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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6:8~15 2008-06-15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성령께서 다스리시는 주님의 교회에 끊임없이 파고드는 어두움의 세력을 성령의 지혜로 물리치고 교회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를 향하여 달음질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오순절에 교회가 탄생한 후 벌써 두 번씩이나 있었다.

하나님의 성령을 속이려는 간교한 역사는 그들을 직접 형벌하심으로 권위를 회복했고 하나의 힘으로 하나의 방향을 향해가는 교회의 서로간에 분열과 불평을 조장하는 물질로서의 섬김은 그 일을 적절히 나눠서 감당할 일꾼들을 선택함으로 해결되는데 그 일로 뽑혀진 일곱 사람 중에서 그들의 행적이 가장 구체적으로 소개되는 두 사람이 바로 여기 스데반과 빌립인데 스데반은 다음 7장에 이 사도행전 속에서 가장 긴 설교로, 그리고 빌립은 8장에서 사마리아를 지나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한 내용은 대단히 중요한 개인전도의 귀감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신 주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복음이 예루살렘의 박해와 함께 이 사람들을 통해서 비로소 사마리아를 넘어서 이방세계로 나아가게 됨을 본다.

특히 여기에 등장하는 [스데반, 헬, 스테파노스(Stephanos), 화관, 면류관, crown(요19:2; 계4:4)]이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바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서 이 스데반을 교회 역사에 가장 최초로 순교라는 영광의 면류관을 쓴 자로 묘사하고 있다.

특이할 만한 것은 이들이 사실에 있어서는 공평한 구제를 위하여 뽑혀진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증거와 전도의 사역들을 감당하는 것을 보면서 사도들로부터 위임 받은 성령의 역사들이 이들을 통해서 더 확대되는 것을 보면서 어떤 일들을 맡았든지 성령이 충만한 준비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언제 어디서나 유용하게 쓰임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를 본다.

만약에 7사람을 구제를 위하여 뽑을 때 하나님 말씀의 기준이 인간적인 입장에서 등한시 되어서 ‘뭐 단순히 구제품을 나눠주는 일인데 이렇게 영적으로 깊은 수준의 자격을 찾아야 될까?’라고 생각하고 말씀을 순종치 않았다면 적어도 이 스데반과 빌립의 사역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 즉, 하나님께서 주인이신 교회의 일꾼이라면 그 맡겨지는 일의 성격에 상관없이 영적인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일의 출처자체가 하늘로부터 즉, 영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 교회의 일꾼 선택이 인간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오늘 우리 교회의 일꾼 선택에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들을 택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는 영광을 들어내고 일을 감당하는 당사자들은 모두 스데반의 이름처럼 생명과 영과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하늘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



Ⅰ. 하나님의 지혜에는 어떤 악의 세력도 능히 대항할 수 없다.(8~10)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하나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사람들로부터 칭찬 듣는 스데반에게 은혜와 권능을 넘치도록 부어주심으로 사도들과 같은 큰 기사와 표적을 많은 사람들 보는 데서 행하였고 적어도 이스라엘을 중심한 주변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와서 모인 사람들에게 [자유인, , Libertinos]들에게 변론을 당하지만 그들에게 절대로 지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반드시 권위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권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 스스로이거나 사람들에 의해서 입혀진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종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한 권위를 입어야 하나님의 진리를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8) 그리스도인의 기사와 표적과 지혜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의 충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오는 것은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약3:17) 그러므로 신령한 은혜로부터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감추거나 과장할 필요가 전혀 없다. 분명하고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또 복음 속에서 이적을 행하는 자들은 한결같이 그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당사자를 위해서는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 나중 사도행전 12장의 베드로를 풀어 놓는 천사의 이적도 베드로를 위함보다는 엄밀하게 교회를 위한 표적이었음이 분명하다.

주님의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권위를 약속 받은바 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8~2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권세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이고 그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 약속하시고 그 조건을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럼으로 이 약속은 사도들과 그의 사명을 계승한 사도들로부터 안수 받아 그 일을 계승한 일꾼들과 오늘 같은 역할을 이 역사 속에서 감당하는 모든 하나님의 종들에게 동일하게 유효한 약속으로, 지금 스데반에게 일어나는 권세는 주님께서는 일찍이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눅21:12~15)고 약속하신 것이었다.

