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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주님의 제자들은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였었다. 삼키자니 뜨겁고 내뱉자니 그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잡아들이고 심문을 해 보지만 힘없는 존재로 알았던, 하나님의 성령에 붙잡힌 베드로와 요한은 꿈쩍조차 하지 않는 바위와 같은 존재였다.
제사장 가문 전체와 공회까지 소집해 보지만 뾰쪽한 수는 생각나지 않고 더 난감할 뿐이었다. 한 낱 갈릴리 출신의 무식한 어부들로만 생각하고 가볍게 봤던 사도들은 저들이 감당할 수 없는 지혜의 말로 오히려 그들을 심문하는 자신들이 난처할 정도에 이르게 된다. 결국 간악한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의 성령의 지혜 앞에 가치를 잃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덴에서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18:9~10) 하셨던 것처럼 베드로와 요한에게 감히 사람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주심으로써 비난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자기네들끼리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더욱이 사도들을 붙잡고 있는 성전미문에서 구걸하던 지체장애자였던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의 과거를 알고 있었고, 지금 그의 회복된 모습은 어떤 명분으로도 비난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의 증거였기 때문에 사도들에게 예수를 전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지만 이미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힌 사도들이 이들의 협박 앞에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19)는 답변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아왔던 백성들 때문에도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을 뿐이었다.
오늘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이 두 사도와 같은 신앙적 자세가 필요하다. 그럴 때 어떤 경우에도 초라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증거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 증거를 담대히 증거할 수 있는 성령의 충만이 필요하고, 사람의 권력과 위협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는 자세로 이 시대에 같은 복음을 감당하는 …
Ⅰ.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역사는 대적자들을 당황케 한다.(13~15f)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판단으로는 이상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특히 이들이 이상히 여긴 이유를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예수를 알기만 하면 주변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을 비롯하여 공회원 모두가 이 베드로와 요한을 배우지 않은 무식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그들이 갈릴리 어부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영적인 지식(知識)은 사실 학벌에 있지 않다. 예수께도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요7:15)고 의아해 한 일이 있었다.
사실 그리스로만 시대의 최고의 학문을 배웠던 바울조차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그의 세계관의 변화를 빌립보 교회에 고백하고 있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7~9)
죄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 자체가 인간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그것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고 고백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사실이기 때문에 [기탄없이, 헬, 파르헤시아(parresia), 숨김없이 말함, 솔직함, 담대히(28:31)] 증거할 수 있었고, 이들을 심문하던 공회원들의 한가지 가진 지식은 이 두 사도가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자신들이 심문해서 거짓증거를 씌워 죽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저들과 함께 한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들이 질려버렸던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라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14) [힐난할 말, 헬, 안티레고(antilego), 반박하다, 거절하다, 논박하다]
사실 가장 무서운 것은 증거이다. 증거 앞에서는 누구도 잠잠할 수 밖에 없다. 예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내신 증거는 아직까지 사두개인은 물론이고 제사장이든 공회원이든 한번도 자신들의 힘으로는 나타내보지 못한 하늘의 권능이었다. 오늘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대상에게 가장 호소력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증거는 바로 (자신이든, 자신으로 인한 다른 사람이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변화된 삶의 변화이다.
저들은 정죄할 증거를 찾지 못하자 귀찮은 나머지 자신들이 잡아온 ‘공회에서 나가라’고(15) 고함칠 뿐이었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거룩한 하늘의 사람으로 변화된 증거를 제시한다면 어떤 마귀 사탄도 그의 하수인인 antichristian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각자의 변화된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
Ⅱ.대적자들은 복음 증거를 가장 싫어한다.(15b~18)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와 사랑을 거역하는 의논은 결국 하나님을 거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들의 권위와 명예에 큰 손상을 끼친다고 생각되는 귀찮게 여겨지는 사도들을 밖으로 쫓아낸 후에 저들은 함께 머리를 맛 대어 보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내려 쪼이는 가운데 어두움의 지혜가 나올 리 없었다.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은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조차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인 나면서 지체장애자였던 사람이 언제나 사도들의 옆에 증인으로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17)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어리석음을 보는 것 같고, 저수지가 터진 물을 손바닥으로 막겠다는 심산이다.
사람이 가장 어리석어질 때는 바로 진리를 대항하게 될 때이다. 사울이라는 사람도 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들을 죽이는데 가편 투표를 던지고 저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결국 그 대항하던 힘을 잃고 눈이 멀어버림을 본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전하시길 원하시고 명령하시는데 이 간악한 인간들은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모의를 하고 있다.
언제나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는 것은 어리석은 정도가 아니라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다. 어떤 경우 사람을 거역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안된다. 이래서 진리 편에 서는 것이 귀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고상하고 아름답다 진리 편에 서는 일, 진리 위해 억압받고 명예 이익 잃어도, 비겁한 자 물러서나 용감한 자 굳세게, 낙심한 자 돌아오는 그날까지 서리라521:2]
저들은 어리석게도 잘못된 결의를 그대로 실천하고 만다.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18) 예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는 가르치지도 말라는 주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때부터 예언된 하나님의 역사를 거역하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예수]라는 이름이 얼마나 귀한 이름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라는 복된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사악한 결정이다.
