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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 성전미문의 지체장애자를 치료한 역사는 결국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과 함께 모여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는 기회가 되었고 복음은 확산되었지만 꼭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당사자들이었던 사도들에게는 유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표적과 이적은 반드시 이유와 목적이 있다. 주님께서는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표적을 거절하셨고[막8:12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한번의 기적도 쓸데없이 허비하지 않으셨고 이러한 입장에서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거절 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가장 놀랍고 위대한 기적이었듯이 마찬가지로 우리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또한 모든 사람 앞에 표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반드시 신비한 이적일 필요는 없고, 다만 무사안일과 평탄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일반적인 이 세상에서 좁은 문을 찾아 걷는 구별됨 자체가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신비한 이적일 수 있고(어떻게 하면 저렇게 살까!) 또 그러한 진리를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
문제는 우리 각자의 삶의 자세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우리가 세상과 전혀 다름이 없다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은 물론이고 자신들과 다르기를 기대하는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신뢰를 잃고 말 것이며 복음은 입술에 붙은 구호가 되고 말 것이다.
사도들을 잡아들였지만 어떻게 처리할 방책을 찾지 못하고 또 사도들을 따르고 추앙하는 백성들로 인하여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위협하여 놓아 보내고 말지만 이런 계기로 오히려 교회는 마음을 합하여 더욱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내용이 오늘 읽은 말씀이다.
그리고 기도로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박해를 감수하며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고 기뻐하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더욱 충만케 하시고 교회 속의 나눔의 확산과 거짓까지도 징벌 하시는 주님의 능력이 사도들과 함께 나타나는 것으로 예루살렘의 교회는 더욱 거룩한 능력을 나타냄을 보게 된다.
오늘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의 부흥이 된다면 이 사도들과 같이 진리를 전하는 것으로 고난을 각오하고 헌신하는 신앙적 자세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와 복음의 확산은 절대로 관념적이거나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행동을 불러 일으키는 모습이었다는 사실도 우리가 절대로 지나쳐서는 안될 것이다.
일세기 오순절 때의 복음의 역사가 이론에 그쳤다면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함께 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복음도 우리의 생각에서 그칠 수 없는 것이다. 분명히 성령께서 동반하시는 복음은 우리 모두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고 뒤엎을 수 있다. 다만 거기에는 우리 믿는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절대적인 확신과 순종이 함께 할 때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Ⅰ.핍박은 교회로 하여금 한마음으로 기도하게 하였다.(23~24)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사도들은 풀려나자 도망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인하여 안타까워하는 그들의 동류를 찾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다. 짧은 구절이지만 이 말씀 속에서 어려운 자신의 처지보다 언제나 다른 동료들에게 더 마음 쓰는 모습을 배운다.
같은 히브리 서이지만 믿음의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을 말하면서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히10:33)고 격려하고 있다.
조금 뒤에서는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13:3)고 권면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 자매들로서의 실제적인 면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많이 봐오는 사실들이다.
자신들의 듣고 당한 일들이 곧 당시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을 수 있는 일들이기 때문에 숨기지 않고 다 고함으로서 준비시키는 모습을 본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23)
이 사실을 들은 저들은 마음과 뜻을 합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자신들의 형편과 처지를 다 맡기는 기도를 드린다.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24) 하나님은 이미 모르심이 없으시지만 자신들의 입술로 고백하듯 사정과 형편을 사실대로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예레미야를 통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당부하신 바 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2~3)
결국 같은 믿음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어려움과 핍박을 당할 때에 그것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해보려는 시도보다는 일심으로(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그대로 아뢰는 모습을 본다. 믿음이 깊을수록 모든 문제를 밖에서부터 해결하려는 것 보다는 깊은 내면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생수를 퍼 올려 저들의 영혼이 강건하고 하나님께서 이 일에 직접 관여하시도록 자신들의 형편과 처지를 맡겨드리는 자세로 이 위기에 초연이 직면한다.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24) 오늘도 여전히 신앙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고 손해를 보고 위기를 만난다면 같은 믿음의 자세로 그러한 일을 대처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핍박과 환란은 신앙의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기도하게 만든다. 그러나 믿음의 어려움도 핍박도 도전도 없을 때 더욱 경성해야 할 것이다.
Ⅱ.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예정하신 말씀을 이루는 도구일 뿐이다.(25~28)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이 25~26절은 시편2:1~2의 인용이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한 것이 결국 다윗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것이라고 기도 중에 고백한다.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했는데 [열방, 헬, 에드노스(ethnos), 민족, 외국사람, 이방인, 이교도; 족속, 헬, 라오스(laos), 국가족속, 무리, 백성, 하나님의 사람들] ‘열방과 족속’은 모든 인류 족속을 통틀어서 말하는 것이고, 여기서 특이한 표현은 [분노하며, 헬, 흐뤼아쏘(phryasso), 말이 울다, 코웃음 치다, 발을 구르다, 날뛰다, 거만하다] 조물주 앞에 코웃음을 치며 날뛰는 꼴이야 말로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결국 하나님을 비웃으며 자신들이 이 역사를 주무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자신들이 이 역사를 세워간다고 큰소리 치는 이 세상의 권력자들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결국 허사를 경영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권력은 허무한 것이요 결코 부러워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결국 그들이 큰소리 치며 행하는 것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26) 애굽의 바로로부터 성경의 역사 속에 하나님을 대적했던 권력자들의 마지막을 참으로 가련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이 ‘주와 그리스도를 대적’ 해 보지만 결과적으로 손해나고 박살이 나는 것은 자신들 뿐이었다.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눅20:17~18)
가장 구체적이면서 비극적인 이 역사 속의 모델의 주인공들이 바로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27)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 속에 오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을 당하심에 있어서 그것이 역사적인 사실이었다는 것을 오고 오는 역사 속에 증거할 비극의 인물이요 증인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
사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에 내려 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다는 사실이 증명이 되는데 기여한다는 말이다. 이왕에 이 역사 속에서 복된 주인공으로 남을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울까!
