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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3:11~18 2008-03-23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일어난 기적은 또다시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이 일로 성전에 드나드는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된 베드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신 구속의 역사를 자연스럽게 자신을 주목하는 사람들에게 증거할 수 밖에 없게 되는 데 오순절 이후 이 사도행전에서의 두 번째 강론이 된다.

이 3장 나머지의 내용이 또 다른 하나의 긴 복음의 증거이지만 오늘과 다음 주 두 번에 걸쳐서 이 은혜 역사의 논증을 나누어 상고하며 오늘 우리 모두의 생명의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

이 앞부분에서 증거되는 베드로 사도를 통한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신비의 역사에 감격하고 찬양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도구로 사용된 자신들에 집중되는 관심과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되돌리는 가장 바람직한 하나님의 종의 모습을 배우게 된다.

사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와 기적에도 불구하고 그 기적이 가능케 하신 하나님을 주목하기 보다는 그 능력의 매개체로 사용된 보이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일반이고, 가끔 하나님의 신실하다는 종들일지라도 이런 유혹에 쉽게 넘어질 수 있음을 보면서 베드로 사도는 이런 내용에서도 대단히 경건한 모범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구약의 충성된 종들의 자세에서도 이런 영적인 시험에 있어서 바른 자세를 가지는 사람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요 쓰임을 받았지만 주님의 역사를 자신의 것인 양 왜곡하고 자신을 나타내려 했던 사람들은 버림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하나님의 이루신 역사를 자신의 이름을 내려고 하는 것 때문에 버림을 당한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반대로 다윗이 지금까지 존경 받는 이유는 그는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도적질 하지 않았다는 입장에서 영광스러운 믿음의 영웅으로 칭송 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말렉을 크게 도말한 사울은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났더니 혹이 사무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돌이켜 행하여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삼상15:12)

다윗은 거인 골리앗을 대항하면서도 이러한 믿음으로 나아갔고, 나중에도 변함없는 이러한 고백으로 그의 자리를 지켰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17:47)

이러한 신앙적 고백은 후대에도 그대로 계승이 되고 있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셨나이다”(시44:6~7)

우리 모두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것 자체가 감격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시는 모든 권능과 구원은 또다시 그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께로 영광 돌려져야 당연한 것이다. 어찌보면 이러한 구분을 바로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영적이거나 육적인 구분이 될 것이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

아무리 위대한 업적에도 그것은 다만 하나님 아버지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서 영광을 돌려 드리는 믿음의 자세를 가지는 …



Ⅰ.가장 확신한 것을 붙잡았다.(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40년 동안 앉은뱅이로 구걸하는 인생을 살았던, 이제 비록 뛰어 걸을 수 있는 자유를 얻기는 했지만 인생의 전환점이 된 베드로를 붙잡을 수 밖에 없었다. [붙잡다, 헬, 크라테오(krateo), forcefully lay hold of, (단단히)붙들다, 지니다, 지키다(막 7:3)] 어쩌면 이 사람은 베드로는 붙잡은 것보다 베드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자 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을 때는 영적으로는 한 발자국도 내 딛을 수 없는 영적인 앉은뱅이였는데 이제는 죄와 저주의 사슬을 끊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뛰어 걸으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면, 이 사람처럼 나(우리)를 나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인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구약의 위대한 믿음의 한 여인인 룻이 비록 시부와 남편을 잃고 고국을 떠나 시모(媤母)인 나오미를 ‘붙좇았더라’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을 따랐더니 그녀는 나중에 다윗의 왕가가 되고 메시야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누린 것처럼, 오늘도 그리고 이 역사의 마지막까지 비록 세상 속에서는 어리석게 생각하고 천대받는 이름이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사람은 하늘의 영광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리게 될 줄을 확신한다.