특히 여기의 언급되고 있는 지명들은 대부분 지식적으로 대단히 발달한 지역들이었다. 알렉산드리아는 헬라 시대의 최고의 지식의 중심지였고 구약의 히브리어성경이 LXX이라는 헬라어로 번역된 곳이고 많은 도서관과 학자들이 학문을 연구한 중심지였고 ‘길리기아’는 저 유명한 바울의 고향으로 그 수도가 [다소]이다.

그러나 비록 이들이라도 하늘로서 온 지혜는 능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10) 라는 사실 속에서도 분명히 증거 되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 주님의 약속의 증거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오늘의 시대에도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삶의 지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세상의 지혜와 견줄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의 능력 때문이다. 불신의 사회에서도 성경과 탈무드가 탐독 되어지고 있는 것은 모두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아십시오. 아무나 이 지혜와 권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진리를 순종하는 자들에게만 하늘의 것들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람이 스스로 차려 입는 권위는 결국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하나님을 순종하며 헌신하는 자들의 권세와 구변은 능히 당할 지혜가 세상에는 없다는 것을 …

시편기자는 고백한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시111:10) 지혜로 추앙 받았던 솔로몬도 다르지 않았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잘 순종함으로 세상의 학식이 능히 감당할 수 없는 하늘의 신령한 지혜와 어두움의 세력인 마귀 사탄이 범접할 수 없는 하늘의 권세를 충만이 입으시기를 …



Ⅱ.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세력들은 온 갓 사악한 방법을 다 동원함을 본다.(11~13)

“사람들을 가르쳐 말 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오늘 이 내용을 읽다 보면 참으로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 인생의 삶의 이치를 다 깨달은 노병과 유치한 어린아이가 삶을 논하고 하늘의 세계를 이야기 하는 것 같은 감정을 느낀다. 앞에서 스데반의 의연한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어른 앞에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 하나가 온 갓 핑계와 변명을 늘어 놓으면서 자신의 약점을 감추어 보려는 그런 광경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한다.

이것이야 말로 권모술수(權謀術數)이다. “사람들을 가르쳐 말 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11)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기 위하여 하든 그대로이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마27:20) 언제나 어두움의 세력들의 방법은 바뀌지 않은 원시적인 방법 그대로 이다.

좋은 것을 가르치고 말하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마는 거짓을 말하여 선동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한결 같은 방법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던 모세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거짓말을 한다고 하는 것이 결코 성령의 사람들로서는 할 수 없는 행위들이다.

예수께서는 거짓말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고 책망하신 바 있다. 거짓은 절대로 하나님께로 서 나오지 않는다.

거짓의 교사는 마귀며 거짓을 말할 때마다 자신의 것으로 말한다는 말씀 속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롬3:4f) 하여 하나님의 대적됨을 선언하고 있다. 그럼에도 절대로 진실된 하나님의 사람 스데반을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12) 거짓으로 불가능할 때는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도행전 19장에서 아데미의 은감색들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라고 선동되어 모인 무리들이 나중에는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행19:32)는 모습에서 선동된 사람들의 생태를 보게 된다.

결국 신앙적 논리로 스데반을 당하지 못하자 저들은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 시키고’ 소란케 하여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게 하고 사도들을 어떻게 해 보고자 하지만, 사실 사람들을 충동시키는 것 보다 졸렬한 방법은 없고 또 그런데 선동되는 것보다 줏대 없는 행동도 없다.

