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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스데반의 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의 증거는 결론 부분에 이르고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시행하시고 이루신 모든 일들에 대항하고 반역한 조상들의 배은망덕을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저들에게 직접적으로 지적하면서 그럼에도 자신에게 돌을 들고 달려들어 죽이려는 안타까운 저들의 영혼을 위하여 오히려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으로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한다.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6:9)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6:14)’ 하였고 여기에 대제사장이 ‘이것이 사실이냐(행7:1)’는 질문에 긴 답변을 이스라엘의 형성과정과 역사를 통하여 길게 강론을 하고 이제 스데반은 이 설교의 결론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이 말씀을 적용하는 것으로 끝내고 있다.
우리는 이 스데반의 모습과 그 진리의 말씀을 듣고도 무력으로 대항하는 두 종류의 사람 사이에서 천국과 지옥을 가진 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게 된다. 분명 장소가 다른 것도, 시간이 다른 것도 아닌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과 결말을, 그리고 허울좋은 말뿐인 종교의 사람들의 행위를 통해서 천국과 지옥의 분명한 모습을 볼 수 있고 이것은 비단 2천년 전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에도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죄인 된 사람은 분명 자신의 의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즉,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백성이 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삶 속에 천국과 지옥을 가진 모습을 들어낼 수 밖에 없음을 이해하게 되면서 두려운 경계를 갖는다.
천국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익숙해 있다. 설령 그것이 듣기에 거북한 책망일지라도 그 말씀을 생명의 교훈으로 듣는 것을 범죄한 후에 그를 찾아가서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나단 선지자를 통한 두려운 책망을 들으면서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12:13f)고 고백하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종(백성)다운 면모를 배우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를 지적하심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주님을 죽음으로 내 모는 당시의 간교한 마귀의 인간 군상들을 보게 된다.
확실히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임에서 각 사람이 어디에 속했는가를 확실히 보게 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늘 증거하시면서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4:9, 23; 눅8:8, 14:35)하신 것이다. 귀는 다 가졌지만 그 귀가 자신의 소속을 따라 들을 수 있는 방향이 다른 것을 말씀하셨고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8:47) 라는 두려운 말씀을 하고 계신다.
오늘도 말씀이 듣기 좋은 은혜의 음성이든지 듣기 힘겨운 책망의 말씀이든지 은혜와 생명으로 들을 수 있는 이 말씀과 함께 하는 …
Ⅰ. 불순종의 사람들은 항상 있다.(51~53)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 스데반은 지금 그의 선포를 듣고 있는 유대인들이 여태껏 말한 조상들보다도 더욱 패역한 사람들임을 알기 때문에 맹렬한 하나님의 책망을 저들에게 쏟아내는 것이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51)
첫째로 지적 받는 것은 ‘목이 곧은’ 즉 교만함을 지적하고 있다. 이 말씀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10계의 돌판을 기록해 주신 후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섬기던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하셨던 말씀이다.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순식간이라도 너희 중에 행하면 너희를 진멸하리니…”(출33:5) 물론 모세는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긍휼을 구하지만 ‘목이 곧은’ 것은 진멸 당할 수 밖에 없는 배은만덕으로 마치 대상에게 머리를 치켜드는 뱀과 같은 모습이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은혜받을 수 없는 항목으로 목이 곧은 것을 지적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18:12)
다음으로 그러한 원인을 스데반은 말하기를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도 믿음의 대헌장이라고 하는 로마서에서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9)고 지적하는 것을 본다.
유대인들은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음으로써 이스라엘의 백성이 되게 되는데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죄성을 가진 인간적인 요소를 잘라버려야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귀중한 논리를 저들은 깨닫지 못하고 육신의 할례만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아닌 사람들을 차별했기 때문이다.
결국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저들은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51) 여기서도 분명한 두 가지의 지적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을 거역한 것은 바로 마음을 감동하시는 성령을 거역한 것이고, 마치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거역했던 것에서 계속 되고 있는 성령의 거역이라는 말씀이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1~32; 막3:28~29) 셨던 말씀을 이해하게 된다.
계속해서 스데반은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52) 라고 말하는데 이들이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이유가 바로 그들의 조상들이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했던 선지자들을 핍박했고, 최종적으로 그들의 후손인 이들은 그 예언대로 오신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이란 말씀이다.
주님께서도 일찍이 율법사들을 향하여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대하24:20~21-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요아스)]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눅11:50~51)고 책망 하신바 있다.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53) 스데반은 이미 35절에서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라고 율법이 천사를 통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한 바 있다.
그리고 바울도 이 율법에 관하여 증거하기를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고 말씀한 바 있다.
천사는 유대인들이 대단히 두려워하는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그 천사를 통하여 주신 율법을 거역한 조상들과 같이 그 율법을 주신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음에도 여전히 거절하고 만 폐역을 지적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비유를 통하여 지적하셨던 대로 천사뿐만 아니라 “…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눅16:31) 이렇게 완악한 심령은 더 이상 소망이 없다.