무엇보다도 자기백성 즉, 이들을 구원할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니, 자시들 스스로가 복을 차버리는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래서 결과적으로는 [예수]는 육신적인 혈통으로서의 자기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가 바로 ‘자기백성’이라는 이해를 가능케 한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이고 그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피를 흘려 저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속해 주신 것이다.
복음의 확산을 기뻐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시라면 반대로 복음이 널리 퍼지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거역한 어두움의 세력일 것이고, 그 이유는 복음이 증거됨으로 어두움의 권세에서 자유 하는 것으로 자신의 세력이 적어지기 때문에 복음증거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넘치고도 넘친다.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에 붙들리지 못해서 복음증거를 장려하는 것보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히려 방해할 수도 있다는 경계를 가져야만 한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17:31)
죄에 잡혀있는 모든 인류에 오직 유용한 이름은 “예수” 밖에 없다. 그래서 어둠의 세력은 이 “예수”의 이름의 증거를 그렇게도 싫어하는 것이다. 인류가 끝날 때까지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하나의 이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우리 모두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3~24)는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일에 모든 힘과 정성을 다하는 …
Ⅲ.증거를 가진 자만이 담대할 수 있고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19~22)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이제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입장만을 생각하여 공갈협박을 하는 이 잘못된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베드로와 요한의 자세를 마지막 부분에서 보게 된다. 어떤 입장에서든지, 누구를 대하든지 이러한 자세는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19) 너무나 옳은 말씀이고 당연한 자세이다. 이종배의 말은 거역해도 괜찮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꼭 들어야만 한다. 그것이 옳은 믿음의 결단이고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은 괜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님을 다음절에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20) 이것은 직접 경험한 것이요 체험했던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만년에 요한 사도는 자신의 글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1:1~3)고 직접 기록하고 있다.
사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보다 분명한 것은 없다.
바울 사도도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4:9)고 당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20)는 고백이 여러분 모두의 것이 되시기를 바란다. 보고 들은 경험이 있는 자만이 증인이다. 여러분 모두의 인생 속에서 매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듣는 경험을 하시기를 …
그러한 결과는 하나님의 대적자들이 원하는 결과가 아니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결과를 가져왔다.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21) 증거가 있고 증인이 있으면 그 결과 즉, 판단은 너무나 쉽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복음은 좋은 형편에서든지 좋지 못한 조건에 상관없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다만 확실히 보고 들은 증인과 또다시 그것을 목격한 백성들 즉, 사람들이 있을 때에는 비록 위협을 당하는 한은 있어도 주님께는 영광이 돌아가게 되어있다.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3)는 바울 사도의 증거는 진실이다. 성령으로 인하여 사도들에게 나타난 증거들을 금지할 법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협을 받긴 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들은 사람들의 위협보다는 하나님을 더 경외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위협은 사실에 있어서는 공갈 협박이요,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교훈처럼 즐거워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아멘!
사람들에게 큰소리를 칠 수 있을 때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협박을 당할 때 어려움과 억울함을 당할 때도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성전미문에서 고침 받은 지체부자유자였던 사람의 나이를 소개하고 있다.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22) 요즘도 40을 불혹(不惑)의 나이라고 한다. 이것은 미혹되지 않을 연령이라는 말이다. 즉, 자기 주관이 뚜렷이 서있을 나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면 왜 갑자기 여기에서 이 사람의 나이를 소개할까? 특히 당시의 시대에서 40세는 더욱 무게를 지닌 연령이다. 즉, 사람들의 꾀임이나 선동에 의해서 움직여질 연령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은 이 지체장애자였던 사람이 인생의 黃金期 까지를 가련한 인생으로 보냈지만 그의 말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하여 하늘의 사람, 주님의 택함 받은 회복된 인생이 되었다는 감격과 함께 이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 꾀임을 받거나 부추김을 받아서 이렇게 그들을 붙들고 다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해서 그의 연령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실 때나, 사도들의 시대에나, 또 지금이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언제나 어두움의 세력들과 그의 추종자들을 당황케 만든다. 한 사람의 영혼이 구속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듣고 보고 하늘의 사람으로 변화 받는 것을 그들은 가장 당황해 한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본 사람들은 더 이상 세상의 영광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어떤 대적자들을 향하여서도 담대할 수 있다.
주님의 대적자들은 복음이 증거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고 방해하려 든다. 복음은 오늘도 죄와 어두움의 사람들을 생명으로 불러내는 능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귀중한 복음이 세상적 지식이나 이해의 폭이 큰 지식이 많은 사람들만 증거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그래서 갈리리 어부 출신이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께 철저하게 순종한 성령의 사람들인 두 사도들을 통해서도 감히 변론치 못할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는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으로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들은 증거를 가진 자만이 어떤 위기 속에서도 담대할 수 있고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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