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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최초로 세워진 교회는 수 많은 시험과 어려움 속에서도 성령의 능력으로 진행하여 지금까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성도들로 증가되었고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인정하시는 많은 능력의 역사를 주셨다. 그럼에도 이 시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고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언약하시고 명령하신 언약들이 잘 지켜지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를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그 약속대로 분명히 성령은 오셨고 사도들에게 주셨던 약속과 같이 그들과 함께 하심을 능력과 권능으로 보이심으로 사도들은 물론 사도들로 통해서 세워진 일꾼들 조차도 성령의 역사를 경험함을 오늘 읽은 말씀에서 조차 확인할 수가 있다.(6~7)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작 사도들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일들에 대하여 철저하지 못함을 본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분명히 최후의 명령으로 당부하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1:8) 하신 약속은 무슨이유에서든 지켜지지 않았고 이제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시려고 이들에게 간섭하심을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된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1) 정작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명하셨지만 주님께서 융성하면서 예루살렘에 머무는 사도들에게 핍박의 철퇴를 가하시지만 여전히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고수하고 있음을 본다. 아무래도 사도들은 복음의 발원지인 예루살렘을 고수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생각에서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至上最大命令으로 주신 명령은 분명히 사도들과 맺은 언약이셨고 언약의 당사자들은 다름아닌 사도들이라고 하는 대서 사뭇 의아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말씀이 이런 판단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도 비슷한 역사들은 종종 있어왔었다. 끊임없이 회개를 요청했지만 계속 범죄하는 언약의 백성들을 돌이키기 위하여 먼저는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앗수르에 의하여 정복당하게 하고 이러한 경계는 다윗에게 등불을 끄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잃지 않도록 유다에 주신 경고였었고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본받는 예루살렘과 유대를 경국 느부갓네살의 채찍아래 망하고 만다.
이것은 결코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라서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렘43:10)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과 언약을 맺은 예루살렘과 유다를 위해서 그 손을 사용하신 것처럼 지금 주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에도 가지 않는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에 결국 핍박과 사울이라는 채찍을 사용하여 사마리아를 넘어서 온 유대를 넘어서 복음을 들고 가게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도 다르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기대하시는 것이 있음에도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복종치 아니한다면 하나님은 같은 채찍을 우리들에게도 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땅끝을 향한 복음 증거의 사명은 사도들로부터 오늘의 우리와 교회에 이르기까지 이 역사의 종말이 올 때까지 계속 유효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고 오순절 교회처럼 이것을 감당치 않는다면 오늘도 핍박의 철퇴는 주어질 수 있으므로 평안한 가운데 신앙하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귀중한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한다.
Ⅰ. 예루살렘 교회의 큰 핍박.(1~3)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은 복음을 위한 큰 일꾼으로 [사울]이라는 일꾼을 준비하셨지만 적어도 이 시점까지는 그에게서 그런 가능성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교회를 잔멸하고 핍박하는 것으로 역할 하기 때문에 더욱 예상할 수 없는 인물이었고 그런 이유에서 성령의 사람들인 사도들조차도 그의 개종을 믿지 못했던 것을 본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행9:26)
이것은 우리에게 큰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예가 된다. 적극적으로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회개하면 오히려 더욱 적극적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주위에 주님을 배척하는 제2의 제3의 사울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대상에게도 낙심치 말고 생명의 복음을 나눠 주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7:58에 스데반을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는 기록처럼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는 1 f절의 내용은 사실 7장 말미에 붙여서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다. 생명을 주님께 맡겨두고 복음을 증거하던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는 사울은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키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교회의 핍박에 뛰어 드는 모습이 이 첫 부분의 내용이고 그 핵심은 바로 말씀의 성취로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는 성령의 역사다.
