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행 9: 19b~31 2008-08-24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든든히 서 가고...  
사람을 통해서 할 수 없는 일이나 아주 특별한 일은 주님께서 천사를 사용하시거나 직접 이루시는 일들을 NT. OT. 를 통해서 더러 나타나는 일들이다. 사울의 경우가 그런 경우이다. 승천하신 주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삶을 180℃ 뒤집으시고 사흘 만에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을 보는데 이것이 어찌 보면 구원 얻은 삶의 전형적인 모범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또 사람의 삶이 바뀌는 데는 생각처럼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삶이 영적인 변화라고 할 때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것을 보는데 이것이 바로 하늘에 의해 주도되는 구원받은 삶이다.

사울의 변화가 구원의 모델이라고 하는 이유는 전혀 자신의 의도이거나 공로 없이 변화를 받았고 그 변화된 삶은 변화의 경험을 분기점으로 확실히 바뀐 삶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공로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삶의 변화는 시각적으로 나타남을 사울에게서 보게 된다.

베드로를 비롯한 12사도는 3년이란 세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서 훈련 받고 다듬어졌지만 실제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이끄는 일을 한 사울은 오히려 이방인 구원의 모범을 삼기에 충분하도록 순간적인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서신을 보내면서 고백하고 있는데 어찌 보면 오늘 본문의 배경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도 이해된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갈1:15~18)

이 말씀이 바로 다메섹의 주님을 만난 후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도들을 사귀고자 했던 잃어진 고리를 연결해 주는 내용으로 보충이 된다. 결국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을 만나 눈이 멀고 금식하며 기도하다가 아나니아라는 하나님의 종의 안수와 세례를 통해 거듭나고 이 아나니아의 소개로 다메섹 여러 회당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들과 협력하여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해 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사울을 기다렸지만 완전히 변심했다고 판단한 유대인들이 죽이려는 음모를 인하여 벗어나게 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으로 오늘 본문이 기록이 되고 있는데 자신이 쓴 서신들 중에 하나인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이를 보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바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아라비아에 3년을 머물며 주님과 깊은 교제를 가진 후에 게바 즉,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만나려고 시도했다는 경험을 갈라디아서에서 술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다른 종교인이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삶의 모범을 배우고 그러한 변화를 세상이나 과거의 함께 하던 사람들은 결코 기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각오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으로 사울처럼 충성하는 …



Ⅰ. 변화의 확실함을 나타내는 말씀이다.(19b~22)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다른 많은 세상의 종교처럼 몇 십 년을 수행하고 정진하는 많은 기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신앙의 연륜은 신앙의 깊이와 성장에 필요하긴 하지만 꼭 여러 해를 지내야만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사울처럼 확실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반드시 필요하기는 하다. 나의 죄인 됨에 대한 절망과 이 절망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위하여 십자가에 온 갓 저주와 절망과 고통과 고독과 실패를 대신 감당하신 주님을 만나야만 한다.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라는 고백을 십자가에 고난 당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한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19b~20) 나의 나 됨에 대한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을 인해서 라는 고백은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오랜 세월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메섹에서 주님의 제자들과 몇 일을 머무르면서 사울은 이제 자신의 하나님의 백성 됨이 율법을 지킴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말리엘의 교육에 의해서가 아니라, 베냐민 지파에서 낫기 때문이 아니라, 8일만에 할례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리새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때문이라고 증거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고백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고전15:10) 가능했다고 고백함을 듣는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 모두의 고백도 같아야만 한다.

믿음의 증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21)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변화된 삶을 인하여 놀라는 반응을 나타나냈다는 사실이다. ‘나는 변했어!’ 라는 스스로의 고백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변의 사람들의 입으로 인정될 정도의 변화임을 증거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즉,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다른 삶을 그를 보는 사람들로부터 증거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오늘의 상황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오히려 더욱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주님을 안타깝게 하는 시대에 있다. 적어도 이러한 평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즉, 세상적인 가치에서 살 때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결과가 비로소 승리하는 삶을 가능케 한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22) 거짓된 종교와 생명의 신앙의 간격을 드러내는 것은 그리스도인 된 삶으로 구별시키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생명이 있는가 없는가는 역시 삶으로 증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명한다는 사실에 도전을 받는 모두가 되어야 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스스로의 삶과 주변의 변화에 대한 평가를 들을 때 비로소 객관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주님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그의 백성들에게 힘을 주시고 더 주셔서 그리스도께서 생명 되심을 증명하게 된다.



