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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일어난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졌던 사람 중에 가장 실제적인 전도사역을 감당하는 사람이 바로 빌립이었다. 스데반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증거하고 순교를 당한 반면에 이 빌립은 사마리아에 내려가 복음을 비로소 사마리아 인들에게 전하고 이 소식이 예루살렘에 전해지자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의 대표격인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안수함으로 성령이 내리심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복음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어디로 보내든지 성령의 지시를 따라 명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거리낌 없이 복음을 증거하는 모습을 이 8장 말미에서 보게 된다. 이 본문은 개인전도의 가장 모범적인 모델이기도 하다.
주님의 성령께서 광야로 가라 하시면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광야에도 가고 에디오피아 내시 전도를 끝내고는 가사의 바로 위쪽인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40)는 기록으로 봐서 참으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본래 일꾼으로 선택 받을 때부터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의지보다는 언제나 하나님의 의지에 충실한 주님의 모습을 본받고 있다.
사마리아 전도만 해도 사실 아직 사도들도 전도하지 않은 곳으로 인간적으로는 의심이 갈만한 가능성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성령의 이끄심은 언제나 옳다는 확신으로 시작해 놓으니 사도들이 완성하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바울은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고 확신의 당부를 주고 있는 것이다.
참된 진리의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어 보일지라도 절대로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는 늘 옳은 결과로 열매 맺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 읽은 빌립의 행동에서도 분명 그런 것들을 깨달을 수 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원하는 것이나 감정을 성령으로 착각하고 따르다가 문제를 일으키는 일들이 오늘의 시대에는 더러 있을 수 있고 바울의 권면을 귀 기울여 듣는다면 이런 혼란은 겪지 않아도 될 이유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는 데서 그렇다.
이 말씀을 더 쉽게 이해하면 자신의 육체적인 입장에서 원하는 것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영광이 되는 것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것’으로 보면 그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영광과 존귀와 좋은 것은 다 주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려 하는 의지는 인간의 욕심이나 감정이 아니라 성령의 의지일 것이라는 말이다.
이제 이 부분을 첫 부분에서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Ⅰ. 성령의 지시에 따라 행한 역사였다.(26~30, 39~40)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아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혼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주님께서 육신으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면서 성령에 관한 말씀을 가장 많이 하셨다. 3년 동안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많은 비유와 교훈을 주셨지만 어찌 보면 성령에 관한 교훈은 잡히시기 전날 밤에 거의 다 주셨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생각해 보면 유월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조차도 말씀하셨지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요13:7) 하신 것처럼 사도들이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주님께서 성령에 관한 교훈을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지만 역시 그도 훌륭한 이스라엘의 선생(랍비)임에도 불구하고 이해하지 못하였다.
소위 말하는 “다락방 강화”라고 하는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치셨던 요한복음 13장 이하의 성령에 관한 가르침을 각 장에서 한 곳씩만 인용을 해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16:12~14) 하시는 것처럼 성령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과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알리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바로 이 성령에 충만한 스데반과 빌립의 증거와 행동이 그랬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첫 번째로 빌립을 광야로 가게 한 것은 주님의 천사였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26)
우리는 여기서도 만약에 빌립이 순종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 천사의 지시에 반항할 수도 있다.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 복음을 전해야지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광야로 가라고 하는가?’ 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순종하여 갔더니 거기에서 아직 구원의 복음은 모르지만 가능성이 있는 경건한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아사야의 글을 읽더라”(27~28) 때로는 한꺼번에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게 생각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과 다르다. 결국 이 한 사람을 복음으로 변화 시킴으로 에디오피아에 돌아가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복음으로 변화시켰을까 상상이 된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성령의 사람은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와 방법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성령께서 직접 빌립을 지도하신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29) 빌립은 여기에도 속히 순종을 한다.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30) 성령은 지도하시고 빌립은 그 지시에 지체치 않음을 배운다. “주의 보혈 흐르는데 믿고(날래게-합동) 뛰어 나아가, 주의 은혜 내가 입어 깨끗하게 되었네”213(후렴)
