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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7:1~16 2008-06-22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지금까지 사도들, 특히 베드로가 이 사도행전을 이끌어 오는 주인공이었다면 이 7~8장에서는 사도들이 아닌 예루살렘 교회의 섬김을 위하여 사도들로 통해서 뽑혀진 전혀 새로운 인물들이 주인공처럼 중심에 나타나면서 이 성령의 행전의 또 다른 변화를 접하게 되고, 연이어 지는 9장에서는 하나님의 감춰두고 준비해 오신 이방을 위한 hidden card인 사울의 등장이 물론 이 7장 말미에서 나타나지만 사람으로서는 역시 상상을 초월한 하나님의 신비일 뿐이다.

말씀을 증거하는 것을 방해 받지 않기 위하여 공평한 구제의 일을 위하여 뽑혀진 사람들이 오히려 말씀을 전하는 일에 쓰여지는 것조차도 분명히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일 것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사도들이 주인공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스데반이란 사람의 복음증거를 통해서도 역시 이 기록의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의 성령이심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사도가 아니면서 어쩌면 이 사도행전 속에 가장 긴 강론을 펼치고 있는 스데반의 이 설교를 통해서 이것이 더욱 분명해 진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이 7장은 하나님의 약속에 등한한 사도들과 교회에 대한 채찍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점점 그 수를 더해가지만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을 향한 진보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핍박이라는 매서울 채찍을 통하여 그러한 약속이 성취될 수 있도록 하시는 役事도 사람의 생각과 계획에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하나님의 역사들이다. 오늘 우리의 교회가 역시 경성해야 할 두려운 일면이다.

실제적으로 이 긴 구원의 역사가 증거되게 된 원인은 6:14에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는 회당의 지도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출애굽과 광야생활 40년의 모세의 사역과 솔로몬 성전 건축으로 마무리 되면서 그럼에도 완전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거역이 가장 큰 죄악임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 설교는 마무리된다.

이런 흐름으로 진행되는 이 설교는 그 중심인물을 모세로 52절의 내용 중 절반의 내용이 모세에게 집중되고 있는 것을 봐도 율법의 도구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주인공답게 긴 부분이 할애되고 있는 것은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는 저들의 질문에 대한 응답의 성격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부분 부분으로 상고하기 전에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앞에서의 베드로의 설교도 물론 그랬지만 그 내용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서술하는 형식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지루하리만큼 자신의 다른 생각이나 감정의 삽입 없이 구원의 역사를 가감 없이 나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형식은 마치 유대인들을 대상해서 쓰여진 마태복음의 시작과 같은 감을 가지게 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마1:1~2)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내용을 이렇게 길게 나열하는 것을 끝까지 들었다는 사실도 신비에 속한다. 어찌 보면 “이것 보시오, 그런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니 묻는 말에나 단도직입적으로 답을 해 주시오!” 라고 중간에 대항할 수도 있었지만 이것을 다 듣게 하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성령에 압도당한 상태일 것이라고 이해된다.

물론 나중에 54절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이라는 표현이 저들의 이러한 사실적인 반응을 잘 보여주고 있는 표현이라 여겨진다.

바울 사도도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3:1) 한 것처럼 항상 익숙한 진리, 십자가의 진리가 구원의 사람들에게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 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17:21)는 세상 사람들의 호기심 보다는 복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설교를 설교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고 그것도 유명한 설교를 다룬다는 것 자체가 부담일 수 있지만 오늘도 성령과 더불어 같은 진리를 통해서 가장 안전한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代贖을 증거하기 위하여 희생한 많은 충성된 일꾼들의 믿음을 본받는 이 말씀을 듣는 …



Ⅰ. 아브라함을 통해서 받은 약속.(2~8)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

앞의 6장에서 보면 각 회당에서 어떤 사람들이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고 모함하기를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고,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다.”고 하자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1)고 묻는다.

여기에 대해서 전혀 흔들림이 없이 밝은 낯으로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가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믿음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응답이라고 대답하고 있는 내용이 이 7장 대부분의 내용이다.

아담에서 아브라함 이전까지의 모든 신앙적 조상들은 접어두고 이스라엘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들의 추앙하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부터 확인시키고 있다.

1. 아브라함의 부르심(2~4)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우리는 어떤 분명치 못한 말씀들이 다른 성경을 통해서 분명히 이해되는 그런 내용을 더러 보게 되는데 이 부분의 말씀이 특히 그렇다고 믿는다. 처음 장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모습이 마치 하란 인 것처럼 오해의 소지가 있다.

창세기 11장 말미를 보면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이백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31~32)고 기록되고 연결되는 12장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기록되기 때문에 창세기의 기록을 보면 마치 하란 땅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것처럼 나타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늘 본문에서 성령의 사람 스데반이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것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 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이러한 기록 속에 아브라함에 대한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2) 란 기록이다. 우상과 죄악의 땅에 그대로 기거하는 하란 땅의 많은 사람들 중에 아브라함에게 유독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지셨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3:3) 물론 메소보다미아에 있는 아브라함이 거기서부터 거듭난 사람은 아니었겠지만 모든 인생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은(롬8:29~30) 벌써 아브라함의 믿음의 됨됨이를 이미 아시고 그를 부르셨을 것이다.