Ⅱ. 거짓된 종교의 잔인성을 본다.(23~25)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그러나 이렇게 생명을 가지고 구별된 삶을 살고 거짓을 드러낸다고 해서 세상이 그를 환영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가진 생명을 죽이려고 시도하는 모습을 사울의 변화된 삶에도 불구하고 다메섹에서 당하는 어려움을 보면서 실감할 수 있다.

나중에 바울은 이 경험을 역시 고린도교회에 고백하는 것을 본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후11:32~33)

때로 믿는 사람이 초라해 보일 때도 있다. 같이 폭력으로 대항할 수도 있고 논리적으로 따져서 굴복시킬 수도 있지만 주님의 거룩한 이름 때문에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도망치듯 소극적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악을 악으로 대항하지 말라’는 주님의 가르침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도피를 통해 사울에게서 배우는 것은 때로는 나를 더욱 강하게 할 수도 있고 인내하게도 한다는 사실이다. 사울은 이렇게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미디안 광야의 모세처럼 아라비아로 가서 3년을 주님과 신령한 교제를 나누고 더욱 신실한 사람으로 단련 받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감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거짓된 종교의 가장 눈에 띄게 나타나는 문제는 이렇게 생명을 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데 용감하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많은 이단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폭로하고 드러내려는 자들을 죽이는 것을 어렵지 않게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바른 믿음은 생명을 살리려는 것이라면 거짓된 종교는 생명을 오히려 죽이려는데 용감하다는 사실로 검증된다.

모슬렘들이 ‘지하드’ 라는 미명하에 몸에 포탄을 짊어지고 많은 사람을 죽이는데 뛰어드는 것은 그 종교가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 죽음의 종교인가를 드러내는 증거들이다. 우리의 주님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반면에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빙자해서까지 사람을 죽이려는 거짓된 이단자들은 마지막 생명의 주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이다.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24) 어떤 계교도 하나님은 들어내신다.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10:26)

나중 23:16~18에 예루살렘에서 잡힌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음모를 조카를 통해서 천부장에게 알리는 것을 보게 되는데 바울은 여러 번 위기 때마다 미리 알아서 대처하는 모습을 이 사도행전 속에서 더러 보게 된다.

이것은 생명을 하나님께 맡긴 사람은 주님께서 친히 그 생명을 담보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종의 생명은 적어도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룰 만큼 하기까지는 어떤 위기에서도 그 사명을 위하여 주님은 그 사람의 생명을 철저하게 담보하심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25) 어찌 보면 ‘왜 하나님께서 여기서는 이적으로 사울을 피난시키지 않으셨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왜 거대한 이방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종을 겨우 떡을 담아 다니는 광주리에 담아 피신을 시키게 하셨을까?’ 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이작을 낭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쓰심을 귀하게 여기심을 여기서도 보게 된다. 복음을 천사나 이적으로 전하기보다는 “…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b)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분명히 이적으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지만 부족하고 무딘 우리를 쓰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에 감사할 필요가 있다.