빌립의 성령에 인도는 이 구원의 역사를 이룬 후에도 계속된다.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혼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39~40)
우리의 계획과 뜻은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을 순종하는 데는 절대로 실패가 있을 수 없다. 오늘도 하나님은 빌립처럼 성령에 민감한 사람들을 주님의 교회와 복음 사업에 찾으신다. 사람과 세상에 민감한 반응보다는 우리의 영성이 성령에 민감할 수 있는 성령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
Ⅱ. 역시 말씀이 출발점이 되었다.(28~35)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아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하나님께서 빌립을 보내신 이 타국인으로 유대교에 개종한 내시는 은혜 받기에 준비된 그릇이었다.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아사야의 글을 읽더라”(28)
이 내시는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지만 그 영혼의 갈증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면서 비록 흔들리는 마차 위에서이지만 선지자 아사야의 글을 읽고 있을 정도(우리는 마차보다 낳은 승용차에서도 성경 읽는 것을 힘들어 하는데)로 하나님의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비록 깨닫지도 못하면서도(31,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말씀을 사모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름답게 보셨던 것 같다.
하나님은 진리를 사모하는 영혼을 외면치 않으시는 분이시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시107:9) 때문에 이 내시에게 구원의 복음을 가진 빌립을 보내 주셨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29)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사람과 그 하나님의 진리를 사모하는 두 사람의 진실된 영혼의 대화가 시작되고 있다.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30) 하나님의 진리는 그것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의 가르침이 없는 한 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3~14)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31) 이 사람의 바람직한 자세는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즉 진실하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은 결코 수치가 아니라 복됨이요, 아름다움이요, 진실이다.
일면에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인간의 스승을 필요로 한다기보다는 영적인 도움을 전제로 하는 고백일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쓰인 [지도하는, 헬, 호데게오(hodegeo),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to lead; 길을 보여 주다, 안내하다, 인도하다] 꼭 같은 단어로 쓰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32~33; 사53:7~8) 이라는 바로 메시야 예언에 관한 말씀이었고 내시로 하여금 이 말씀을 읽게 한 것 자체가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을 것이라 믿는다.
여기에 또 다시 내시의 진실된 질문이 고백되어지고 있다.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34) 대속적 죽음을 예언한 메시야의 가장 핵심적인 사역을 읽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빌립을 보내셨던 것이다.
그래서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행8:35) 오늘 우리가 나누려고 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다.
당시의 에디오피아 내시의 비록 흔들리며 가는 마차의 여행 길이었지만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해 있었다면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다.’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성경의 가르치는 방향 즉, 화살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어느 말씀에서 시작하든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로 결론이 나야 정상이다. 또 한마디 놓질 수 없는 말씀은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즉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라는 공식이 나타난다.
모든 인류에게 전할 메시지, 모든 시간 속에서, 모든 지역(문화, 민족, 국가)에서 전할 메시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우리는 모든 죄인 된 인류에게 세상에서 없어질 것들에 대한 보이는 것들의 복과 형통의 싸구려 복음이 아니라, 영원과 영원의 시간 속에서 그리고 쇠하지 않을 영광을 창조주요 구세주로 더불어 지금 이 순간에서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책임지실 영광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해야만 할 것이다.
여러분 모두가 구원 받고 성령이 함께 하신다면 나(우리)를 나(우리)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증거하여 서로가 감격할 수 있는 …
Ⅲ. 세례를 받으므로 흔연한 인생이 되었다.(36~39)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빌립이 가로되 내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들인줄 믿노라 (38)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혼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이 성령과 빌립이 동역(同役)하여 이루어 낸 구원의 완성은 거듭나서 흔연(欣然)한 인생이 되는 데까지이다. 이사야의 메시야 예언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고 거기에 반응하는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의 구원의 완성을 마무리에서 보게 된다.
