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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5:1~11 2008-05-04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가정의 달이라고 하는 이 5월의 첫 주에 비극적인 모델의 가정을 다루게 됨이 안타깝지만, 부정적인 이 말씀도 어쩌면 가정이 첫째로는 하나님께 진실해야 할 것을 소극적인 측면에서 교훈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인류는 가정으로 시작하였고 그 가정 속에서 가장 중요한 자세가 진실이 바탕 되지 않으면 어떤 가정이든지 무너질까 염려해야 함을 가르친다.

가정은 하나님께 진실하고 夫婦 상호간에 진실하고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도 진실이 바탕이 되어야만 한다. 부부 서로간에, 자식이 부모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형제 상호간에도 진실은 바탕이 되어야 가정은 튼튼히 서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가정의 비극은 서로를 향하여 진실치 못하다는 안타까운 비극을 생각하면서 가정의 바른 회복은 진실에서부터 라는 사실을 역시 배우는 것이다.

오순절 날 이 땅에 탄생된 교회는 수많은 권능과 이적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반대자들에게 잡혀 다니고 끌려 다니는 수모를 감당해야만 했고 이것은 어쩌면 주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계실 때도 그러셨던 모습의 연장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간적으로 수모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진리를 전하는 사도들과 교회에 놀라운 위엄과 권세를 더하시는 모습으로 여전히 경외감을 갖게 하시는 사건이 바로 오늘 읽은 내용이다.

이미 2:44~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라는 기록과 그리고 4장 말미에서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34~35)는 기록과 함께 바나바라는 충성된 하나님의 일꾼의 물질의 헌신을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37)는 모습을 우리는 보아왔다.

이러한 대부분 헌신의 분위기를 가진 신앙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서 신앙적 깊이를 갖지 못한 사람들조차도 그런 분위기로 인하여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고 깊은 믿음을 갖지 못하면서도 분위기 때문에 자신들도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판단된 사람들의 대표적인 모습을 오늘 이 본문에 기록함으로써 사도들과 교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거듭나지 못했으면서도 체면과 위신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두려운 경종을 울리시는 내용을 오를 우리는 접하게 되면서 오늘 우리들의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희생을 점검하게 한다.

어찌 보면 이 부부는 하나님께 밭을 팔아 바치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육신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오히려 자신의 것을 드리려고 하다가 시험을 받아서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겪고 있다.

에덴에서 범죄한 후에 연속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주신 은혜를 오히려 폄하(貶下)하면서 하나님께 변명하던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비록 내용은 다르지만 초대 교회에서도 본다.



Ⅰ.드림에도 사탄은 개입할 수 있다.(1~4, 6)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이 가정은 그 이름에서 나타나는 대로는 더할 데 없는 가정이었다. “아나니아(여호와의 은총)” 구약에서[히, 하나냐(chananya), 대상, 느, 렘, 단-29회]는 “하나냐” 라는 명칭으로 기록되고 있고, 물론 신약성경 중에서 이 사도행전에서만 10회나 나타나는 이름이다. “삽비라[헬, 사프페이로스(sappheiros), 청옥, 아름답다]” 역시 구약성경[히, 사삐르(sappeer)]에서 온 이름이다. 결국 이들은 이름 값을 못하고 죽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1~2) 그들은 함께 팔았고 이들은 함께 얼마를 감추면서도 그것을 자신들만의 비밀이라고 확신했던 것에서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저지르는 잘못은 우리의 영혼을 무디게 하는 마귀 사탄의 간교한 역할 때문이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도 자신이 온 인류를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당하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베드로는 “…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즉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왕이 되시고 자신들은 각각 각료의 자리를 차지 하리라는 육신적 영광이 도망갈까 봐 안타까워하는 베드로를 향하여 “…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라고 견책하시는 것을 경험한 베드로는 이제 같은 유혹을 받고 있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같은 책망을 하고 있다.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3)

우리 마음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사단이 마음에 가득하게 됨을 책망하고 있다. 결국 사단이 가득하여 자신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성령을 속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면서 그 일을 대담하게 행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 최초의 이스라엘 왕이었던 사울에게서 이를 볼 수 있는데 사무엘은 이를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삼상16:14)고 기록하고 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4)

다른 사람이 땅을 팔아서 하나님께 바치라고 한 것도 아니었고 또 그 땅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땅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대로 팔 수 있었음에도 돈이 손에 들어오자 다른 생각이 이들에게 들었던 것이다.

