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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9: 10~19f 2008-08-17
내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등장하는 사울이라는 사람을 통하여 신앙의 여러 모양들을 살펴볼 수 기회가 되고 있는데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일군으로서의 일대 일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시간이었다면 오늘 이 천방지축(天方地軸)이었던 한 사람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움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과 말씀에 사람으로 순종하기가 결코 쉽지 않음과 세우는 데는 하나님의 일꾼들 간의 인간관계(물론 백성들간의)를 생각케 하는 부분들을 볼 수 있게 한다.

사울은 분명한 확신과 소신으로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서 새롭게 등장하는 예수의 추종자들을 징벌하는 것이 자신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요 역사라고 확신을 했는데 뜻밖에도 주님께서는 그것이 하나님께 순종이 아니라 오히려 괴롭히는 것이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씀을 들을 때 절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이 역사 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천사나 신비적인 능력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람을 통하여 이루심을 오늘 본문의 이름 없이 묻혀있던 일꾼을 보면서 생각하게 한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비록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을 명령하고 시키실지라도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요 일이라면 자신의 입장이나 판단조차도 접고 순종이 안되면 복종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또한 하나님께 유용한 일꾼임을 생각하게 되면서 교회는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순종하는 지체가 되어야 함을 배운다.



Ⅰ. 순종하기 어려운 주님의 명령.(10~12)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어찌 보면 사울의 다메섹에 나타남을 가슴 졸이며 염려하던 사람 중에 하나였을 이 아나니아를 주님께서 부르신다. 이 사람이 어떻게 주님의 제자가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고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10f)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흔한 이름의 하나인 [아나니아-여호와의 은총]는 이미 5장에서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부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 기록된바 있다.

앞으로 이방 세계를 복음으로 불러들일 엄청난 일을 할 사울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운 사람이 예루살렘의 이름있는 사도들도 아니고 천사도 아닌 이름없는 무명의 숨겨뒀던 일꾼이었다는데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의 시대를 돌아보면 대부분이 유명인사를 동해서 세움 받기를 원하고 범국가적인 신앙적 행사를 하더라도 유명한 사람들은 명예 대회장이라는 직함이라도 분배하여 포함시키는 것이 관례가 되고 있다는 데서 생각해 볼 신앙적 과제이다. 나중에 바울은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갈2:6)다고 까지 고백한다.

어떤 경우에도 복음 속에 사람이 유명해져서는 안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유명해 져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고후6:9) 라는 하늘에서 유명한 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름없는 제자인 아나니아를 주님께서 부르셨다.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10m) 환상 중에 부르심이 어찌 생각하면 신비적일 수도 있지만 검증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기록된 성경보다는 불분명할 수도 있다. ‘혹시 내가 헛것을 봤나!’ 의심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아나니아는 하늘의 음성에 예민한 사람이었음에 분명하다.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10b)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는 고백은 ‘언제든지 말씀만하시면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라는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럴 때 다음 명령을 주신다.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11) 주님의 말씀은 분명하고 단호하다. 언제나 하나님은 주님의 일을 위하여 “가라”고 명하신다. 11제자에게는 땅끝까지 가라 하셨다면 아나니아에게는 다메섹의 곧은 거리로 가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그의 가야 할 길을 보여 주시고 해야 할 역할을 보이신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12) 이미 아나니아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위해 신령한 눈을 뜨고 있는 사울을 아나니아는 자신이 명령을 행하기 전부터 보고 있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비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시행하시고 그로 통하여 또 다른 구원의 역사를 열어 보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소망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지시하시는 일들이 분명히 인간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었고 기록된 문서가 아닌 환상 중에 명령하시는 것이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준비된 사람은 마치 기드온처럼 확인은 하지만 확인이 된 이상 그것을 행하는데 주저하거나 어려워하지 않는 아나니아를 우리는 본다. 이름없는 무명의 종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충성된 자들을 통하여 역사를 움직여 가고 구원을 이루시는 구원자이시다.



Ⅱ.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계획.(13~16)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하나님은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시키시기 때문에 이 일이 참으로 하나님의 바라시는 뜻인가를 확인하는 모습이지만 어찌 보면 분명히 인간적인 요소가 없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결국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드림이 중요하다.

여기서는 세상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인간됨을 보고 우리 자신들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1. 자연적인 인간적인 모습을 본다.(13~14)

“…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

이러한 모습들이 늘 믿음 생활과 교회에 장애가 되는 일들이다.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믿음의 기준은 그것이 사람이든지 일이든지 하늘의 기준에 의해서 판단되고 이해하려 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를 혼란케 하는 것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위해 예정하신 것이 무엇이고 그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일들이 분명히 있음에도 우리가 늘 예민해지는 것은 어쩌면 세상을 돌아서 들려오는 그에 대한 이야기가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한 두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을 통해서 듣는 것은 세상의 논리로 이야기 하면 어느 정도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가 된다.

또 예루살렘에서 실지로 들려 오는 사울에 대한 소식은 거짓이 아니라 사실이었고 그 당사자에게 하나님의 일꾼으로 안수를 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오히려 호소력이 없는 것이 아나니아에게는 당연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평가도 분명히 세상적으로는 좋지 않았을 것이고 그럼에도 주님은 그 평가와 같지 않은 것은 그분은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이것은 아나니아가 부정적인 평가를 할 수밖에 없는 가장 구체적인 사울의 행한 일들이었다.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과거의 행적이 부정적이었던 사울이 앞으로 이 다메섹에서 행할 일들이 결국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적의 연장이고 아나니아 자신을 포함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하기 위해서 이 곳에 와 있다는 정보는 역시 틀림 없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나타난 사울에 대한 평가나 판단은 확실하고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세상과 다른 특별한 가치를 아직 판단하지 못한 평가일 뿐이다. 비록 모든 것이 부정적인 사실이리지라도 그것은 아직 하나님의 그에 대한 계획이나 역사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는 데서 불완전한 평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정된 사람들은 반드시 사람들의 판단에 온전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사실이고 성경에는 오히려 그런 사람들, 그런 일들이 많다.