오늘도 이 역사의 마지막 죄악의 도성에서 영광의 하나님이 보이는 것 자체가 세상의 어떤 가치와 바꿀 수 없는 엄청난 복이다. 이것은 우리의 거룩함이기보다는 오직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엄청난 은혜요 거룩하신 성령의 긍휼의 역사이다. 이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가든지 여러분 모두가 이 죄악의 세상너머에 우리를 향하여 사랑으로 손짓하시는 영광의 하나님을 늘 뵙는 복을 누리는 …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첫째로 명령하신 것이 무엇인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 당시로 가장 귀중한 보호처가 되는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사실 천로역정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보다 더 귀중한 의지가 되는 것들로부터 떠나야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 아닌 어떤 것에 나를 더 의지하고 있는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그것(곳)에서 떠나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이 음성이 들리는가? 그래야 하나님께서 완전히 보호자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고 위로자가 되실 수 있다.

또 그래야만 비로소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즉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야 할 미래를 보여주신다. 이것을 우리는 [Vision]이라고 말한다. 우리 육신의 의지하는 것에만 우리의 삶의 터를 기대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 비전을 보여주시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적어도 자신의 아버지 데라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렇지를 못한 것 같다. ‘왜 함부로 그렇게 말하느냐?’ 물을 사람이 있겠지만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4)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시는 주님의 당부가 오늘 우리 각자에게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나에게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시는 것이 무엇이든 그 말씀에 순종해서 아브라함처럼 福 받는 …

2. 아브라함의 가족이 나라로 크게 될 것을 예언하심(5~7)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창세기 15장에서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13~16)

당시의 가나안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들은 부족국가 형태의 작은 나라들이었고 아브라함의 가족도 다르지 않았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유업으로 주실 가나안 땅의 사람들의 죄가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고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아직 나지 않을 후손이 다른 땅에서 사백 년간 머물면서 큰 국가로 키우실 것을 역시 아직 자식도 없는 상황에서 약속하신다. 사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주 이시다.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는 가운데 약속을 주셨다면 하나님이실 수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라고 …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키우는 방법은 그것이 국가이든지 제산이든지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을 통해서 이루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여금 국가와 민족을 이루도록 4백 년을 종살이 시킬 뿐만 아니라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14)고 언약하셨고 이것은 하나도 어김이 없이 이루어진 사실이다.

3. 할례의 언약을 주심(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99세 될 때, 이스마엘의 나이 13세에 할례를 명하시는 말씀을 창세기 17장에서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시에 할례를 통하여 이방민족과 자신의 언약의 백성들을 구분하셨고 이 일이 나중 모세의 아내인 십보라는 남편이 자녀들이 할례를 행하지 않기 때문에 죽이려고 하는 일 때문에 [피 남편; 출4:25~26]이라고 까지 투정을 한다.

어찌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자신의 언약을 좀더 구체적으로 주시는 모습들이 이렇게 할례의 언약에 이르고 더욱 분명히 하시는 것을 본다.

물론 이것이 새 언약 속에서는 세례라는 약속을 이행함으로 죄악 된 세상의 사람들을 언약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실 그림자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할례의 언약이었다.

하나님은 우상의 땅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명하셨고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형태는 다르지만 반드시 이행해야 할 생명의 말씀이다. 한 가족을 국가로 키우시기 위하여 다른 나라에 종살이를 시키기도 하셨다. 그럼으로 이 종살이도 하나님의 사랑의 훈련이었다.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당하는 어떤 것이든 이런 고백으로 소화할 때 믿음이 자라고 견고해 질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희생의 제물이 되신 십자가의 은혜를 오늘 새로운 세례라는 의식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효력 있게 하신다. 오늘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통하여 세상이 볼 수 없는 “영광의 하나님이 보여지는” …



Ⅱ.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약속.(9~16)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 되니라”

이 부분은 말씀의 순서보다는 의미를 중심 해서 이해해 보도록 하겠다.

구약의 인물 중에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의 모형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요셉이다. 리브가는 본래 아기를 갖지 못하다가 창세기에 보면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창25:21) 라는 기록으로 볼 때 요셉은 야곱이 기도로 얻은 자식이었다.

우리가 이 요셉을 통해서 보는 그리스도의 형상은

(1) 아버지의 가장귀한 사랑의 대상이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요8:29)

(2)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는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11)

(3) 애굽으로 팔려갔다. 창37:25~28, 은 이십 개에

(4) 사랑과 용서와 희생의 표상이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19~20)

(5) 허물과 죄를 찾을 수 없었다. 창39:9b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6) 왕의 자리와 다름이 없는 위엄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스도: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7) 자신의 사람들과 이방 사람들까지도 구원한다.

이것이 어찌 구약의 육신에 국한된 문제이겠는가 완성된 복음 속에서는 바로 靈魂의 문제요 生命의 문제로 이해해야 할 때이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것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또 다른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면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이 약속은 요셉에서 검증된 것이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검증된 언약이다.(마5:11~12) 믿음으로 인하여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크게 웃으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불구덩이 같은 환난 가운데 있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높여주실 것을 확신하고 기뻐하십시오.

이제는 육신의 양식의 흉년보다 더 무서운 영혼의 양식의 기갈을 조심해야 한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때로 애굽의 흉년처럼 말씀의 기근이 심할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절대로 기갈을 겪지 않을 것이다.

애굽에 요셉이 있으므로 애굽이 살고 자기 민족이 살았듯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우리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살고 세상의 영혼들을 살리는 역사가 오늘도 있어져야 할 것이다.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 되니라”(15~16)

결국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육신의 조상들은 죽고 가나안의 약속은 무덤으로 끝나지만 이 귀한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메시아를 주셔서 영원의 새 예루살렘의 언약을 누리게 하시는 귀한 과정의 역사요 은혜의 약속임을 믿음으로 소화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