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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는 장소도 그렇지만 말씀도 사도행전을 떠나 다른 곳을 상고하고 오늘 또다시 돌아왔다.
진리의 공동체인 교회에 어두움이 틈타고 하나님의 성령은 이것을 강하게 징계하고 말씀을 가진 사도들은 더욱 권능을 힘입지만 그렇다고 교회의 핍박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교훈으로 나아가고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믿는 자들은 점점 수를 더하지만 그것을 결코 기뻐할 수 없는 산헤드린 공회를 비롯한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 그리고 서기관들조차도 위기의식을 느끼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에게서 일탈되는 사람들을 막아보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함을 오늘 본문에서도 본다.
빛의 백성들이 많아지는 것을 싫어하는 부류는 누구겠는가? 당연히 어두움의 하수인들일 것이고 이러한 양상은 벌써 2천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을 것이다. 진리가 확산되고 어두움의 백성들이 빛을 향해서 생명의 눈을 뜨는 것을 어두움의 하수인들은 결코 견딜 수 없는 위기감일 것이다.
그러나 반대적인 측면에서 생명의 진리는 반드시 확산될 수 밖에 없고 생명의 역사로 결실할 뿐만 아니라 흥왕하여 더하는 것은 자연적인 생명의 능력의 당연한 역사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진행하는 이 사도행전의 말씀 말씀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12:24)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19:20)는 기록을 보게 된다.
복음 증거는 인간의 권세와 수완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시기 때문에 말씀과 성령이 역사 하는 곳에마다 빛의 역사는 나타나고 생명의 진리에 눈을 뜨는 사람들은 더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빛의 역사는 언제나 핍박과 반대에 부딪히지만 그럴수록 강해지는 것 또한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교회의 확산을 보면서 다급해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시기와 질투심으로 사도들을 강제로 옥에 가두지만 하나님은 이 사도들의 가둠이 곧 복음의 가두어 둠이 되기 때문에 천사를 통해서 풀어주면서 생명의 말씀 즉, 복음을 증거하라는 당부와 함께 성전으로 이끌어 백성들을 진리로 가르치게 한다.
결국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삶을 맡기면 그 생명의 복음 때문에 이적을 맛보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사용될 수 있음을 보는 것이다. 이런 권능이 사도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땅끝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성령의 권능의 역사를 그대로 이루시는 것이다.(1:8)
보잘것없는 갈릴리 어부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을 드렸을 때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가 되어 오늘 우리들까지 부러운 대상이 될 수 있다면, 이 시대의 우리도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롬16:7) 라는 고백을 하고 있다.
이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위하여 갇히는 데까지 헌신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성경에까지 이름이 남는 사람들이 되었다. 사람들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가기를 원지만, 주님의 복음의 진리에 헌신하고 충성함으로 하나님의 나라 복음 속에 교회 속에 유명한 이름으로 남는 …
Ⅰ.어떤 이유에서든지 말씀은 매일 수 없다.(17~21)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에 관한 십자가의 복음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리게 된 사실에 대하여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인물들은 다름아닌 성전을 기득권의 터전으로 삼았던 대제사장그룹인 사두개인들이었다.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는데, 진리가 왕성하고 확산된다면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없는 대상은 당연히 어두움의 세력들일 것이다.
거룩하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모든 사건들이나 형편을 언제나 자신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대처하려고 한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소화하고 이해해야 하는 사람들이다.[이런 차이가 사실 영적(靈的)이냐 육적(肉的)이냐를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결국 저들 사두개인들은 당시에 실제적인 권세를 가졌기 때문에 사도들을 옥에 가두는 것으로 복음의 확산을 막아보려고 하지만 운명적인 복음의 확산은 결코 인간의 권력이 막을 수 없었다.
비록 저들은 사도들을 가둘 수는 있었지만 복음은 가둘 수 없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2:9)
베드로 사도의 고백처럼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5) 한 것처럼 세세토록 땅끝으로 복음은 확산 되어야 했기 때문에 주님은 이 일에 천사들을 직접 동원한다.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19~20) 우리는 이런 부분을 사실 인간적으로 부러워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를 오늘 우리가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탄생시킨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적어도 1세기에는 이런 일들을 자주 허락하셨지만(12:7~10) 나중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고 증거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는 사도들의 모습이다.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21f) 물론 나중에 위협을 받으면서도 그렇게 했지만 사도들은 자신들의 신상의 위협이나 두려움에도 철저하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을 본다.
자신들이 사도들을 옥에 가두었기 때문에 감옥에 그대로 갇혀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저들은 다시 산헤드린 공회를 모아서 전체 의회 앞에서 저들을 위협하고자 불러낸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21b)
꼭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이들은 왜 복음증거를 방해하는 쪽에 서야 했을까? 그들은 하나님보다는 자신들의 영광을 더 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의 가진 영적인 기득권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복음이 가려졌던 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증거하기를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3~4) 이 말씀은 우리가 복음을 즐거워하고 누리고 증거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격이요, 찬양의 이유가 되기에 충분하다.
나중에 바울이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 입성해서 복음을 전할 때는 이러한 제한은 풀림을 보게 된다.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28:31)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아니면 또 다른 사람들을 사용하실 것이다. 그럼으로 매일(tied) 수 없는 복음의 도구로 자신을 기꺼이 드리는 복된 복음의 도구로 사는 …
Ⅱ.언제든지 성전은 복음의 출발지였다.(22~26)
“관속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말하여, 가로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사람이 와서 고하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성전 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가서 저희를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러라”
이미 앞에서 감옥에 갇힌 사도들을 천사를 통하여 풀어주시면서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20) 했고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21f) 라는 말씀과 순종의 조화를 봤다. 나중에 16장에서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 갇힌 것 때문에 간수의 가족에게 오히려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바울의 마지막에는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빌1:12~13)라고 로마의 감옥에서 황제 숭배 정신적으로 단단히 무장된 시위대들을 자신이 함께 묶인 것 때문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은혜와 능력으로 역사됨을 본다.
