손을 내밀어 구걸하였고 여기서 뜻하지 않은 전혀 다른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먼저 우리는 이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는 지체장애자가 과연 오늘 누구인가?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성전은 어떤 의미인가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 사람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였다고 본문에 기록이 되고 있다. 이 상태와 성전 미문을 연관해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는 사실에 있어서 오늘 우리 자신들이다.
사람은 누구나 나면서부터 영적으로는 스스로 걸을 수 없는 앉은뱅이인데다가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은 있으되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 성전에 오지도 못하고 때로는 친구의 부추김에, 부모를 봐서,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서, 남편을 봐서 오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게 들려 오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형편일 것이다.
이런 모습으로 성전을 찾는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일찍이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탄식하신 바 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1:12)
성전에 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지성소는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그저 이 앉은뱅이처럼 성전 입구만 지키다가 다시 매어감을 당하는 초라하고 가련한 모습은 신앙생활 한다고 하지만 그야말로 영적으로는 앉은뱅이 같은 우리 자신들이 아닌가!
구걸하는 모습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어쩌면 설교나 기타 등등의 말씀들을 구걸하듯 주워듣지만 영혼을 촉촉히 적시는 은혜의 단비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풍족히 채우지 못하는 허전함은 여전하고, 이런 우리의 모습이 언제까지 계속 되어야만 하는가! 이 앉은뱅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까지는 달라지는 것이 없었던 것처럼 아마 우리 모두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되신 이름을 직접 경험하기 까지는 모두 이 성전미문의 앉은뱅이 같은 영적인 거지일 뿐이다. 그에게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는 그래도 마지막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만났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진리를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이었다.
표면 적으로는 듣기 행복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여러분 모두가 이 성전의 아름다운 문의 지체장애자의 경험처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이와 같은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는 …
Ⅱ.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물로 주었다.(4~7)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서로의 눈을 마주 보는 것은 완전한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이다. 진실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자세야 말로 진지하고 진실할 수 있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 지체부자유자는 “우리를 보라”는 베드로와 요한의 요청에도 겨우 동전 몇 푼 얻어 한 끼를 해결할 양으로 바라 볼 뿐이었다. 주려고 하는 자와 받을 사람이 서로 생각이 달랐다.
우리는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주는 것이나 요구가 늘 넉넉할 필요가 있다. 열왕기하13장에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엘리사가 “또 가로되 살들을 취하소서 곧 취하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이에 세 번 치고 그친지라”(18)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가로되 왕이 오륙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19)는 안타까운 모습을 읽는다.
늘 하나님은 넉넉히 주시고 싶어 하는데 사람들은 이 지체부자유자처럼 ‘무엇을 얻을까’ 이 사람들이 과연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의아심으로 쳐다 보았다.
주님께서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하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것을 계산하면 하나님께서도 주실 것을 계산하신다. 그러나 후히 드리면 생각지 못할 큰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6) 일단 이 지체장애자가 기대하는 것은 없다는 선언으로 그들에게 돈을 얻으려던 기대는 어긋나고 만다. “일단 네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다음이 그는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것이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베드로와 요한, 그들이 돈은 가지지 못했지만 그들도 가진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참으로 세상에서는 돈 주고 살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6b) 믿음의 사람이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이 것은 가지고 살아야 한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천하에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세상의 가치로 평가할 수 없는 그것,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그 이름은 그 가치의 진가를 아는 사람에게만 귀중한 이름이다.
1. 내 사랑하는 그 이름 예수 복된 예수, 내 귀에 음악 같도다 예수 복된 예수
2. 내 맘에 계신 그 이름 예수 복된 예수, 내 눈의 눈물 씻기는 예수 복된 예수
후렴 : 아 귀하다 그의 이름 갈보리 산의 어린양, 귀한 생명 버리셨네 예수 복된 예수
나의 나 됨이 그 이름이며, 나의 삶의 이유가 그 이름이며, 나의 삶의 원동력이 그 이름이며, 늘 감격할 수 있는 그 이름이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러나 이 이름은 그 가치를 아는 자에게만 그 가치를 아는 만큼 역사하며 귀하다.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벧전2:7~8f)고 선언한다. 믿음의 귀한 약속들은 반드시 순종이라는 우리의 도구로 자신의 것이 된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에게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잘 믿음으로 이 참으로 귀하고 보배로운 이름으로 역사 되시기를 …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이 이름은 모든 것을 여는 열쇠이다. 죄를 벗어 던지는 열쇠요, 천국 문을 여는 열쇠요,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귀한 이름의 가치를 모르고 잘 사용하질 못하고 썩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혹시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나면서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40여세(행4:22)나 된 이 사람의 불구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료되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7) 나면서부터 평생 사용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힘이 있을 리 없는 이 사람의 ‘발과 발목’이 드디어 힘을 얻게 된다. 어떻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
오늘 우리의 힘을 잃은 지체들이 보이는 것이든지 보이지 않는 것이든지 개인이든지 전체이든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힘을 얻을 수 있기를 …
Ⅲ.하나님을 찬미하는 인생이 되었다.(8~10)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동전 몇 푼을 기대했던 이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복을 받고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하나님께 찬미과 영광을 돌린다. 얼마나 좋았을까! 평생 걸어본 경험이 없던 이 사람이 뛰어 걸을 수 있다는 감사가 얼마나 클까?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치료의 모습이다. 40년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오늘의 의술로 수술을 한다고 해도 수술 기간에 비례되는 물리치료를 받아야 할 것임에도 이 사람은 뛰어 걸으며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갔다.