이런 이유에서 하늘의 사람들은 때로는 세상의 다수의 정보에만 민감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꾼을 시험해보고 검증해 보는 것이 보이는 세상적 기준에서만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오히려 의미를 잃을 수도 있다.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딤전3:9)

2. 그것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명령과 사명.(15~16)

“…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

인간의 모든 부정적인 소문과 평가에도 하나님은 달랐다. 당시의 사울에 대한 사실적인 모습을 사람들은 볼 수 없었고 사울 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을 가장 정확하게 아신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이 주님의 나라에 대하여 얼마나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인가를 이미 현재로 보고 계셨기 때문에 아나니아에게 이런 당부를 주고 계시는 것이다.

때로 하나님은 준비되지 않은 일 같은데도 우리를 향하여 “가라!”고 명하신다. 이럴 때 우리는 당연히 믿음으로 가야 한다. 우리 눈에는 준비되지 않았고 될 것 같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판단은 늘 옳기 때문이다.

아나니아는 이미 이 사람의 정보를 다 수집하고 자신과 관련된 신앙의 사람들에게 준비를 시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13~14) 라고 증언해 보지만 주님께서는 이 아나니아의 증언을 완전히 무시하시고 “가라!” 하시는 것이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15)시는 주님의 증거는 바로 아나니아의 증언에 대한 답변이다. 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고 한 고발에 대한 답변이다. 어쩌면 사람의 조언이나 의견은 전혀 무시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볼 수 없는 우리 눈이 갈 수 없는 곳까지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16)는 말씀은 역시 아나니아의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말과는 반대로 오히려 그가 이곳 다메섹에서부터 당해야 할 험준한 삶의 여정을 예고하시는 것이다.

사울이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 역시 같은 희생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바울의 운명적 미래를 말씀하시는 동시에 오늘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전하려 한다면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쉽고 편안한 것만이 아닐 것임을 가르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복음 증거에는 희생을 각오해야 하고 그런 희생의 각오에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

다음 주에 보게 되겠지만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행9:24~25)는 모습을 봐도 주님의 말씀은 증명이 되고도 남는다.

영적인 모든 일에 있어서는 사람의 판단과 평가는 무시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주님께서 다윗을 택할 때 하신 말씀처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을 반대하는 사람이 뒤집히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릇은 사람이 판단할 수 없다. 때문에 어설픈 사람의 판단과 정보보다 하나님의 판단에 철저할 수 있는 …



Ⅲ. 복종으로 세워지는 일꾼.(17~19f)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이것은 분명히 완전한 순종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함으로 불가능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보게 된다고 하는 데서 순종이 불가능할 때는 복종으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행해야 너도 살고 나도 산다는 사실을 배우는 것이다.

아나니아는 수많은 부정적인 사울의 무성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신뢰하여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접고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기꺼이 자신을 드린다. 그가 지금 무엇을 위하여 이곳에 왔음을 알면서도 자신의 운명을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믿음의 자세 때문에 그냥 이름 없이 끝날 이름이 오늘 21세기의 우리에게까지 그 이름이 읽혀지고 있음을 배워야 한다.

아나니아는 머뭇거림 없이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그것을 조금도 가감 없이 실천하고 당부한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17) 안수는 OT에서부터 언제나 직임을 위한 위임(委任)의 행동이다. 이러한 아나니아의 믿음의 실천이 있기 전까지는 아직도 사울은 눈먼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다음의 말씀은 그의 말씀을 따른 결과를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18) 이렇게 되었으면 다 된 것 같은데, 복음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즉, 거듭남의 구원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거듭나는 것이 요구 되기 때문에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 지니라”(18b~19)는 결과를 소개하고 있다.

이제 그의 소경 됨과 식음을 전폐한 사흘의 날은 과거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었고, 새사람이 되어 육신으로만 보이든 율법과 성경을 영안(靈眼)으로 보게 되었고 주님께 붙잡혀 쇠약해진 몸은 거듭난 피조물로 새로운 음식을 먹고 건강해 지지만 그 건강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그의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이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데 쓰이게 되었다.

때로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의 감성이나 지식으로 이해 안 되는 것들로 가득하다. 이제까지 듣고 배운 것들과 너무나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나의 판단이 아무리 논리적이고 바를 지라도 하나님의 판단과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명령과 반대되는 나의 지식과 감정을 주님 앞에서는 접어야 할 때가 신앙에 있어서는 바른 자세이다.

때로는 내가 수집해온 정보와 판단이 하나님의 말씀과 정 반대일 때가 있고,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잘못 명령을 주시는 것 같은 경우가 분명히 있을지라도 언제나 주님의 판단이 옳은 것을 인정하고 수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을 수용(受容)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진리는 늘 순종으로 채워져야 하겠지만 자신의 판단과 지식에 맞지 않을지라도 따라야 하고 그것을 우리는 복종(服從)이라고 한다. 순종이 안될 때는 복종이라도 하면 하나님의 일꾼은 세워지고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 바로 말씀의 신비한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