그러나 사람들은 권력과 영광을 탐하다가 격국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처럼 남는 예는 수없이 많다. 여러분 모두는 요셉과 마리아처럼 구원의 역사에 쓰임을 받는 믿음의 인물로 남는 모두가 되시기를 … 그러려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요셉과 마리아의 삶에서 배우면 된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28) 안타깝게도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같은 시대에 같은 나라에 같은 성품으로 모여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는 꼭 같은 하나님의 역사이지만 이 사도들과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그 하나님의 예정하시고 이루신 구원을 또 다시 수많은 역사 속에 전하고 이루기 위해 핍박과 환란을 무릅쓰고 그 곳에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를 올리고 있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그들의 희생과 고백으로 또한 우리가 오늘 하나님을 예배 하는 자리에 있음을 같은 감사로 찬양할 수 있다.
이 흐르는 역사에는 언제나 빛과 어두움이 함께 간다. 많은 수의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르는 세력이 사람의 눈에 보기에는 힘있는 강물처럼 이 역사를 끌어안고 흘러 가는 것 같지만, 다른 한편에는 사람에 눈에는 연약해 보이는 것 같고 미약해 보이지만 강하고 분명한 빛을 좇아가는 작은 무리의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있다.
과연 이 역사는 누구에 의해서 움직이고 주도될까? 바로 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부딪히고 깨어지면서도 좁은 문을 찾아 가는 소수의 하늘에 속한 사람들에 의하여 역사는 만들어 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어 맡기고 그냥 떠밀려가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 의해서 역사에 쓰여져 가고 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하면 이 역사는 분명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주도하시고 최종적인 목적지로 이끄실 것이기 때문에(History) 아무리 어떤 권력자가 큰 소리를 친다고 해도 이 역사는 분명히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에 의해서 오메가 포인트를 향하여 가고 있고, 최종적으로 이 역사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마지막 승자는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줄 사람들이다.
결국 세상의 물질이든 권력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확신을 가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이런 가치 속에서 산다면 조금 억울해도 견딜만하고, 슬퍼도 참을만하고, 없어도 기대할만하고, 늦어도 기다릴만하다.
비록 오늘 본문에서는 부정적으로 쓰였지만 즉,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28) 오늘도 우리는 어느 곳에 있든지 이런 역사관과 가치의식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오늘도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28) 라는 말씀을 믿음으로 고백을 드릴 수 있는 …
그럴 때 어느 땐가 이 땅에 다시 영광으로 오실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주님의 듯을 담고 흐르고 만약 내(우리)가 빛의 편에서 이 역사를 이끌어가는 도구역할을 한다면 현실의 보이는 조건에 상관없이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Ⅲ.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 질 뿐이다.(29~31)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드리는 기도는 보다 진지하고 거룩한 뜻을 이루게 해 달라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29f) 비록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 지겠지만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던 그들은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는 것을 굽어 살펴 달라고 또 다시 잡혀갈지 모르는 위기의 상황을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있다.
그러나 연이어지는 기도는 역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달라는 의를 구하고 있다. “…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29b) 상황이야 어떠하든지 위협을 당하든 죽임을 당하든지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달라는 고백으로 자신들이 구원을 이루는데 적절한 도구로 쓰임 받게 해달라는 요청이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30) 우리는 성전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이 지체장애자의 치유와 그 결과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계속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본다.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3: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3:16)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12)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30)
언제나 끊임없이 우리가 높여야 할 이름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도 우리가 돌려 드릴 영광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영광을 취하신다. 아무리 경건한 하나님의 종도 자신의 이름으로 기도 드려야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만이 유효한 기도이다. 믿습니까?
또 이 역사에 믿음으로 이루어질 모든 권능과 영광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자신의 이름들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여지기 위하여 “손을 내밀어 ②병을 낫게 하옵시고 ③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30) 라고 오직 한 목소리로 기도한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31) 함께 기도하던 모든 무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성령의 충만의 결과는 저들이 기도하며 바랬던 것처럼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
사도행전 속에서 성령의 충만은 언제나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처음 승천하시기 전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약속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성령으로 이적을 나타내건 병이 낳던 모든 결과는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는 것으로 결과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은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전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육신으로 계실 때에도 이런 사실들을 증거하신바 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10:16) 우리모두는 우리의 결심과 의지보다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만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할 수 있고 그럴 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요6:40f)
하나님의 백성들은 핍박을 당한즉 마음을 모두어 기도하게 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그것이 부귀든지 권력이든지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들 뿐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이든지 하나님의 백성이든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인 인류 구원을 위해서만 존재하며 그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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