앞의 단락에서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35) 했는데 여기에 반응하는 내시의 요청이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36) 이러한 내시의 요청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중요한 요청이 있다.
앞에서 단순히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라고 만 기록했지만 거기에 반응하는 이 내시의 자세로 봐서 그 복음 속에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이 가르쳐졌음을 이해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런 세례의 말씀도 없었는데 물이 있는 곳에서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라고 요청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복음 증거에는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주님의 구속이 각자에게 효력을 발하는 것은 물속에 장사 지내고 올라옴의 세례로 거듭남이 반드시 증거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또 한가지 세례의 시기에 대한 확신도 놓질 수 없다. 길가다가 복음을 깨닫고 세례를 요청하는 것으로 어느 단계에 이르기까지 배움이나 훈련이 전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마28:19~20)) 빌리보 간수의 가족도 복음을 듣고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행16:33) 라고 기록되는 모습을 볼 때 장소나 시간이나 구애될 필요가 없음을 확인한다.
또 한가지는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라고 한 사실에서도 배움이 있다. 한 국가의 각료의 한 사람으로 먼 여행을 하면서 마차에 마실 물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인데 요즘 대부분의 모습처럼 편리에 따라서 그 물로 할 수 있었다면 구태여 물 있는 곳에 보다 구체적으로는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38~39f)는 번거로움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사실이다.
본문에 나타나는 세례에 대한 조건(38)은 NIV를 제외한 모든 영어 성경에서는 대부분 본문에 나와 있지만(한글판, 흠정역, KJV, NKJV, RSV, NRSV, ASB, NASB) 우리 성경처럼 난 외주로 처리 한 내용이다. “빌립이 가로되 내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들인줄 믿노라”(37)는 믿음의 고백이 필요하다.
이 고백은 마16:16의 고백과도 같은 맥락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헬, 카이로(cairo); to rejoice; 유쾌하게 되다, 기뻐하라)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39)는 구원의 기쁨과 사명의 완성을 모두 감격하는 모습이 되었다. 바로3:19에서 베드로 사도가 증거한 말씀의 확증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바울 사도의 빌립보 교우들을 향한 요청이기도 하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진정한 기쁨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데 있다.
이제 죄 사함을 받고 다시 올라탄 마차는 더 이상 덜커덩거리는 거친 광야 길을 가고 있는 마치기 아니었다. 하늘나라를 향하여 올라가는 마차가 되었다.
내가 탄 마차는 하늘 나라 올라가네, 내가 탄 마차는 하늘 나라 올라가네
저 요단강 건너 내 집 보이네 하늘나라 올라가네, 저 천군천사 나를 부르네 하늘나라 올라가네
Swing low, sweet chariot, Coming for to carry me home, Swing low, sweet chariot, Coming for to carry me home. I looked over Jordan, and what did I see? Coming for to carry me home, A band of angels coming after me, Coming for to carry me home.
내가 탄 마차는 하늘 나라 올라가네, 내가 탄 마차는 하늘나라 올라가네
저 밝은 고향 바라본다네 하늘나라 올라가네, 내 주님 내 죄 사해 주셨네 하늘나라 올라가네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일을 행함에 기본이다. 어느 특정한 사람이나 자신을 기쁘게 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 사람의 의지도 욕심도 명예도 성령을 순종하는데 굴복해야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
어디의 말씀에서 출발하든지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예레미아도 율법서의 제사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되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가 증거되어야 하며 그것만이 복음이다.
복음은 반드시 죄의 인간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적용해야 한다. 시간이나 장소가 말씀을 순종하는데 장애가 되어서는 안되고 세례의 자격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진실된 고백만 가능하면 되고, 물속에 장사 지냄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롬6:4~5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물에서 일으킴을 받으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밥티스마[헬,baptisma]는 반드시 말씀을 따라 시행되어야만 한다. 이것을 인간의 편리에 따라 약화시킬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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