하나님은 언제나 悲劇을 喜劇으로 絶望을 所望으로 바꾸시는 선수이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과 맞지 않고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하는 존재들을 소멸해야겠다고 교회를 핍박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핍박을 통해서 주님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앙 안에서 비극을 뒤집어 놓고 보면 그것은 다름아닌 희극임을 깨닫게 된다. 보이는 현상 속에서 잘되는 것 만이 萬事亨通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실되고 충성된 종인 스데반도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내지 않으셨다는 사실도 봐야만 한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2)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사도들 외에 믿는 사람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진 후이기 때문에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면서도 동료들을 인하여 제자 됨을 나타내지 않다가 주님의 죽으심을 장사 지낸 니고데모와 아리마데 요셉과 같은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표면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다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러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담대한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히 핍박이 무서워 도망한 것은 아닌 이유는 다음 단락에서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4) 라고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예루살렘에는 복음으로 편만했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새삼 사도들에게 주신 주님의 교훈을 떠올리면서 복음을 들고 흩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는 가운데 좀더 적극적인 사울의 박해역할을 소개하고 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3) 여기의 각 집은 이미 교회의 탄생에서 본대로 2:46의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라는 기록으로 볼 때 거룩한 주님의 희생를 기념하는 가운데 성도들을 잡아들여 들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여기 [잔멸, 헬, 뤼마이노마이(lymainomai), 파괴행위, 약탈; (NASB) ravaging(황폐하게 만들다) the church]이라는 표현을 볼 때 거룩한 신앙적 행위를 이성 없이 마구 짓밟은 행위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일이 있다면 과연 예배 드리려고 모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 자신들을 점검하는 말씀이 되었으면 한다.
Ⅱ. 사마리아성에 증거된 복음의 능력.(4~7)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예루살렘의 복음 증거는 사도들과 스데반 같은 이름 있는 사람들에 의해 증거되었지만 이제 복음을 들고 흩어진 사람들은 오히려 이름 없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앞의 7장이 전체적인 내용의 주인공이 스데반이었듯이 이 8장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람 역시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자들의 공평한 공궤를 위해 스데반과 함께 선출되어 사도들에게 안수를 받은 빌립이라는 사람이다.
1.빌립은 사마리아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증거했다.(5)-증거의 핵심.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그리스도를 증거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예수를 증거하는 수순이다. 모르긴 해도 빌립도 스데반의 증거를 들었을 것이고 어떤 다른 이야기보다도 그리스도를 증거했다는 사실이다.
2.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을 통해 증거되는 복음과 표적을 보며 그 말하는 것을 한마음으로 좇았다.(6)-복음의 반응.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처음 세움을 받을 때부터 성령이 충만했던 빌립을 통해서 하나님의 증거를 전하고 듣는 사람들에게 믿을만한 증거들을 주셨고 또 시몬이라는 거짓 증거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표적을 통해서 증거되는 빌립의 증거를 확증해 주셨을 것이다.
3.복음으로 말미암아 마귀의 사슬이 풀리고 자유와 해방이 선포되었다.(7)-복음의 결과와 확증.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복음이 주는 결과는 모든 얽매였던 것에서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것이었다. 더러운 靈에서, 질병과 죽음의 저주에서 놓임을 얻는 것이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막16:20)
이사야를 통한 예언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증거하신 것들이 사실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4:18; 사 61:1)
Ⅲ. 놀랍고 기쁜 복음의 능력.(8~13)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복음은 확실히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Christianity는 종교가 아니라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을 순간이나 어느 기간 동안 변화 시키는 힘은 문화나 다른 종교에나 속담 등등 더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삶을 영원히 변화 시킬 수 있는 능력은 복음밖에 없고 그러한 검증이 이 사마리아 성에 드디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여태 것 눈을 속여 사람들을 속여서 놀라게 해왔던 한 사람은 이제 참으로 사람을 뒤집는 능력을 가진 복음을 보도고 자신이 놀라는 것이다. 사마리아 성의 시몬은 그 동안 사람들의 눈을 잘도 속여 존귀와 영광을 취하여 왔지만 이제 빌립을 통해서 찾아온 복음은 자신의 경험 속에나 지식 속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능력임을 보게 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여기 마지막 단락에서 ‘놀람’이란 표현이 모두 세 번 쓰여지고 있는데 두 번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놀람으로 거짓된 눈속임에 놀란 것이고 세 번째는 이 사람들에게 놀람의 대상이 되었던 빌립이 하나님의 능력에 눈이 휘둥그래진 놀람이다.