자신들이 감옥에 가둬둔 사도들을 끌어 오도록 사람을 보냈지만 사도들을 잡으러 성전에 갔던 관속들은 보고하기를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23) 진리를 거역하는 인간들은 아무리 간교하게 대항을 해도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뒷북을 치는 꼴이 됨을 본다.
이 사실 앞에서 사색이 된 사람들은 다름아닌 사두개인들이었다.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24) 두려워하게 되지만 이들에게 날아온 소식은 저들을 더욱 놀라게 하는 내용이었다.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25)
결국 하나님은 순종을 시험키 위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게 했던 모리아 산, 다윗이 교만하여 인구를 계수하게 해서 10만 명 가까운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죽을 때 하나님께 용서를 빌면서 제사 드린 아라우나(오르난)의 타작마당이자 솔로몬이 건축했던 여호와의 전(대하3:1)인 성전은 하나님의 정하심과 인정하신 사죄의 장소로 하나님과 인간의 평화를 이루는 곳(예루살렘)이었고 그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인간 구원의 복음의 출발지가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1:8) 신 약속의 출발지가 예루살렘 성전이었고 교회가 최초의 원형을 회복하기 위한 모델도 바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탄생한 교회임을 앞에서도 나눈바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이 역사의 말미에 새롭게 이해한다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마음을 성전삼고 계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각자가 자신의 중심을 복음의 출발지로 사용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교훈이기도 하다.
오늘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는 나의 마음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성령님의 강권하심인가? 아니면 오히려 그 성령을 거역하고 나의 영광과 안녕만을 위해서 사두개인들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거역할 것인가가 사도들과 사두개인들 만큼이나 큰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강력하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이 도전에 감사로 응답하는 …
비록 미워하는 대상이었지만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던 저들을 “성전 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가서 저희를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러라”(26)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을 백성들이 신뢰했고 이런 이유에서 육신적으로도 보호받게 됨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는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보는 것이다.
Ⅲ.어떤 형편에서든지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27~32)
“저희를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사도들은 이스라엘의 최고의 권력자들 앞에 청문회를 당하는 꼴이 되었다. 질문을 하는 자는 당시의 실세였던 대제사장이었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28-이렇게 말하는 말투는 과연 어떤 투였을까?) 이런 책망을 들을 수 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복된 모습인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복음에 헌신하고 그 결과는 그들의 반대자들을 통해서 고백되어지기를 복음이 온 예루살렘에 가득하다.
이런 결과는 바로 사람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것은 주님이 일찍이 산상보훈에서 복 있다고 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사도들은 아마도 이 말씀을 떠올리면서 기뻐했을 것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5:10~12) 아멘!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29) 어쩌면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그리고 역사 속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지체 장애자를 고친 일을 가지고 힐난하는 산헤드린 공회를 향하여 이미 선포한 바 있는 내용과 같다. “…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
우리는 늘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입장에서 바울은 대단히 단호하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가? 또 말씀을 대언하는 제가 어떠하기를 기대하는가? 우리는 양쪽을 다 만족시킬 수 없을 때는 언제나 하나님 편에 서야만 한다. 그래야 최종적으로는 사람들도 기쁘게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믿습니까?
물론 신앙의 사람은 나와 남의 기쁨을 구하려 할 때도 자신의 유익을 찾기 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찾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는 바울의 당부를 보면 역시 자신을 모범으로 소개하면서 사람들로 구원 얻을 수 있는 것에 목표를 두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비단 갈라디아 교회만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칭찬 듣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서도 같은 고백을 하고 있다.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2:4)
이것은 형편이 좋고 평안한 상황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의 기라성 같은 권력과 금력, 그리고 명예 앞에서도 그럴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사도들은 자신들을 심문하는 권력자들을 향하여서도 같은 복음을 전하고 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29b~32) 바로 복음의 핵심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자신들을 심문하든 위협하든 사도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변명도 아니고 협박도 아니고 복음뿐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이 조상 때부터 예언되어 왔던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우편에 오르신 왕 중 왕이요 모든 사람의 회개를 기다리시고 계시며 자신들과 성령께서 이 일을 위해서 있노라는 분명한 구속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다 자신들의 이권에서 판단하고 제판하는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들인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중에서, 그래도 이들 중에 신앙을 아닐지라도 최소한의 양심적인 한 사람인 바리새인으로 율법교사인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을 다음 주에는 만나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은 막힐 수 없다. 아니 역사 속에 이런 시도를 한 사람들을 더러 보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의지를 가로 막는데 성공한 예는 없었고(볼떼르) 그 증거가 바로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 복음이 왔고 그 복음으로 인하여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호흡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증거이다.
사람의 판단으로 보기에는 구약의 무의미해 보이는 듯 한 약속과 예언들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도 헛되게 하지 않으시고 이루셔서 예루살렘의 성전이 복음의 출발지가 되게 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의 마음의 성전도 온전한 순종과 헌신을 드림으로 마찬가지의 귀중한 역할을 해야 함을 깨닫는다.
어떤 조건이나 사람들에 상관 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순종하며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짐짓 사람을 먼저, 하나님은 다음에 라는 생각은 대단히 어리석은 것이고 미련한 것이다. 형편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순종하고 만족하게 해드리는 것이 최종적으로는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비결임을 확신하고 혼란 없이 주님께 순종의 기쁨을 드리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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