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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계속해서 사도행전을 상고하고 있다. 교회의 탄생과 성령의 역사와 함께 역동적으로 땅끝을 향하여 복음을 들고 진행하는 오늘 우리 교회의 출발에서부터 처음 확산되는 예루살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지난 시간에는 주님께 연보를 드리려고 하면서도 온전히 드리지 못하여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인 부부를 봤습니다. 특히 지난 수요일 날 열왕기하의 마지막 장인 25장을 공부하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물질의 가치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달라진다는 귀중한 교훈을 나누었다.
세계만민이 부러워하고 존귀하게 여겼던 솔로몬 성전의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들이 결국 유다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는 가치를 잃게 되어 이방군대의 노획물이 되어서 바벨론의 이방신전에 들여지는 비극의 역사를 살피면서 그때나 이때나 이러한 원리는 다르지 않다는 교훈을 생각했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작고 가치가 덜한 모든 것들을 보배로 만들 수 있지만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는 아무리 귀중한 보화도 돌덩이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생각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376:4 “금보다 귀한 믿음은 참 보배 되도다, 이 진리 믿는 사람들 다 복을 받겠네” 라고 찬송하는 것은 대단히 실제적임을 깨달을 수 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2:26) 라는 경험을 고백하는 것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의 가치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바르게 지속하느냐에 따라 가치를 달리한다는 사실을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의 교훈에서 더욱 확신했으면 해서 이 말씀을 드린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새언약의 공동체를 통한 인류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려는 계획을 위하여 하나님의 성령을 속이는 즉, 거짓이 함께 할 수 없음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징벌하심으로 나타내셨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비록 길지는 않지만 사도들이 하나님의 쓰시는 일꾼들이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나타내시기 위하여 이들을 통한 표적과 기사를 통하여 드러내시고 이들의 신실한 헌신을 통하여 믿음의 공동체는 점점 수를 더해가는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내용이 오늘 우리가 다루고 있는 말씀의 내용이다.
외부적인 핍박의 시험과 내부적으로는 거짓이 싹틀 수 있는 어두움의 역사를 근원부터 제거하시기는 하지만 만약에 이들의 모습이 이 어려움 앞에서 우왕좌왕했다면 하나님의 교회는 시작부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었겠지만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라는 단결된 모습은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주님의 교회를 이끌어 가게 했다.
아니 다른 방향에서 이해를 한다면 사도들로 통하여 나타난 표적과 기사가 이들의 믿음을 하나로 묶는 도구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표적과 기사를 통하여 “내가 이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더욱 강하게 나타내셨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세상의 권력과 영광이 너희들을 짓누를지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들과 함께 하는 이상, 이 역사 속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도 결코 내 뜻을 이루려는 너희를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라는 보이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이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적을 통해서 뵐 수가 있다.
이 약속은 2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다르지 않다. 아니 이 역사의 종말까지도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어떤 조건에서든지 하나님의 뜻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려는 것에 도전하는 것들은 깨어지고 무너질 것이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1~32)고 바울은 확신하였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5~39)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확신은 아무나 다 가질 수 있는 고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 있는 자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그리스도의 피에 씻김을 받은 하늘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확신이다.
Ⅰ.표적과 기사를 많이 주심으로서 사도들에게 권위를 더하셨다.(12~13)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살아계심을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라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셨던 동일한 표적과 기사들을 나타내도록 허락하셨다.
사도들의 [손, 헬, 케이르(cheir) 힘, 수단, 도구]으로 라는 말의 보다 분명한 원문의 의미는 사도들을 ‘도구’로 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역사 속에 모든 것을 두구로 죄의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런 입장에서 오늘 우리들도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복음의 도구들이라고 할 수 있고 영광의 주님에 의한 구원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여기 [민간에, 헬, 라오스(laos) a.국가족속 b.무리 c.백성 d.하나님의 사람들-특권계층을 제외한 사람들]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라는 의미도 지나칠 수 없다. 표적과 기사가 그 가치를 가지는 것은 불신의 사람들에게서는 단순한 ‘마술’과 같이 신기함에서 끝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구원의 능력으로 인정되고 믿음을 가지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을 도구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는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서 마음을 같이 할 수 있게 하였고, 그러한 감격은 당연히 핍박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핍박 자들이 지배하는 성전 안에 모이기를 힘쓰게 했던 것이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향하여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고 당부하고 있다. 오늘도 믿음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진리로 하나되게 하는 것에 집중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13) 그 [나머지는, 헬, 로이포이(loipoi) 남은 사람들, 다른 남아있는 사람, 남는 자, 잔여, 나머지] 당연히 함께 마음을 같이 할 수 없는 사람들로 이들의 믿음에 동조할 수 없는 불신의 사람들과 그들을 박해하고 거역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상종할, 헬, 콜라오(kollao) ‘아교’에서 유래, 굳게 붙이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원리이다.
적어도 하나님께 붙어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끈끈한 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 나머지의 사람들은 그들과 조화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결속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떨어질 수 밖에 없고 물과 기름처럼 서로 겉도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13) 이런 부조화에도 불구하고 백성들로부터는 칭찬을 듣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때로는 따돌림을 당하고 오해를 받을지라도 시간이 가면 반드시 좋은 평판을 들을 것이고 이 땅에서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나중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기대하면서, 크게 하나님께 누가 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평가에 너무 예민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다.
