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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연이어 베드로 사도의 지체장애자를 고친 사건으로 인하여 의아해 하는 군중들을 향한 강론의 계속이다. 지난 주의 요지가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역사를 자신들의 경건으로 인한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군중들을 향해서, 은혜의 역사의 출처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관심의 초점을 바로 잡아주는 교훈이었다.
이제는 이 지체장애자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같은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실로, 이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한 육신의 치료에 그치지 않고 모든 사람의 운명을 바꿔 놓기에 충분한 것이며, 사실 이 귀중한 믿음을 가진 자들을 완전히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승천해 계시며 주님의 예정하신 어떤 날에 반드시 재림하셔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을 영원한 영광으로 데리고 들어 가실 것을 증거한다.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된 교훈은 바로 이를 위한 것이며 먼저는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이스라엘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을 향하여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구속을 완성하신 주님의 사랑의 역사는 모든 인류에게 복 주시려는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오늘 이 자리의 우리 조차도 이 은혜의 언약에 참여할 수 있도록 부르심을 감사하고 하나님의 이 예정 속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찬양 드리는 …
Ⅰ.유쾌한 인생이 되려면…(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이 요청은 사람들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는 데서 대단히 중요하다. 즉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는 단순히 육신의 치료에 대한 기쁨보다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혼의 회복이 더 큰 감격이었고 뛰어 걸으며 하나님을 찬양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인생이 어떻게 근본적으로 유쾌할 수 있을까? 환경과 처지에 관계없이 유쾌할 수 있을까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주기 때문에 이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는 요청은 사람들의 영혼을 전율케 하는 선언이었을 것이다.
사실 모든 종교와 철학의 레저(leisure), 오락의 목표가 인생을 유쾌하게 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사람들은 마약을 통해서라도 인생의 고통을 잊고 유쾌하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가장 위험한 행동이다. 사람이 어떻게 유쾌할 수 있을까? 여기에 연루된 근본적인 문제는 에덴에서부터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바로 죄의 문제가 걸려있다.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사람은 절대로 영원히 유쾌할 수 없는 존재이다. 구약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 문제로 고민했지만 복음의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진정한 유쾌함을 얻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구약의 다윗이 증거했고 바울이 다시 인용하는 말씀을 보면 시편 32:1~2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7~8)
많은 사람들이 유쾌한 인생을 꿈꾸고 이러한 삶이 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다 실패한 이유는 바로 이 문제는 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먼저는 “유쾌하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살필 필요가 있다. [유쾌하게,헬, 아납쉭시스(anabsyxis) = ana(위, 다시) +psyche(호흡, 영혼, 생명) 다시 숨쉬게 됨, 상쾌함, 소생케 되다.]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딤후1:16)
에덴에서 범죄한 후부터 사람은 그 영혼이 죽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하셨지만 이 계명은 어겨졌고,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육체는 살아 있었지만 영혼의 호흡이 멎고 말았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저주받은 인생들을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시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갈3:13f) 라는 귀중한 교훈을 일깨워 준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에 일체가 되고 다시 부활과 하나가 되는 세례를 받고 죄 없이 함을 받게 될 때 비로소 죽었던 영혼이 호흡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소생케 되는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로부터도, 인간으로부터도, 철학으로부터도, 과학으로부터도, 문화로부터도, 오락으로부터도, 종교로부터도 불가능하고 오직 오늘 첫 절에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19b) 하였고 그 비결은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19f)
이렇게 될 때 사죄를 받은 사람의 영혼은 세상의 감옥도 죽음도 그 유쾌함을 빼앗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매맞고 토굴 속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밤중의 캄캄한 감옥 속에서도 찬양을 부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보게 되는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상고하는 여러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하늘의 유쾌함으로 충만한 …
Ⅱ.예수 그리스도는 재림하실 날을 기다리고 계신다.(20~21)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이제 베드로의 두 번째 강론은 복음의 핵심으로 점점 다가가고 있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선포하기 얼마 전 바로 구속의 십자가로 인류의 영원한 속죄의 사역을 이루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승천하셨던 예수께서는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을 예정하고 계시며, 베드로의 표현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라는 계획을 기다리고 계심을 선언하는 것이다.
오순절 이후 곧 오시리라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언 2천 년이 지나가고 있지만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은 무시간의 존재이시기 때문에 오히려 이 긴 기간조차도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는 귀중한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더디다고 생각할지라도 오늘 나 한 사람의 온전한 사람으로의 회개 때문에 ‘곧’ 오심을 늦추시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헤아릴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8)
죄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들, 유쾌한 인생이 되지 못할 사람들 때문에 오심을 늦추시는 사랑을 역시 하늘의 은혜를 깊이 맛 본 사람들이나 헤아릴 수 있는 비밀일 것이다.
