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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의 강론은 점점 중심을 향하여 나아간다. 6:14에서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이것이 사실이냐”는 대적자들의 질문에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이 죄악의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다시 그의 후손들을 이방 나라 애굽에 들어가게 하여 한 가정을 국가로 키워내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역사를 증거하면서 지난 시간에는 그 역사의 중심인물이었던 요셉까지의 일들을 증거하였다.
이제는 저들이 지적한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고 지적한 것을 구체적으로 답변하기 위하여 율법의 수장(首長)인 모세의 탄생과 성장과 교육, 그리고 나름대로의 사명의식을 가지고 이스라엘 해방을 위하고자 하지만 결국 미디안으로 도망하게 되는 모세의 인생항로를 소개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모세가 지적한 그리스도를 소개하고자 하는 바램으로 주님의 진리를 증거한다.
한 사람의 운명을 이 땅에 나기 전부터 아시는 하나님은 인류가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일깨워, 모든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으로 율법을 인류에게 주시기 위하여, 거류민들로 사는 이스라엘의 세력이 점점 강해지는 것이 두려워서 더 이상 이스라엘이 크지 못하도록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남자 아이가 태어나는 대로 나일강에 던지라는 법령을 공포하고 그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시기에 모세를 준비하시는 신비를 보게 된다.
그것도 옛말에 ‘사자 잡아먹는 벌레가 사자 몸 속에서 자란다.’는 말처럼 모세를 키우되 가장 안전한 바로의 딸의 가정에서 장차 애굽을 징벌하고 자기 민족을 이끌고 나갈 모세를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를 본다.
오늘 읽은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모세의 탄생에서 하나님의 계획하신 일을 감당하게 되는 데까지의 모세의 인간적인 ⅔의 생애를 나누도록 하고 다음 주에는 이렇게 준비된 모세임에도 끊임없이 그 모세를 거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도록 하자.
특히 모세의 혈기방장(血氣方壯)한 민족을 위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결국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지 못하고, 같은 세월 동안 그의 영적인 부분이 다듬어지고서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됨을 보면서 영적인 일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점검하는 귀중한 계기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정리 되었으면 한다.
Ⅰ. 하나님의 준비하심(17~2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궤계를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아이들을 내어 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하나님께는 절대로 즉흥적으로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철저하게 계획하시고 준비하시고 실행하시기 때문에 특히 성경 속에서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라는 말씀은 늘 귀중한 역사의 변화를 예고하는 말씀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5) 바울 사도는 이것이 바로 창세전부터 예정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임을 증거하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3~5)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간악한 애굽의 박해와 간계에도 번성하여 많아질 수밖에 없었고 만약에 요셉이 아니었다면 자신들이 다 죽었을 것임에도 과거의 받은 은혜를 헤아리지 못하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자 ‘그 어린아이들을 내어 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했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때에 모세를 나게 하신다.
언제나 태평한 때 자연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라고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고 준비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20) ‘그 때에’ 즉 하나님의 약속하신 때요, 이스라엘에게는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 가운데 보내신다.
그러므로 살 수 없는 데서 살아났기 때문에 기적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함을 깨닫게 되고 모세를 가르쳐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람이 볼 때 아름다운 것은 썩어 없어지고 소멸되고 낡아지는 것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것이고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비록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세였지만 그의 부모의 능력은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일 뿐이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우면, 의로우면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믿습니까?
그 후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는데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21) 애굽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바로의 궁전 밖에 없었고 바로의 딸이 자기 아들로 기르는 것보다 분명한 보호는 없었을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바로는 그들의 가장 큰 대적을 가장 가까이에서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바로의 딸의 아들로 길렀기 때문에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22)는 세상적인 모든 것을 섭렵하는데 역할을 하게 된다. 세상의 학술 그대로는 하나님의 영적인 일을 바로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영적으로 소회시킨 세상의 학술은 나중 모세의 역할에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우’게 하셨고 ‘그 말과 행사가 능하게’ 하셨을 것이다.
[학술, 헬, 쏘피아(sophia), (세상적, 영적)지혜; 말, 헬, 로고스(logos) 연설, 예언 (요1:1말씀이 계시니라, 2:22말씀하신 것; 요일1:1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계19:13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일, 헬, 에르곤(ergon)행위, 수고, 일]
다음 부분에서 보게 되겠지만 사실 이것 때문에 겸손함보다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으로 이해하게 되지만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시겠다는 하나님께 비로소 “…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출4:10)라고 변명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시키시든지 반드시 그 일을 감당하도록 준비하시고 또 감당케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변명 없이 순종하는 …
Ⅱ. 인간적인 사역의 실패(23~29)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죽이니라,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모세는 분명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로 죽음에서 건져지고, 키워지고, 보호를 받았지만 처음에는 그가 자라고 교육받은 대로 애굽의 학술, 세상의 방법에 더 익숙했던 인물임을 이 단락에서 보게 된다. 아무리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영적인 방법이 되지 못하면 영적인 일에 있어서는 무능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또한 이 모세를 통해서 배우게 된다.