오늘 날 몇 번씩이나 기도를 해야 한다거나 물질을 바쳐야 치료가 된다는 이야기는 사실에 있어서 하나님의 기적이나 선물 즉, 은혜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은 값없이 한번에 완벽하게 치료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실제로 성경에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치료는 다 그렇다. 예수께서 마가복음 8:22~26에서 ‘벳새다’에 이르시매 사람들이 소경 한 사람을 데리고 왔고 안수하셨지만 사람들이 거꾸로 보여서 다시 안수 하시자 밝히 보인 사건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시간을 지내서가 아니라 바로 그렇게 하셨음을 본다.
이 사람은 낳음을 얻은 후 마치 치료받은 열명의 문둥병자 중에 한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와서 감사를 드리는 것처럼(눅17:11~19) 성전으로 뛰어 걸어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그 모습이 상상이 된다. 성전은 사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런 모습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오늘 우리의 은혜에 대한 감격도 이래야만 할 것이다. 신앙 생활 좀 하다 보면 타성에 젖어서 신앙에 대한 감격도 예배의 기쁨도 잊어 버리고 입술에 찬양도 말라 버리고, 생기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찾아 보지만 이런 모습은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 모두 영원한 저주의 질병인 죄의 문제를 치료 받은 감격을 회복해야만 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이제 옆의 사람들에게로 번져갔다.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9) 그의 걷는 행동과 입술의 열매로 드리는 찬미는 그전에는 그에게서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되도록이면 처량한 모습을 보임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동정심을 이끌어 내던 그의 모습은 이미 그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사실 나의 구원에 대한 감격이 어떤 모습으로든지 옆의 사람들에게 전달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들을 더욱 의아하게 했던 이유는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10)
사람들이 과거의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주님으로 받아 들인 후의 차이를 이 사람에게서처럼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구걸하던 사람이 주는 사람으로 바뀌는 모습, 초라한 모습 아니, 처량하기까지 하던 모습이 감격의 찬미를 부르는 모습, 특히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과거 그의 모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놀랐다.
반전이 클수록 놀람은 크고 사실 이런 이유에서 죄의 수렁에 깊이 박혀있던 사람의 변화는 더 놀라움을 끼치게 됨을 본다. 사실 심성이 착한 사람들이 복음으로 변화를 받으면 더 완벽하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착함 때문에 사죄라고 하는 것이 실감 되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사실 이 사람의 당한 일 같은 변화가 이 역사 속에 얼마나 될까? 또 변하려면 이 정도는 변해야 충격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의 당한 일” 이 지체 부자유자였던 사람의 당한 일이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에게도 일어 나기를 …
Conclusions: 오늘 교회당을 오기는 하지만 마치 구걸하는 사람처럼 스스로가 아닌 누구 때문에 붙들려서 오는 모습은 늘 성전 미문에 들려와서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이 사람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도 성전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되신 이름 때문에 삶은 뒤집혔다.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이 이렇다면 반드시 뒤집혀야만 한다.
오늘 우리가 다른 인생의 불구자 된 사람들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끼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갖지 못했을지라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만은 가지고 살아야 영원의 약속을 누릴 수 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조롱 받던 이름, 하찮게 여기든 이름, 그러나 그 이름이 이 세상을 절망에서 소망으로 뒤집었고 오늘 우리의 생명도 누리게 하셨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름, 그러나 부활하신 이름, 승천하신 이름, 그리고 그를 바라는 자들에게 이제 죄와 상관없이 다시 오실 이름이다. 거듭난 자의 것인 이름, 이 보배로운 이름 만은 어떤 운명에 있든지 누리는 이름이어야만 한다.
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누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놀라움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다른 것을 더 귀중히 여겨 이 귀한 이름을 등한히 여긴다면 나중에 수치를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의 운명이 걸린 이름, 영원한 영광이 걸린 이름, 썩지 않을 소망의 이름, 영육의 치료의 이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오늘 우리 모두를 온전케 하시고 또 모두가 소유하여 함께 성전의 깊은 지성소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저와 여러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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