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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은 당연히 할 말을 했을 뿐이고 그들의 이권이나 지위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도 산헤들인 공회는 잔잔하게 웃고 있는 사도들에게 크게 분노하고 ‘없이하고자’ 하는 것으로 봐서 사람들 몰래 모두 죽일 작정까지도 했던 것 같다.
이런 일이 여기서 끝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한 때 그들의 동료였던 사울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순종할 때도 이런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저희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여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23:21)
어느 사회나 막가는 것 같아도 그 곳에 살아있는 양심은 있고, 그것이 당연함에도 사회가 죄로 인하여 기준 이하의 모습이 되기 때문에 기준만 행해도 드러나는 것은 이 죄악의 역사에 언제나 있어온 모습이다.
아무 이유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핍박하고 위협하기 위해 모인 이 무리 중에도 아직 양심이 어느정도 제 역할을 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본문의 표현대로 ‘교법사’로 오늘 우리가 쉽게 이해 하자면 율법교사로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의 인품을 성령과 누가는 표현하기를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 라고 표현하고 있고 사도들을 밖에 내보내고 그들에 관한 의논을 하는 것을 봐서도 대단히 신사적인 사람이었다. 이 사람의 이름이 바울의 스승으로도 고백되고 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행22:3) [가말리엘 - “나의 보상자는 하나님이시다.” ]
나중에 이런 교법사는 변화를 받았을 때 복음을 위하여 귀중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교법사 세나와 및 아볼로(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18:24)를 급히 먼저 보내어 저희로 궁핍함이 없게 하고”(딛3:13)
지난 주에도 나눈 말씀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한 사람은 어쨌거나 바른 믿음만 있다면 그 말씀의 이루어지는 결과인 복음 속에서도 유용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고 성경자체가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경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교훈이 바르건 그렇지 않고를 막론하고 품위를 가지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 우리는 사도들이 겪고 있는 이런 일들과 자세를 인간의 입장에서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는 모습에서 헤아릴 때 가능하고 또 이러한 위협과 핍박에도 저들이 절망하지 않고 기뻐하는 것 자체가 벌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모습임을 배운다.
앞으로 진리를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평탄하게 살 것이라는 기대는 보장될 수 없고 다만 주님의 예언과 사도들이 당한 일들을 통해서 고난 받을 각오와 하나님의 명령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사도들처럼 확신하고 살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 (살후1:5)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3:12)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선하신 도구 즉, 복음의 도구로 역할 하려고 하면 어두움의 세력들은 절대로 그대로 두질 않고 끊임없이 우리를 흔들려고 시도할 것이다. 이런 상황일수록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하게 된다.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후1:9)
Ⅰ.세상 최고 양심의 한계를 본다.(35, 38~40)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율법교사인 가말리엘은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들을 협박하고 때리고 가두는 이 사람들에게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고 충고하긴 하지만 대단히 소극적인 모습이다. 한 마디 더 하는 것이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헬,에아오(eao) to let be 혼자 내버려두다, 맡기다, 놓아두다] 두라!”는 것이다. 사람의 지혜라는 것은 시간을 흘려 보는 것이다.
Let it be (Beatles)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And in my hour of darkness, she is standing right, in front of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그러나 이 사람들은 가말리엘의 충고를 듣는 듯 했지만 역시 그들의 분감을 삭이지 못하는 모습이 뒷부분에서 언급된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0)
이것이 간악한 인간의 한계이다. 이런 모습이 대대로 역사 속에 회자되는 인물이 바로 빌라도였다면 이들도 역시 다르지 않다. 옳게 여겼으면 그냥 그대로 버려두면 그만이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그대로 나타내고 마는 데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우리가 글로 읽어서 별로 실감이 안 나는지 모르지만 이들이 사용한 채찍은 말을 부리는 것이지 사람에게 써야 될 도구는 아니다.
그러나 그 채찍에다 사두개인들은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분노까지 함께 실어 휘두르고 만다. 그러고서도 분감이 풀리지 않아서 내뱉는 주문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실 이것을 지적하는 사람이 자신들의 편이 아닌 바리새인이라는 데도 반감이 있었을 것이고 가말리엘은 사도들에 대해서 지나치게 민감한 사두개인들에게 그러한 모습은 짐짓 그들이 성전을 통해서 섬긴다고 하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책망에 가까운 말이었다.
결국 이런 입장에서 사도들은 유대인들의 당파싸움의 피해자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입장이 되었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충만해 있던 사도들은 그들의 당파 싸움에서도 전해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함을 본다.
많은 사람들은 ‘나는 그래도 양심대로 산다. 나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다.’ 라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죄에 붙잡힌 양심은 극단에 가서는 역시 제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것이다.
세상 최고의 양심도 결국 인간을 자유 하게 하거나 구원을 이룰 수 없는 낡은 도구일 뿐임을 깨닫게 한다. 결국 죄 아래 나는 인생들은 하나님의 뜻이나 구원은 흥미가 없고 자신의 것을 잃을 것인가 지킬 것인가에 만 혈안(血眼)이 되어 있음을 본다. 여러분 모두는 적어도 이런 일에 눈이 붉어지는 일은 없기를 …
Ⅱ.사람으로 좇아 나타난 것은 반드시 소멸될 것이다.(36~39)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드다]나 갈릴리 [유다]에 관한 기록이 성경에는 여기 밖에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것은 모르겠지만 여기에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교법사인 가말리엘의 말은 진실된 것이라고 볼 때 이러한 일은 1세기에서부터 이 21세기까지 세계 도처에서 계속 있어왔던 사실들이고, 우리 조국 대한민국 안에서만 해도 심심치 않을 정도로 일어났던 일들이고 역시 그들의 결말도 이 가말리엘의 말처럼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흩어지게 되어 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8)
사람으로 좇아 나는 것은 다 쇠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을 모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역사의 소모품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과신하고 큰소리 쳐봐야 한번 죽는 것이 하나님의 정하심이다.(히9:27) 최근에 80이 다된 머리가 희어가는 이단의 교주는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 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람 역시 시간이 데려갈 것이기 때문에 너무 혼란할 필요가 없다.