은혜를 은혜로 사랑을 사랑으로 십자가를 십자가 그대로 받고 믿고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여러분 들 모두가 들을 귀와 믿을 마음 순종할 의지로 성령과 말씀을 순종하는 …
Ⅱ. 불순종의 사람들의 모습(54, 57~59f)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을 통해서 역사 속에 계속된 반역을 지적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참으로 가련한 인생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가 들려지지 않는 심령은 탄식을 해야 한다. 진리를 진리로 들을 수 있는 심령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심령이다.
그러므로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10:33) 라는 고넬료의 가족은 참으로 복된 사람들이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10:23~24; 마13:17)
그런대도 저들은 듣고 회개하면 구원 얻을 말씀 앞에서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54) 마음의 찔림을 받을 때의 선택이 참으로 중요하다. 말씀을 듣고 찔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라는 이유 때문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베드로를 통한 회개의 요청을 들은 오순절날 모여 있던 사람들은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2:37)
마음의 찔림을 주시는 말씀을 듣고 이를 갈든지, 회개하든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죄진 인간의 모습인데 이러한 반응은 당연히 그가 어느 영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있느냐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지옥을 묘사하시는 말씀 가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8:12, 13:42, 50, 22:13, 24:51, 25:30; 눅13:28)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저들은 이를 갈면서 어두움의 분노를 그대로 실천에 옮기고 만다.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57~59f)
저들이 이를 갈며 그 천사의 음성 같은 소리에 귀를 막고 큰 소리를 질렀는데 과연 어떤 소리를 질렀을까? 분명히 찬양의 소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모르긴 해도 축복이 아니라 분명히 저주의 소리를 발하였을 것이고, 나중 오히려 저들을 축복하는 스데반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천국과 지옥의 차이일 것이다.
그리고 ‘일심으로’ 행한 일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다. 여기도 천국과 지옥의 간격을 보는데 천국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 한 영혼이라도 살리려 애쓰지만, 어두움의 영에 사로잡힌 거짓의 종들은 죽이고 지옥 자식을 만드는데 힘을 소비할 뿐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하셨지만 저들에게는 그런 양심조차도 잃어버린 지 오래였기 때문에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돌로 스데반을 치니” 라는 과격한 행동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58)라는 기록을 보게 되는데 비로소 여기에 ‘사울’이란 청년이 등장하는데 분명히 나중의 바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증거하기 때문이다.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행22:20)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 사울이었던 바울이 나중에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주님을 증거하다가 같은 취급을 당한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행14:19) 그러므로 남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그대로 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경계로 삼아야만 한다.
결국 불순종의 사람들은 마음이 완악하여 마음에 찔림을 받고도 진리의 음성을 향하여 저주하고 귀를 막으며 자신들에게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는 자를 돌로 쳐 죽이는 용서 받지 못할 죄를 더하고 만다. 그러므로 생명의 말씀을 기쁨과 감격으로 배우고 받고 듣고 회개하고 본 바를 행 함으로 복 받는 …
Ⅲ. 충성된 하나님의 백성(종)의 모습(55~56, 59b~60)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앞의 많은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스데반을 보면서 하늘에 속한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놓고 진리를 증거하는데도 결국 그에게 돌아온 것은 돌팔매뿐이었지만 그러한 반응에 전혀 동요되지 않는 하늘의 사람의 모습을 본다.
죽음의 기로에 서 있으면서도 이미 스데반의 눈은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최선의 충성을 바친 하늘에 속한 사람을 맞으려고 일어서신 주님의 모습을 보며 감격의 찬양을 드리고 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56)
거듭난 사람의 눈에는 원수들이나 분노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만 보인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문제이다.
오늘 나에게는 무엇이 보이는가! 세속적인 속담에 “() 눈에는 ()만 보인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아름답지 못한 표현이긴 하지만 진리이다. 이래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신 주님의 말씀이 검증되고 있는 것이다.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59b) 이것은 최종까지 승리한 믿음의 사람의 자신 있는 고백이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나와 우리 그리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일을 완성하시고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눅23:46) 라는 기록처럼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는 모습은 다르지 않다.
또 다른 천국의 사람의 특징을 마지막으로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 죽음의 고통을 맞으면서도 자신을 원망하고 죽이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깨닫지 못해서 불의를 저지르는 그들의 영혼의 사죄를 위하여 기도하는 모습이야 말로 천국에 속한 사람들만이 가능한 모습이다.
이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서 이 중에 죽이는 증인이었던 사울을 변화 시키셔서 스데반과 같은 그러면서도 유대인이 아닌 모든 이방 세계를 위한 일꾼으로 변화시키는 모습을 본다. 아니 이름이야 거론되지 않았겠지만 이러한 스데반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변화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오늘 믿음의 사람이라는 우리를 보면서 또 다른 하나님의 일꾼들이 탄생할 수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당하는 일이 설령 죽음일지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내가 죽어서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주님은 그것을 본 또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나보다 큰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을 이 스데반의 마지막을 보면서 확신 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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