‘뭐 사람들이 내 땅 판 값도 모를 것이고, 또 이것을 다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바쳐 버리면 장차 우리는 어떻게 살까! 그래 이 중에서 우리 살 도리는 하고 드려도 드리자!’ 그래서 사실 물질 앞에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신앙의 사람이다. 문제는 팔 때는 다 드리리라고 생각하고 판 것이 돈을 받고 보니까 마음에 다른 생각을 품게 된 것 같다.

언제나 사람들은 마음에 꿈꾸던 일을 실천에 옮기게 되기 때문에 마음의 경영을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시도록 맡겨드려야 한다.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처음 생각을 타협 없이 행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주시는 처음 생각을 짓밟아 버리고 자신의 욕심을 앞세우게 되는 성령의 의지를 꺾는 것은 하나님께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라고 주님께서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12:31)

그러므로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문제는 돈을 적게 바친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결코 액수의 적고 많음을 가지고 그들을 다루는 이 시대의 정치가들과 같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사실 주님은 연보궤에 두 렙돈의 헌금을 넣는 가난한 과부를 보시고 “…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를 넣었느니라” (눅21:2~4)고 칭찬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물론 칭찬의 이유는 ‘생활비 전부’를 드림이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 드림에 있어서 온전히 드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스러기에 만족하실 수 없으신 분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장 귀한 것들을 아낌없이 주셨기 때문에 그 은혜를 받은 우리들도 그와 같이 온전히 드리기를 기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독생자[헬, 모노게네스(monogenes,) 독생한, 유일한]”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 온전한 희생 제물로 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와 같이 온전히 드릴 것을 기대하신다.

오늘도 우리는 물질이든 시간이든 무엇을 하나님께 드리든지 타협 없이 주님께서 주시는 처음 생각 그대로를 드림으로 이왕에 드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



Ⅱ.함께 주님의 영을 속이려 한 것이 비극이었다.(7~11)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이 부분은 우리에게 많은 부분을 생각하게 한다. ‘이제 아나니아 부부도 자신들의 밭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라는 칭찬을 기대하고 온 것인지, 밭을 판 값의 얼마를 사도들에게 주러 간 남편이 오지 않아서 기다리다가 궁금해서 가 본 것인지 … 여러 가지 짐작을 하게 하는 분분이다.

삽비라는 안타깝게도 자신과 남편이 얼마나 어리석은 즉, 죽을 정도로 어리석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데서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라는 표현이 계속될 비극의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하나님의 사도들을 움직이고 다스리시는 성령의 역사를 그같이 많이 봐왔으면서도 자신들이 그 성령을 속일 수 있을 것이라는 어리석음 자체가 마귀의 지혜일 뿐이다.

만약에 여기에서라도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8)는 베드로의 질문 앞에서 진실할 수 있었다면 좀 전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남편과 같이 묻히는 비극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이름만 아름다운 여인은 “예 이뿐이로라”는 사탄이 주는 속임에 결국 황천(黃泉)길을 가고 만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9)는 책망으로 볼 때 이러한 행동은 결국 하나님의 성령을 시험하는 악한 행위임을 말하고 있다. 특히 눈여겨 봐야 할 말씀이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헬, 쉼포네오(symphoneo), 조화되다, 일치하다, 동의하다, 합심하다]’ 라는 내용이다. [18~19장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처럼 하나님의 일에 합심한다면 얼마나 귀할 까]

결국 저들 부부는 하나님의 성령을 시험하는 일에 조화되고, 합심하였다는 사실이다. 왜 좋은 일에 아름다운 일에 하나되고 일치되지 못할까! 罪性의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며 산다고 하면서도 자칫하면 이 부부처럼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데 동화되기 쉬운 우리 사람들이기 때문에 경성하고 깨어서 늘 주님을 의지할 필요가 있다.

이름처럼 마음이 아름답지 못했던 이 여인에게 결국 “…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9)는 불호령이 떨어지고 만다. 이 가련한 여인과 남편은 결국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데 죄를 지으므로 길이길이 남아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교훈을 줄 비극에 운명을 마치고 만다.

