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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인 반전은 올림픽에서나 운동 종목에서뿐만 아니라 어디서든지 많은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사건이다. 아니 어찌 보면 꾸준한 열심이나 승리보다 더 쾌감을 느끼게 하는 사건이다. 우리 주님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구원의 십자가의 복음 속에 또 하나의 엄청난 반전으로 사울 이라는 사람을 창세전부터 준비하셔서 만민을 전율케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애당초 십자가의 복음을 세계만국 땅끝까지 이르러 증거함으로 모든 인류가 구원 얻는 것을 계획하시고 시행하시고 사도들에게 명하셨다. 함에도 복음이 완성되고 구원이 사마리아를 넘어가지만 주님의 이러한 부분의 당부에는 다소 둔감한 이스라엘 본토 소생의 사도들의 한계를 이미 아셨던 주님께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이방을 구원하실 도구로 한 사람을 예비하셨는데 그 사람이 바로 사울 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사울은 다른 사도들처럼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부터, 사도들의 기준을 따른다면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행1:21~22f)이 아닌 오히려 복음의 반대편에서 그 복음의 증거를 가로막던 길리기아 다소 출신의 사울을 이미 준비하고 계셨다.
당시의 사도들이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 사람이야 말로 이방을 위한 복음 증거 자로 완벽하게 준비하셨음을 당시 사울 자신조차도 몰랐지만 그의 일생을 되돌아 보면 하나님의 지혜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나중에 바울이라고 개명을 하지만 사울은 이러한 사실에 놀라고 감격하는 고백을 그의 애정 어린 서신들 속에서 듣게 된다. 자신이 완벽한 유대주의의 배경과 가문에서 났고 실지로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하는 속에 있었지만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갈1:15)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그의 글은 하나님에 대한 신비와 감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누가를 통해서 기록된 이 사도행전 속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실적인 경험을 그대로 기록한 이 9장과 다시 유대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이루신 역사를 되돌아보는 회고형식의 고백을 21:37~23:6에서 좀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그리고 마지막 로마로 가기 이전에 아그립바 왕 앞에서 증언하는 내용(26:)으로 접하게 될 것이다.
오늘 이 사울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경험은 우리 모든 신앙하는 각 사람들에게 있어서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가지고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주님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핍박처럼 고통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과, 믿음으로 통한 신앙적인 체험은 언제나 개인적이고 주님과의 만남 속에서는 일대 일의 관계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읽은 앞부분에서는 주님을 향하여 살기 등등한 사울을 거꾸러뜨리시는 주님과의 일대 일의 대면(1~9)과 다음 시간에는 유대교에 열심 있어 의심되는 사람이었지만 안수와 세례를 통하여 복음의 증거 자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10~19)를 보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 각자가 이 말씀을 들으면서 행여라도 나는 사울처럼 주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고 열심으로 섬기는데 주님께서는 오히려 그러한 우리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안타까워하실 모습은 아닌지? 점검해보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를 …
또 비록 지금까지 사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잘못을 범하며 살아온 신앙이 되었다면 모든 주변의 사람들과 상관없이 나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는 경험을 통해서 새롭게 하나님의 나라의 도구로 사울처럼 충성할 수 있는 이 말씀과 함께 하는 …
Ⅰ.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법은 정죄의 법이다.(1~2)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율법을 비롯한 사람들의 사회가 존재하는 모든 시대와 민족과 나라들을 막론하고 법률은 인간의 마지막 약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처음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사랑이 지배되는 사회는 에덴이든 가정이든 사실 법이라는 구속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법이라고 하는 것은 상주고 격려하기 위해서 보다는 인간관계를 깨뜨리고 해치는 존재들을 정죄하고 형벌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냉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인간이 인간답지 못한 사회일수록 법조문은 늘어나게 되어 있다. 가장 기본적인 헌법이 있고 각 부분마다 ~법(택지개발 촉진법), 시행령, 시행규칙, 그리고 세부적인 지침이 있는 것처럼 각 분야에 조목 별로 법이 있고 그러고도 아직 법이 제정되지 않아서 처벌을 못하는 일들이 법의 한계를 들어내고 있다.