다음 항목에서도 보게 되지만 이 부분의 시작을 “나이 사십이 되매 …”(23)라고 시작하고, 이 40은 모세에게 있어서 인생을 셋으로 나눈 숫자였다.[유교에서는 불혹-不惑(흔들림, 동요, 주저, 우유 부단이 없는)의 나이로 말한다.] 또 성경에서 이 40이란 숫자는 언 듯 생각해도 주로 고난과 더불어 많이 거론되고 있다.(노아의 홍수 때 40일 동안 내린 비,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했던 40일, 예수님의 광야시험이 있기 전의 40일, 이스라엘의 40년의 광야 생활 등등)
그러므로 세상의 일반적인 논리에서는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23) 표현은 ‘이 정도면 이제 우리 민족을 위해서 일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억울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돌아보려 했다는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생각으로 그의 한일은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죽이니라”(24) 참으로 의분에 불타는 모습이었고,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으로도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25f) 이것은 모세 자신의 판단일 뿐 정작 이스라엘은 “…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25b)고 기록되고 있다.
영적이지 못한 판단은 어떤 경우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이렇게 이해 하겠지!’ 라고 스스로 착각하는 경우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착각이 될 수도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모세의 의분은 계속된다.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 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26) 얼마나 좋은 말이며 화해의 말인가? 그러나 여기에 돌아오는 반응도 모세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27~28) 하나님의 개입이나 역사 없이는 어떤 의분도 효과가 없고 반감을 일으킬 뿐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일하시게 하고 자신은 도구가 되어야 한다.
자기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민종을 화해 시키려 해보지만 기껏 돌아오는 반응은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는 것이었고 ‘나를 죽이려느냐?’고 삿대질해댔다.
모세는 여기에서 비로소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도망한다.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29)
이래서 만약에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의 철학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아보려는 시도는 무모할 뿐이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위험을 만들 수도 있을 뿐이다. 인간적인 혈기나 의분, 그리고 확신도 다 불안전할 뿐이고 하나님의 도구로서는 합당치 못하기 때문에 결국 모세는 하나님께서 두려움을 주셔서 미디안 광야로 내 몬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모세와 비슷한 인물인 바울의 고백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1:16~17)
때로 하나님의 일꾼들은 사람들과 의논하는 것 보다는 미디안 광야나 아라비아에서 주님의 훈련하심을 받아야 할 때가 있다.
Ⅲ. 필요한 일꾼이 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30~36)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미디안 광야의 거친 들에서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면서 모세의 두 번째 인생의 황혼이 되었을 때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30) 즉 모세의 두 번째 40년이 다할 때 즉, 애굽에서 나고 자라고 공부하여 불혹의 나이가 된 만큼의 광야의 언덕과 골짜기와 맹수들과의 싸움을 마무리할 무렵에서야 하나님께서 비로소 모세를 다시 찾으신다.
때로는 우리가 더 순화되고 다듬어지기를 주님께서 기다리실 수도 있다. 모세는 80의 나이가 되어서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다가간다. 여기에 모세의 모습과 하나님의 천사의 음성이 대치되고 있다.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31f); “…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32b) 하였고 “주의 소리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31b~32)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벌써 계약적인 조건을 말씀하신다.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33) 이 내용은 사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 갔을 때 하나님의 군대장관을 만났을 때 겪었던 상황과 같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수5:15) 사람이 신을 싣는다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스스로의 보호를 위한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는 오히려 무장해제를 할 때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왜 이를 계약으로 보면 “옛적 이스라엘 중에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 신을 벗어 그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의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 신을 벗는지라”(룻4:7~8)는 기록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백성을 위하여 직접 역사하시는 사랑을 여기서도 확인해 주고 계신다.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34)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백성을 절대로 버려 두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이 약속은 지금도 유효하고, 미래에도 그리고 영원의 시간 속에서도 그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그의 보호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스데반 자신의 평가가 더해지고 있다.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35~36)
처음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한 나이 사십이 되어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으로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죽이고 자기 민족끼리의 싸움을 중재할 때에 이스라엘의 반응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하던 그 모세는 더 이상 애굽의 철학과 권력에 익숙해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십 년의 갑절을 지난 지금 비로소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또 다른 40년이 예약되고 있다. 그리고 이 40년은 또 다른 거절과 대항을 만나게 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자신에 대한 거절과 대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에 대한 행위였기 때문에 애굽에서 초창기의 대항이 아니었고, 미디안 광야에서의 양들을 지킬 때의 짐승의 대항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가 애굽의 학술로 말과 일에 능할 때 부르셔서 쓰신 것이 아니라, 거친 광야에서 양들을 치고 지키는 훈련과 함께 자연 속에 순화되고 길들여진 모세를 부르시고 쓰시고자 하셨다는 다실이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임직되는 일꾼들과 우리들에게 “내가 너를 애굽(세상)으로 보내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탄생과 교육과 훈련이 이 하나님의 준비하신 역사를 위함일 수 있다. 오늘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일하려고 한다면 사람들로서는 몰라도 하나님께로부터는 거절 당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내가 너를 애굽(세상)으로 보내리라” 시는 주님의 음성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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