이것은 이미 그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사실임을 부연하고 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21)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 하늘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우편에 모셔 두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연히 하늘의 영광의 보좌에 우리 부족한 사람들을 위하여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기도하고 계심을 바울은 증거한 바 있다.
우리의 유쾌함을 얻어 주시기 위하여 기꺼이 죽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에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하나님의 예정하신 때는 이제 거의 차 가고 있다. 이 어두움의 역사의 자정을 넘기고 있는 이 시점에서 다시 신랑으로 오심을 기다림에 부끄러움이 없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성결을 지키며 사는데 부끄러움이 없는 …
Ⅲ.예언된 모든 말씀을 반드시 들어야 산다.(22~24)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받으리라 하였고,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하시고 도 이 거듭난 자들을 위하여 이 역사의 마지막에 반드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이 부분에서는 다시 말씀하고 있다.
여기에 인용되고 있는 말씀은 신명기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는 말씀의 인용으로 대단히 단호한 말씀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모세 조차도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히12:21) 라는 표현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에서도 순종치 못한 자들이 형벌을 받았다면 대낮의 태양 빛보다도 밝은 이 복음의 시대에 순종치 않는다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10:31) 두려워 해야 한다.
여기 베드로의 당부는 대단히 단호하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22b~23)
강조의 강조 표현이다.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22b) 말씀하는 ‘무엇이든지’ 또 ‘그 모든 말씀’을 들어야 한다. 또는 한번 더 강조하여 “누구든지 그 선지자(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22b~23)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즉, 유쾌함을 얻을 사람은 누구나 관계없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어느 것은 듣고 어느 것은 거절하거나, 어느 것은 귀하게 여기고 어느 말씀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두려운 경계의 말씀이다.
구원에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귀한 말씀이든지 구원에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말씀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단호하게 당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의 귀중성과 덜 귀중하다는 판단은 우리 순종해야 할 사람의 몫이 아니다. 그 선지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말씀은 무슨 말씀이든지 순종치 않으면 백성 중에서 즉, 하나님의 나라 천국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는 두려운 경외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24) 사무엘 이전의 선지자를 ‘선견자’ 라고 했기 때문에[삼상9:9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 ‘사무엘 때로부터’ 라는 표현을 쓰는 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스라엘 나라가 성립된 후 모든 선지자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삶을 증거했다고 선언한다.
실제로 순종을 가장 강하게 증거한 사람은 바로 사무엘이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삼상15:22~23f)
그러므로 사무엘 때로부터 있어왔던 모든 선지자들도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받으리라”(22b~23)는 순종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면 최종적으로 아들로 말씀하신 증거를 외면 한다면 멸망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1:1b~2) 여러분 모든가 주께서 말씀하신 것은 ‘구원에 관련 있다, 없다.’ 구별함 없이 그대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넘치는 사랑을 충만이 누리시기를 …
Ⅳ.복 주리려고 부르셨다.(25~26)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이것은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지금은 동일한 약속에 들어와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후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다.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창22:16b) 하신 후에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18)
결국 이 언약으로 인하여 오늘 우리가 같은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고, 만약에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졌다면 그러한 우리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같은 복의 군원이 되어서 우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동일한 복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믿습니까?
오늘 마지막 말씀에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26)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을만한 증거를 주시고 회개를 요청하신 것은 한가지 이유밖에 없다. “복 주시려고”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므로 이 말씀을 역으로 이해를 하면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신 것은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신 것’이다. 물론 여기에 [너희]는 메시아를 나게 하신 이스라엘이다.
그리고 여기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는 무엇을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되는가? 바로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을 통해서 경계되고 베드로를 통해서 또 다시 경계되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22b~23)는 불순종의 경계이다.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복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33:11)
그러므로 하나님은 비극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유쾌하지 못한 모든 인생들이, 불신과 불순종에서 돌이켜 이왕에 제물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 받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육신에 사는 인생의 가장 귀중한 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당하신 저주를 힘입어 영혼이 살고 그로 말미암아 유쾌한 인생들의 영혼이 하늘을 향하여 호흡을 다시 할 수 있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이런 거듭난 영혼들을 온전히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는 온전한 영광에 데리고 가시기 위해서 때를 정하시고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시면서 한 영혼이라도 악에서 돌이켜 살기를 鶴首苦待 하신다.
결국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는 경계로 남은 생애를 살아야만 한다.
사무엘 때로부터 왔던 모든 선지자들은 모든 사람이 ‘그 악함을 버리고 복 받게 하시려’고 아브라함으로부터 모든 믿음의 선진들과 최종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보내 주셨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 앞에 핑계치 못할 확실한 증거와 사랑을 힘입어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모두 영광스러운 영원한 복에 들어가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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