아직은 죽을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처음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던 마음을 짓누르고 아까운 생각에 얼마만을 드린 어리석음이 그녀와 함께 그 일을 주도했던 남편과 더불어 그대로 무덤에 묻히고 마는 마지막을 본다.

그렇다면 우리가 얼마나 두려워해야 하겠는가! 우리는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보다 나은가! 결코 그렇지 못함에도 아직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은혜요 회계할 때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인내임을 감사하며 온 마음과 온 뜻과 정성을 다하여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고 늘 하나님을 의식하여 신앙하는 …

그럼에도 이 사건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셨음을 이 두 사람의 마무리에서 깨닫게 된다. 이 두 사람은 함께 꾀하여 하나님의 성령을 시험한 이왕에 악한 사탄의 도구였지만, 후대에 오고 오는 세대에서 결코 이 부부와 같은 사람이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여기서 배우는 것이 다음의 말씀이다.



Ⅲ.이 사건은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5, 11)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구약에 이와 꼭 같은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다름 아닌 여호수아 6~7장에 나오는 아간의 이야기였다. 그 사건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시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가나안 최초의 성인 여리고에 대하여는 첫 것이기 때문에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수6:17~19)고 명령하셨다.

그럼에도 아간은 하나님께 이미 바친 물건을 탐하여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수7:21)고 이 일로 그 강력한 여리고를 별로 힘쓰지 않고 물리친 이스라엘은 조그만 한 아이 성 앞에서 폐하고 이일 때문에 여호수아는 오히려 하나님께 탄식하며 엎드린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수7:10~11)고 경고하신다.

그리고 이 아간의 범죄를 아골 골짜기로 가서 징벌하고야 다시 가나안 정복에 전진할 수 있었다면 새 언약의 교회탄생과 함께 이 아나아와 삽비라 사건은 아간의 사건에 지지 않은 귀중한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다.

그리고 나중 이 아간의 사건을 평가하여 이르기를 “세라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에 대하여 범죄하므로 이스라엘 온 회중에 진노가 임하지 아니하였었느냐 그 죄악으로 망한 자가 그 사람뿐이 아니었느니라”(수22:20)고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왕에 악한 범죄자들을 통하여 이 역사 속에 수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려는 것이 목적이다. 마치 음란하고 혼란한 고린도 교회를 통하여 이 역사 속의 수많은 교회들을 교훈하시는 것과 같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5, 11)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당한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즉,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을 접하면서 참으로 하나님 두려워해야 할 분인 줄 알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징벌하신 하나님께서 이 역사의 마지막까지 살아 계시기 때문에 교회 속에서 같은 죄를 범하는 즉, 사탄과 더불어 주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주님의 성령을 속이려 한다면 여전히 같은 처지가 될 수 밖에 없음을 엄밀히 경고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께 드리려 할 때 우리는 또한 수많은 유혹을 받는다. ‘너는 그만큼 드릴 필요가 없어 다른 사람들은 너보다 나아도 그만큼 드리지 않는데 뭘 그렇게 많이 드리겠다고 하느냐!’ 이런 생각을 분명 성령의 생각은 아니다.

이렇게 많은 시험은 하나님께 드리려는 헌신에서 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적극적이지 못한 사람은 사실 시험도 적다고 말할 수 있는 데서 헌신에는 시험도 많음을 감안해야만 한다.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께 드리려고 할 때도 마귀는 틈탈 수 있음을 각오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부부간이든 친구간이든 선한 일에 함께 하도록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을 함께 꾀하는 것은 분명 악한 것이며 주님의 성령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인간적인 고민이나 어려움도 하나님과 더불어 답을 얻기 위하여 늘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는 긴장으로 깨어있는 신앙의 자세를 놓지 지 말아야 한다.

결국 오늘 우리의 범죄도 아나니아나 삽비라, 그리고 아간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혼란과 고통을 줄 수 있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경계가 되겠지만 당사자인 자신에게는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갈라디아서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절대로 없인 여김을 받으실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거역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고 이러한 행동은 죽어 마땅하다는 두려운 경고가 오늘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주님께서 귀한 십자가의 구속의 역사를 앞에 두고도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기를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26:41; 막14:38; 눅22:40)고 말씀 하셨듯이 오늘도 우리에게 같은 당부를 주고 계시는 것이다. 특히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드리려고 한다면 더욱 기도하고 성령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