이것에서 그치지 않고 저들은 최후의 수단을 동원하는데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13) 이것도 사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할 때 써먹던 술책 그대로였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함이라,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막14:55~58) 그러나 말미에는 “오히려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않더라”(59)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도 저들의 사악한 조상의 흉내를 그대로 본받고 있는 모습이다. 조상의 유업을 지키려는 나봇을 죽이기 위하여 이세벨의 선동을 받은 으스르엘의 잘못된 원로들이 행한 보습 그대로이다. “때에 비류 두 사람이 들어와서 그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거를 지어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저를 성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고”(왕상21:13)

어쩌면 의로운 사람들이 이 스데반이나 과거 아합의 치세아래서의 나봇처럼 죽임을 당하지만 그럴지라도 의인들은 육신이 죽임을 당했어도 오히려 히브리서 기자가 아벨에 대하여 하는 고백처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b) 즉, 영원히 산자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증거하고 죽는 사람들은 결코 불행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렇게 자손 대대에 아니 이 역사가 다하도록 믿음으로 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스데반의 복음 증거를 왜곡하여 이르기를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14) 이 말씀은 사실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그러나 요한 사도는 이를 해설하기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2: 21~22)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 말씀에 크게 혼란했고 이것 때문에 시비했다.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마26:61)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막14:57~58)

스데반 역시 이렇게 인류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참 성전으로 말씀했을 것이기 때문에 들을 귀가 없는 저들에게는 혼란을 일으킬 뿐이었고 시비거리로 삼은 것을 저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요2:20)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는 거듭난 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에게는 결코 보이지도 않고 들어 갈 수도 없는 감춰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귀한 비유를 동원하여 풀어 증거하지만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요6:60) 말투가 어려운 것도 아니요 비유가 어려운 것도 아니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전혀 이해가 불가능한 것도 하늘의 신비에 속한 교훈이기 때문이다.

어두움의 세상권세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은 그때나 이때나 진리에 대하여 거짓으로 선동하고 사람들을 충동시킬 수 있고, 심한 경우에는 거짓증인들을 동원하여 증거를 지어 말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진실한 일꾼들을 내몰 수 있지만 하나님의 성령과 더불어 일하고 사는 자는 그런 거짓 것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능히 이기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모두는 세상의 이치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지라도 성령에 충만하여 하늘의 생명의 말씀은 손에 쥐고 보는 듯이 가깝게 이해되는 …



Ⅲ. 성령의 사람의 얼굴은 대적들 앞에서도 여전히 빛난다.(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영적인 사람의 진면목은 믿음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할 때 나타나는 모습에서 더욱 분명하다. 지금 스데반은 온 갓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모함을 당하고 있는데도 그의 얼굴에서는 평화와 소망이 가득함을 그의 원수들조차 느낄 수 있었다.

스데반은 지금 산 중턱에 모여든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던 주님의 음성을 떠올리고 있는 듯 하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5:11~12f)

비록 앞에는 자신을 모함하고 저주하는 원수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주님의 넘치는 평강과 위로의 음성을 듣고 미소를 띄고 있는 모습이었고 이러한 그의 모습이 오히려 그를 대적하는 자들을 질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마지막까지 주님을 따르는 모습이어야만 한다. 그것이 설령 주님의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의 모습일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모습이 바른 믿음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의 결과가 반드시 육신적으로도 행복하리라는 기대는 스데반을 본다면 버려야 할 것 같다. 우리 모두의 최후와 다음의 시간 속에서 믿음이 가져올 사실들을 미리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늘 신앙으로 무장하고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믿음으로 오는 결과는 모든 사람이 다 같을 수 없고 반드시 육신적으로 평탄할 것이라는 기대는 접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서 영광의 면류관은 스데반처럼 순교를 통해서 쓸 수 있고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모두가 준비하여야만 한다.

늘 하늘의 것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순교의 면류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믿음의 앞길에 스데반 같은 고난과 위기가 올지라도 모두가 순교와 영광의 면류관을 쓸 수 있는 …

하나님의 지혜에는 어떤 악의 세력도 능히 대항할 수 없다.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눅21:15)신 주님의 약속이 바로 진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헌신하는 자들의 것임을 확신하는 …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세력들은 온 갓 사악한 방법을 다 동원함을 본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6:11)는 바울 사도를 통한 당부에 소홀함이 없는 …

하나님의 성령의 위로로 행함으로 형편이나 조건에 관계없는 하늘의 평화의 다스림으로 모든 원수 앞에서도 하나님의 자녀의 위엄을 잃지 않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