어찌 보면 의기양양하게 다메섹 도성을 걸어 나오는 것이 복음에 더 유리할 것 같은데 하나님은 사울을 겸손케 하시기 위해서인지 떡 광주리(막8:8 -七餠二魚)에 담겨서 다메섹을 벗어나게 하신 것은 또 다른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너는 내가 먹어 없엘 수 있는 떡 조각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Ⅲ. 예루살렘에 올라간 사울.(26~31)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울은 자신의 주 활동 무대였던 예루살렘에 올라가는데 이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그가 박해하고 죽이고 괴롭혔던 주님의 제자들과 사귀고자 손을 내밀어 보지만 그의 변화를 믿어주는 사람이 없고 다 두려움의 대상으로 경계를 하는 것은 유대 제자들의 신중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26)

우리가 때로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역시 인간됨으로 다가갈 때가 많다. 주님 앞에 변화 받은 생명임에도 믿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의 사람으로 밖에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모두의 책임이 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변화된 삶을 보이지 못하는 것이 첫 번째 원인이라면 변화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 과거의 사람으로만 봐주는 그런 이유에서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하는 경우를 성경은 지적하고 있다.

이 안타까운 상황에서 주님은 이미 예비된 한 중재자를 드러내고 있는데 바로 바나바 라는 사람이었다. 4:36에 이미 이 사람의 인간됨을 소개한 바 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 바나바는 그의 이름답게 그에게 가장 적절한 역할을 감당해 낸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27) 우리는 앞에서도 이미 말한 바 있지만 바나바와 같은 인물들이 참으로 필요하다. 하나님은 이 바나바를 통해서 적어도 예루살렘에서 사울이 사울되게 하신다.

바나바를 통해서 사울은 예루살렘의 제자들과 교제를 시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있게 증거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철학으로 무장된 헬라파 유대인들까지 설득시키는 능력까지 나타낸 것 같다.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28~29f)

그러나 여기에서도 이 변화된 하나님의 사람은 환영 받지 못하고 죽음의 위기를 만나게 된다. “…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29b~30) 이래서 신앙의 형제는 아름답고 감사하고 위대하다. 본격적인 꿈을 펼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지만 사울은 또 다시 다음의 역사를 준비하게 하기 위하여 잠시 고향인 다소로 보내진다.

그럼에도 교회의 번성은 끝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31)는 말씀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6:7)는 복음의 출발지인 예루살렘의 번성과 또 다른 의미를 예고하는 전조이다.

잠시 다소로 보내진 사울이 안디옥을 통해서 땅끝으로 복음을 들고 나가기 위한 준비의 시기가 되었고, 다시 예루살렘의 중요 인물인 베드로 사도의 이방인 구원의 역사까지인 11장에까지 복음의 주역으로서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사울은 구원의 모델이다. 자신의 증거와 주변의 증거는 물론이고 그의 주님께 대한 순종에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복음은 사람을 놀랍도록 변화 시킨다. 그 변화는 먼저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통해서 나타나고 주변의 변화에 대한 평가를 들을 때 비로소 객관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주님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그의 백성들에게 힘을 주시고 더 주셔서 그리스도께서 생명 되심을 증명하게 된다.

세상에는 생명을 살리는 신앙과 죽이는 종교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다. 생명의 믿음의 법과 죽음의 종교는 그것을 추종하는 삶에서 드러난다. 생명을 가진 자는 때로 그 생명에 위협을 받아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참 생명의 주님께서 그 생명을 담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된 종교는 사람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으므로 쉽게 사람을 죽여서라도 자신들의 이권과 자존심을 지키려고 생명을 찾는데 혈안이 된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을 대할 때 과거의 그 보다는 새로운 사람으로서 그를 대하는 것이 중요하고 새로운 삶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직접 복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나바와 같은 중재자로서의 역할이 내가 할 수 없는 큰일을 다른 사람으로 통하여 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복음은 세상의 어떤 이론도 파할 수 있는 강력이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4~5)

그렇기 때문에 어떤 철학보다도 강력한 구원의 이론이다. 그러나 그 이론이 울리 믿음의 사람들의 삶으로 뒷바침 되어질 때 더욱 강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세상의 복음으로 무장된 자신의 원수와 같은 존재를 죽이려고 힘쓰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피를 바탕 한 형제에는 믿음 때문에 죽음에 던져진 자를 살리고 그를 보호해 준다.

이런 귀한 사랑의 협력 가운데 교회는 든든히 서가고 수를 더하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우리의 신앙적 역할로 이루어짐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