절대절망은 소망의 시작이다. 사람이 죄로 인하여 절망할 수 밖에 없을 때 주님께서 다가오신다. 사람이 손을 터는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시작하시고 사람이 절망이라고 탄식하는 곳에서 하나님은 이제 최고의 기쁨이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건전치 못한 믿음들에 신앙의 사람들이 상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측면에서 볼 때는 멸망의 자식들 즉, 진리를 거역하는 자들일 뿐이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9~12)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지혜로우시고 모든 사람을 미리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아무리 이단이 판을 쳐도 망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뿐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
“만일 하나님께로 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39) 사람으로 좇아 난 것이 반드시 무너지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로 난 것은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는 것 또한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 정부에 대항한 한 유대인 반란 자로 몰아붙이고 말살하려고 수없이 시도됐지만 이 역사가 다하기까지 쇠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루신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가말리엘의 충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모든 역사 속의 사람들에게 교훈이었다.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은 다른 방향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기 때문에 무서운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살아남을 인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더라도 조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난 일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방향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아주 두려운 경계를 주고 계신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12:30; 눅11:23) 이런 가르침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위하는 일에 함께 모아야 하고 적극적이어야만 한다.
바울이 사울 일 때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나는 하나님의 일을 헤치는 자가 아니라고 자신 만만하게 이야기 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와 일을 헤치는 자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복음 사업인 교회의 일이든지 여러분 모두의 일이든지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사람만을 위한, 사람에 의한, 사람의 일이라면 언젠가는 끝장이 나고 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 일이 이 천지의 주인 되시고 죄악으로 소망을 잃어버린 인류를 위하여 이 땅에 인간의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의 일이라면 사람의 보기에 아무리 어려운 난관일지라도 넉넉히 형통하게 되는 것은 그 주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Ⅲ.‘하나님으로 좇아난 확신은’ 주님의 이름 때문에 받는 환란을 기뻐했고 삶이 한결 같았다. (41~42)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사람과 하나님께로 나는 차이는 분명하기 때문에 사도들은 이러한 정치 싸움이나 대우에 대해서 별로 민감하지 않음을 본다. 이런 경험을 했던 베드로 사도는 나중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4)고 고백함을 본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요15:20~21)고 하셨던 말씀을 기억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눅6:22) 라고 산상보훈에서 예언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에 사도들은 기뻐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 믿으면 칭찬만 듣고 모든 것이 다 잘되고 귀한 존재가 된다는 것 외에는 오히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는 말씀은 오로지 사도들에게나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약속은 이 역사가 완료될 때까지 같은 효과를 가지는 약속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전하는 것 때문에 이런 일들을 당한다면 하늘에 상이 크다는 사실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또 저들은 비록 당시의 최고의 입법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회에 의해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40) 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지킬 수 없었다.
그런 이유에서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42)는 모습을 보는데 여기에서 하나 놓일 수 없는 사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라는 사실이다.
②날마다 그랬다는 것이고(2:46-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②집에 있는 것보다 성전에 있든지 가 먼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고 ③성전과 집이 같았다는 사실이다. 즉, 신앙과 삶이 일관되게 살았다는 것이고, ④중요한 것은 어디에서든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권력과 다른 힘있는 것들 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늘 뒤쳐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고, 또 세상과 교회 속에서 이중적으로 잘 처신하는 것이 미덕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안타까움을 우리의 삶 속에서 본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은 모든 인센티브는 하늘에 담보하고 오로지 이 세상에서 최고의 과제가 주님을 순종하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요즘에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거기에 과연 merit가 있느냐?’고 먼저 묻는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은 사실에 있어서 이 세상의 merit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약속하신다.
복음과 성령이 함께하지 못하는 거듭나지 못한 양심이라는 것은 그것이 설령 종교적인 양심일지라도 의를 행할 수 없음을 본다. 역사 속에 위대한 인물들을 후진으로 키운 가말리엘 같은 사람의 판단도 하나님과 같은 판단은 되지 못했고 그의 판단이 옳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동류들로 인하여 그 판단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다.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될 수 이다는 데도 경계를 가져야 한다. 이 역사 속의 많은 사람들이 이것만이 진리라고 큰 소리 칠지라도 하나님께로 나지 않은 것은 역사 속에 반드시 무너짐을 기억해야 한다.
사도들을 비롯한 그리스도께 속한 무리들은 “…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는 모습을 본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상급은 하늘의 영원한 나라에 담보하고 이 땅에서 대가가 있건 없건 주님의 일을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뻐하고 감격할 뿐만 아니라 주님 때문에 받는 고통을 오히려 기뻐하고 매일매일 신앙이 삶에 있어서 첫째이며 신앙과 삶이 일관됨을 나타내고 그 구별된 삶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이 쉬지 않는 모습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배운다.
이러한 구별된 삶에 부끄러움이 없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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