이 세상에서 붙잡아서 가장 확신한 존재는 과연 누구이겠는가! 우리가 궁극적으로 붙잡아야 할 존재는 이 세상에 시간과 공간에 유한한 존재인 사람이나 물질이나 권세와 영광이 아니라 영원히 지지 않을 영광된 이름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붙잡을 때 그의 영광과 위엄이 다 나(우리)의 것이 될 줄로 믿는다.

이 사람이 베드로를 붙잡자 사람들은 그 일에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성전에서 또 다시 주님의 구원의 은총을 선포할 기회를 허락 하신다.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요10:23)

오늘도 여러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튼튼히 붙잡으므로 구원의 십자가가 증거될 기회를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세상의 불안 한 어떤 것보다도 가장 확실한 예수 그리스도를 붙듦으로 하늘의 견고한 보장을 누리는 …



Ⅱ.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12~16)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앞으로 계속해서 상고하게 되겠지만 이 사도행전 속에서 종종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향한 군중들의 같은 반응들을 더러 본다. 사도행전14:8~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 라는 곳에 전도를 하나가 이 성전미문의 앉은뱅이와 같이 나면서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 하나를 고치는 사건이 기록이 되고 있다.

이들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을 목격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종교관념대로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신과 헤르메스 신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 왔다고 해서 이 두 사람 앞에 제사를 드리려고까지 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물론 하나님께 충실했던 바울과 바나바는 이를 말리고 그 기회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참되신 하나님을 증거하긴 했지만 세상의 수준에 머무르는 거듭 나지 못한 사람들은 베드로나 요한이 자신들의 어떤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이들을 주목했다.

성령에 충만한 이 사람들은 결국 자신에게 집중되는 영광을 하나님께로 되돌리는 데 최선을 다함을 본다.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이라면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옳은 것이지만 바른 경건에 서지 못하면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데서 경성할 필요가 있는 내용이다.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여”(11) 이런 경험이 전혀 없었던 사람들은 색다른 눈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봤던 것 같다. 궁극적인 실체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거듭나지 못한 땅에 속한 이 사람들의 생각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되돌리는 바른 섬김의 모습을 본다.

1.사람의 경건으로는 이러한 일이 불가능함을 선언한다.(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어떤 경우 그 역사를 실행하는 사람을 높이는 실수를 범할 수 있는 소지는 언제나 있다. 베드로는 이 놀랄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군중을 교훈하고 있다.

사실 아담 이후의 어떤 사람의 경건도 한 사람의 정신이든 육신의 불구를 회복할 수 없는 것은 사람은 다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하신 일들은 참으로 기이하고 기이하지만 그 기이한 역사를 이루는 도구인 인간은 베드로를 비롯해서 누구도 결코 기이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우리의 주님 외에는 결국 다가서면 냄새 나는 사람일 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거나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소개하려는 바른 하나님의 종의 모습이다. 어떤 사람의 경건이나 메시지도 결코 그 자신의 것이라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개인의 권능과 경건”은 불가능하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 흘리심의 은혜와 함께 하나님의 성령에 사로잡히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오른 손에 붙들림을 받을 때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

죄의 습성을 가진 사람의 경건으로는 결코 한 사람의 영혼이나 육신도 온전케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이 부정 되어질 때 하나님의 역사는 경험되어 질 수 있다.

2.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셨다.(13, 15)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비록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하신 예수, 자신의 민족으로부터 버림을 당한 건축자의 버린 돌이지만, 이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즉 산 자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광의 주님이시다.