성경이 이 것을 증거하고 있다.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딤전1:9~10)
그래서 법 조항은 짧을수록 행복한 사회이다. 이런 이유에서 처음 에덴에서 금지조항의 법은 한 문장뿐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율법 조차도 분명히 하나님께서 인간을 형벌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궁극적으로는 십자가에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한 것이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라고 하였고 다시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3:23~25)
그럼에도 바울은 이러한 율법 즉, 정죄하는 법에만 통달하여 흠이 없었으나 율법의 근본적인 목적인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살벌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3:5~6)
이러한 바울이었기 때문에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1~2f)
특히 여기에 “살기가 [등등하여, 헬, 엠프네오(empneo), 들이 마시다, 호흡하다]”죽이려는 마음을 들이마시고 날뛰는, 마치 초원에서 온순한 짐승을 먹기 위하여 혼신으로 좇는 사자나 표범 같은 모습과 비교되는 모습을 정죄의 법에 익숙한 사울에게서 보는 것이다.
“…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2) 사자나 표범은 자신의 굶주림을 채우기 위하여 연약한 동물들을 좇았다면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가는 사람이면 남녀노소(男女老少)를 가리지 않고 묶어서 스데반처럼 죽일 수도 있도록 복음의 진리에 이를 가는 겉으로만 거룩한 제사장의 무리들에게 끌어다 주고자 기세 등등하게 다메섹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오늘 날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사람들은 정죄의 법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의 법에 포로가 된 사람으로 자신의 사랑 받음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보혈이 유효하도록 애쓰는 사람이다. 오늘 나는 과연 주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 이 질문에 부끄러움이 없는 …
Ⅱ. 주님을 위한다는 열심이 오히려 주님을 아프시게 할 수 있다.(3~5)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자신은 하나님의 영광의 법인 율법의 준행자요 또 집행자로 채포할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곳이면 다메섹뿐만 아니라 어디든지 달려가서 그들을 잡아 형벌하고 죽이려 했지만 그에게는 진정한 사랑의 빛이신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겉으로는 율법과 종교적인 권세를 걸쳐 입었지만 속으로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증오로 캄캄한 어두움만이 가득했던 그에게 “…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행26:13)고 나중에 자신을 심문하는 아그립바 왕에게 고백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요한 사도로부터 같은 고백을 듣는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1:5)
나중에 바울 자신의 고백 속에서도 듣는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엡5:13)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4f) 역시 이 부분도 요한이 같은 고백을 하고 있음을 듣는다.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계1:17)
구약성경에서도 이런 모습은 나타나는 것을 보는데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겔1:28)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4b) 어쩌면 이러한 질문은 사울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물음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좀더 구체적인 표현을 보면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26:14)
그러나 사실 사울이 언제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한 적이 있는가! 그러나 그의 몸된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곧 주님을 핍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이 원리는 신앙의 많은 부분에서 같은 이해를 할 수 있다. 좋은 면에서도 주님께서는 그의 사람들에게 한 것이 곧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진리를 순종하며 따르는 자들을 괴롭히는 것이 바로 그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이 된다는 두려운 가르침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울은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각오로 자신들의 판단에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으로 판단되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고 죽였는데 칭찬보다는 오히려 안타까운 질문을 주셨던 것이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1:13~14)
그러한 사울에게 들린 뜻밖의 음성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경험을 가진 바울이기 때문에 나중에 자신의 민족들을 향하여 탄식하기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2~3)는 자신과 같은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때로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큰 열심을 가지면서도 사울처럼 주님께 책망 받을 열심을 행하는 일들이 오늘의 신앙의 세계에도 적지 않는 것 같다. 열심은 믿음 생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반드시 필요한 것임에도 하나님의 바른 교훈이 아닌 자신의 판단과 생각, 그리고 자신의 성취감을 위해서 열심을 낸다면 주님으로부터 같은 책망의 질문을 들을 수 있을 것임으로 신앙에 열심하면서 반드시 점검해야 할 과제다.
‘이 열심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심인가!’ 그렇지 않다면 열심을 낼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기세 눌린 모습으로 묻습니다.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5f) 유대인들은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하여 [주여!, 히, 아도나이(adonai), 헬, 퀴리오스(kyrios)] 라고 질문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고 히브리 백성들을 [야웨, 히, 야웨(yaweh),] 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두려워 하는 나머지 [아도나이] 라는 대명사를 많이 쓰고 있는 모습을 구약 성경의 번역사(飜譯史)에서 봐오는 사실이다.