어찌 보면 의롭고 선함에도 불구하고 모함 당하는 사도들에게 하나님은 이적과 기사를 통하여 권능을 회복시키시고 죄악 된 세상의 권력가들은 그들과 함께 하지 않을지라도 백성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일은 2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히브리서기자의 당부의 말씀처럼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3~25)
Ⅱ.힘겨운 상황에서도 믿음의 사람들이 더해졌다.(1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더해지는 것은 절대로 거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좋은 교회당이니까 자연히 더해지겠지!” 라는 짐작은 옳지 않다. 오순절에 이 땅에 세워진 교회가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2:41)거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4:4) 또는 오늘 본문에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14)고 불어나는 것은 절대로 우연이나 자연이 아님을 알아야만 한다.
이러한 성장 앞뒤에는 분명히 감당할 수 없는 핍박과 시련과 고통이 함께 얽혀 있음을 읽을 수 있어야만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건전한 교회의 성장은 오히려 교회가 시련과 핍박 속에 있을 때였음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신앙의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면 사람들은 교회에 더해질 것 같지 않은데, 오히려 이련 시련 속의 교회가 더욱 담대하고 단련되고 하나님께서 그런 교회에 오히려 믿는 사람들을 더해주시는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여전히 풀어낼 수 없는 수수께기 임을 역사 속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 라는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히려 AD 313년에 박해가 중지되고 사람들이 봇물처럼 교회에 들이닥쳤지만 그러한 성장은 진정한 교회의 성장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되는 것을 교훈으로 배우면서 교회의 성장을 다르게 이해하게 된다.
이 말씀을 바로 앞절의 말씀과 같이 이해하면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13~14)고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 어찌 보면 사람들로부터 상종도 안하고 따돌림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또 다른 사람들은 칭송하고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은 교회의 큰 성장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의 성결과 경건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때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교회 속에 더하시는 은혜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우리가 죄를 밥 먹듯 하는 사람들로부터는 완전히 외면을 받는데 까지 구별된 삶의 모습을 회복하고 그들로부터 오히려 완전히 거절을 당하고 대적을 받을 때까지 하나님 편에 완전히 붙어야 바른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각오는 이 세상이 소돔처럼 어두워가는 이 역사의 말미에서 각오하는, 그렇게 사람들로부터는 버림을 당하는데 까지 손해와 멸시를 감당하는 교회를 회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리스도의 신부된 거룩한 공동체에 자기 백성을 더하실 줄 믿는 …
Ⅲ.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다 낳음을 주셨다.(15~16)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듦을 당하는 전혀 세상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교회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치료의 손길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 세상과 손을 잡은 순결치 못한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의 표적과 기적을 감당할 수 없고 위조된 기적을 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적은 무조건 좋아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4~15) 하였고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9~12)
그렇기 때문에 표적과 기적이 있다고 하면 무조건 마을을 맡기지 마십시오. ‘표적과 기적’은 거짓일 수도 있다.(그런데도 그런 것을 경계하는 이런 가르침은 그렇게 행복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증거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4)
이 초대교회의 기적은 사도들과는 상관도 없을 정도로 흔했다.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15) 베드로와는 전혀 관계도 없음을 읽을 수 있다.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나중 아시아에서 바울에게서도 마찬가지였음을 읽게 되는데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행19:11~12) 이런 기록들은 사도들의 지식이나 인격과는 전혀 관계없는 역사였음을 보게 되고, 이래서 치료는 각자의 믿음대로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가지 신기한 일은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16) 약한 부분들을 가진 예루살렘 부근의 수를 셀 수 없는 사람들이 다 데리고 와서 한결 같이 다 치료를 받았다는 기록을 본다.(이 장면을 상상하면 참으로 진기한 상황이 떠오른다.)
땅끝을 향하여 나아가는 복음은 바로 성령이 임하여 권능이 함께 할 때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했고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맛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주님의 복음이 무엇인지도 논리적으로 몰랐지만 이러한 표적과 기사를 보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다면 오늘의 이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기록된 말씀으로 明明白白하게 알게 됨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나아오기 어려운 것은 어두움의 영들의 활동이 그만큼 왕성하기 때문일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경계를 주고 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5:8~9)
하나님은 자신의 권력이나 재산을 의지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들에게 표적과 기사를 많이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의 뜻에 자신들의 삶을 맡기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큰 은총과 상급이었다. 또 표적과 기적을 행한다고 하는 것 때문에 자신들을 내세우지 않으므로 믿는 사람들은 다 마음을 같이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 안의 결속과는 다르게 주님을 반대하는 자들은 그들과 얼굴을 마주 대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것은 어쩌면 빛과 어두움의 부조화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이권과 관계없는 힘이 없는 국민들은 그들의 의로움을 칭찬할 수 있었고, 이러한 빛과 어두움 사이에서 자신들의 허물을 깨달은 남녀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인간의 영육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목격한 사람들은 그 은혜에 자신들의 온갖 고통들을 맡기기 위해서 모든 병든 자들을 거리에 메고 나가서 하나님의 사람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여서 고침 받기를 하나님께 바랬고 그들의 믿음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되어 질병을 비롯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큰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
오늘 우리가 같은 은혜를 기대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역시 같은 신앙의 모습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는 분명해졌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주변에서 영원의 멸망으로 떠내려 가는 죄의 온갖 저주에서 사람들을 치료하시고 구원하시는 표적 중에 표적 기사 중에 기사를 미약한 우리를 통하여 일으키신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의지하려고 주님께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절망적인 인생을 고치시고 영육의 치료와 복으로 함께 하시는 주님이심을 감사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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