어쩌면 이렇게 예수로 하여금 버림을 당하게 하심으로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도록 유월절 양이 되게 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던 예수도, 그럼에도 바로 그들로부터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라는 외침도 들었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목숨 걸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전해야 할 예수도 십자가에 온 인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부활의 영광을 입으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누구보다도 나를 나 되게 하신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는 확신을 증거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변화된 삶의 완전한 증인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3.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완전히 낫게 하였다.(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뛰어 걷게 된 이 사람의 완전함이 오늘 나 또한 완전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이야기 했었다. 오늘 다시 같은 이름을 소개하기를 “그 이름을 믿으므로,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고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믿을만한 증거로 주시고 사람들에게서는 그 이름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신다. 사람들 나름대로는 모두 믿음을 가지고 있겠지만 사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아니면 아무 역사도 기대할 수 없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사람들로 하여금 누리게 할 수 있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도 진정한 치하(致賀)가 있고 공치사(空致辭)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아닌 것은 다 공치사에 불과한 것이다.(立春大吉, 建陽多慶) 그런 이유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는 말씀은 사실이다.

적어도 믿음에 관한 한은 모든 존귀와 영광은 주님 홀로 받으셔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355:3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는 고백은 옳다.

아무리 잘 헌신을 하며 섬겼다 할지라도 주님의 십자가가 먼저이기 때문에 그렇고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이기 때문에 섬기는 자 자신에게 집중될 수 있는 영광과 존귀는 하나님께 되돌려야 한다. 그래야 영원한 영광에서 태양처럼 빛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존귀와 영광을 주님께 돌려 드리라고 권면하는 베드로 사도의 당부는 자신의 경험 속에서 나온 것이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4:11)

오늘도 주님을 섬김으로 인하여 나에게 올 수 있는 모든 영광을 주님께도 되돌려 드림으로 주님께서 홀로 영광을 받으시고 그럼으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위로와 기쁨이 충만 하시기를 …



Ⅲ.하나님께서는 무지까지도 사용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시다.(13b~15ff, 17~18)

“너희가 저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다만 이 말씀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본래 무지한 인간들을 그 어리석은 대로 사용하신다는 말씀이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무지하고 어리석게 만드시는 분은 아니시다.

빌라도는 악한 자로서 주님께서 이왕에 사죄의 십자가를 지시는데 있어서 역사적인 증거가 되기 위하여 세우심을 입었지만, 그가 놓아 주기로 결안 하였음에도 죽여달라고 소란을 피우는 하나님의 선택 받았다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오히려 빌라도가 의아해 하는 모습이 성경 도처에 나타난다.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마27:23)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눅23:22)

여기 13~14에 연이어 두 번씩이나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라고 기록한 것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를 외면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부인하다, 헬, 아르네오마이(arneomai), (마10: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딤후2:12); 행7:35-거절하던 그 모세를) to say not; 거절하다, 배반하다, 저버리다] 결국 이 낱말은 ‘믿음’과 ‘순종’의 반대말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해골의 골고다 언덕에 모든 것을 다 준비하셨다. 이 세상의 모든 저주와 고통과 수치와 모욕을 자신의 독생자로 하여금 감당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것을 거절해 버리면 더 이상 소망이 없다. 그럼에도 바로 이 일이 부인하는 완악한 자들로 통해서 성취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을”(롬5:8) 뿐만 아니라 “…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16:4b)는 말씀처럼 모든 것을 미리 아시고 모든 것을 사람 구원하시는데 쓰시는 주님이시다.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는 어리석음은 그때뿐이 아니라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역사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의 악과 죄성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17~18)

너희들이 알지 못해서 그런 줄 알고, 산헤드린 공회까지도 그리하였지만 결국 그러한 무지가 이루어진 것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증거된 예언을 이루신 것이라는 증언이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모르고 불순종하면 부정적인 도구로 사용될 수 밖에 없다. 이왕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구원을 알고 영생을 알았다면 생명의 도구로 은혜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의 의지와 뜻을 온전히 성령께 의지하고 말씀을 순종하려 할 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바울과 같은 역할을 감당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바울과 같이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는 고백을 동일한 감격으로 드릴 수 있는 …

우리 모두가 베드로와 요한처럼 경건과 능력으로 우러러보는 선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붙잡으려 할 것이다. 모두가 성령과 말씀에 충만하여 시선을 그리스도께로 되돌릴 수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