거기에 따른 전혀 뜻밖의 답변은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5b)는 것이다. 여기에 특이한 사실은 [핍박, 헬, 디오코(dioko), 박해하다, 추적하다, 따르다, 좇아가다, 힘쓰다] 라는 부정과 긍정의 의미를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꼭 같은 단어가 반대자들에게는 박해하는 것이 되는 반면에 추종자들에게는 열심으로 따르는 것이 된다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사울은 예수님을 박해하였지만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 받은 후 열심으로 주님을 좇았던 것은 재미있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가운데 열심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충성하는데 어느 날 주님께서 그에게 “~야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반문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는가?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열심이라면 얼마든지 좋을 것이다.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부분에서도 부끄러움 없이 확실한 충성 자들이 되시기를…
Ⅲ. 믿음의 경험은 개인적일 수밖에 없다.(6~9)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사울과 함께 같은 목적으로 다메섹으로 들어가던 일행 중에 같은 시간과 현장 속에 사울 만이 주님을 만나고 말씀을 듣는 것은 어쩌면 신앙 속에서 더러 있을 수 있는 경험들이다. 주님께서 오셔도 그 주님을 구세주로 은혜의 주님으로 만나는 것은 모두에게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늘 이 자리에 꼭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함께 있지만 이 예배 중에도 주님을 만나는 감격은 모두에게 같지 못하다는 사실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시기를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 하셨고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2~13) 말씀하셨다.
신약성경에서도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라고 바울을 통해서 약속하셨다. 여러분 모두가 주님을 만나되 사울처럼 뒤집어 질 정도로 확실히 만나시기를 …
주님께서는 스스로 앞길을 찾을 수 없는 사울에게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6) 하셨는데 좀더 자세한 바울의 회고를 보면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행26:16~18) 하셨던 것을 들을 수 있다. 여기에는 장차 바울로 하여금 무엇을 어떻게 시킬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음성을 들은 사울은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8~9)
어쩌면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선언했던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마23:16f)라고 책망할 때 사울도 그 자리에 있었을 수 있고, 이 경고의 사실적인 경험을 사울로 하여금 하게 하신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주님을 바로 만난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의 가치는 보이지 않고 세상에 대해서는 소경이 되는 대신에 하늘의 세계를 향하여 눈을 뜨게 된 예를 바로 바울의 고백에서 듣는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빌3:7~8f) 사실 이 고백은 그리스도를 바로 만난 사람들만이 드릴 수 있는 고백이다.
사람들을 이끌고 다니던 사울은 이제 사람들에게 이끌리고 예수그리스도를 대적하던 사울은 이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포로로 끌려가고 있는 있다.
그리고 다메섹에 들어 가서도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9)는 모습을 보는데 마치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던 구약의 예언자 요나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욘1:17)
마지막으로 살펴볼 사실은 사울 주위의 사람들이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7) 이들은 사울과 같이 눈이 어두워 지지 않았어도 사울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뵙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마치 요한복음12:28~29의 내용처럼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라는 예수님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반응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영적으로 나타난 하늘의 응답을 모두가 이해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주님을 만나는 것과 말씀을 듣는 것은 모두 각자라는 사실이다. 여러분 모두도 주님처럼 본문의 사울처럼 하늘의 소리에 민감한 영혼의 귀를 주님으로부터 받으시기를 …
법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즐길 규칙은 아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한 것처럼 법을 거론하지 않아도 될 사랑의 사람들로 사시기를 …
내가 주님을 위하고 섬긴다고 설치는 것들이 혹시라도 주님을 괴롭히고 핍박하는 모습이 아닐지 늘 열심을 품으면서도 점검하는 …
믿음의 경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은 한 장소 같은 시간에 있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세상을 향한 눈은 어두워져도 하늘을 향하여는 신령한 눈을 뜨고 주님의 다시 오심의 징조를 살피고 늘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주님의 음성을 가려 듣는 신령한 귀를 오늘 본문 말씀의 사울처럼 가지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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