무엇보다도 이 끝부분에서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6~7) 라는 앞의 단락에 덧붙여서 시작되고 있는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8) 라는 복음의 결과이다.
분명히 복음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을 찾아 준다. 이미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라는 약속과 함께 이 사마리아 성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큰 기쁨”이 있게 되었고 이 8장 말미에서 보게 되겠지만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기쁨에 넘쳐 제갈 길을 갔다.)” 라는 마차를 타고 길을 가다가 빌립에 의해서 복음을 듣고 물 있는 곳에 이르러 세례를 받은 에디오피아 내시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당부하는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고후13:11)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8)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빌3: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는 말씀들이 절대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전혀 기쁨은 없는데 그냥 “헤헤!” 하라는 당부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어떤 변화에도 불구하고 잃을 수 없는 한가지는 바로 [사죄의 감격]이다. 아니 억지로 기쁜 척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복음 속에 있다고 하면서 기쁨을 잃어버린 사람은 참으로 귀중한 것을 잃은 사람이요, 참으로 가련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복음으로 얻어지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기쁨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모두에게 죄 사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받은 기쁨이 사마리아 성처럼 충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
복음이 들어가기 전의 이 사마리아에는 가짜 복음이 있었다. 아니 이것도 사마리아 성뿐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지 흔하게 있을 수 있는 죄의 현상이다.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9~10) 이것이야 말로 어두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 시몬은 마술 즉,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사람이었고 사람들에 의해서 인정되는 사람이 아니라 [자칭 큰 자] 즉, 스스로 큰 자(중국-大人)임에도 안타까운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 같이 이 사람의 속임수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속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청종, 헬, 프로쎄코(proseco), 마음을 ~에 두다, 즉 주의하다, 조심하다, 전념하다, 지지하다, 유의하다, 주목하다, 관심을 가지다, 종사하다]
오늘도 하나님으로부터라고 아무리 큰소리를 쳐도 거짓은 오래갈 수 없다. 주님의 종들이 참으로 두려워 해야 할 부분이다.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말이 아무래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기 보다는 시몬 스스로 그렇게 부르게 했던 것 같다. 그것도 짧은 기간이 아닌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11) 라는 것이다.
우리는 짐짓 “나라면 그러지 않았겠다!”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참된 빛이 없는 어두움 세계는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신령한 눈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요3:3)
바울은 우리의 과거를 역시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고 당부하고 있다. 세상에서 똑똑하다는 사람이나 공부를 많이 했다는 사람들도 하나 같이 이러한 부분에서는 다르지 않은 이유는 바로 어두움에 잡혀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런 어리석음에서 눈을 뜨게 된 것이 우리 자신의 지혜나 학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의 십자가로 가능해졌다고 볼 때 우리도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고 다만 감사해야 할 것뿐이다.
그러던 이 어두움의 땅에 빛이 들어오게 된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12) 복음 전함을 받고 순종하여 이제 하늘의 사람들로 신령한 눈으로 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일은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13f) 한 것인데 자칭 큰 자라고 선전하고 눈을 속이며 대우를 받았지만 그러한 세월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여태껏 눈 속임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자칭 하나님의 능력이라 했던 이 시몬이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13b)
자신은 눈속임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해 왔는데 빌립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은 자신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기에 나중에 기록을 보게 되겠지만 이 사람은 이 능력을 돈을 줘서라도 자신의 손에 넣으려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만다. 결국 하늘로부터 주어진 영적인 가치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시몬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사려고 하는 것 때문에 망할 뻔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람들에게 약속하시고 주신 것들을 실행치 않을 때는 어려움을 통해서라도 그 약속을 준행케 하시는 분이시다. (좋은 말로 할 때 들을래 맞고 할래)
복음은 권능이고 능력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만을 증거해야 하고 믿음과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고 그렇게 순종한 복음은 믿고 순종하는 자들마다 모든 얽매인 것들에서 자유케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게 한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개인이나 사회는 기쁨을 회복할 수 있다. 그것은 영혼의 눈을 밝혀 꾸밈이나 거짓을 드러내고 자신들이 처한 처지를 보게 하며 비참함을 해결 받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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