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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에서 이방전도를 위한 일꾼을 마련하신 하나님은 이제 예루살렘의 수사도 격인 베드로를 통하여 유대와 사마리아를 두루 행하게 하여 아직도 귀화된 유대인들이기는 하지만 율법적으로 정결하지 않게 여겼던 사람들에게 까지 복음으로 접근하는 모습들을 보게 되고 이 베드로는 지중해 근방인 룻다와 욥바(43), 그리고 가이사랴의 고넬료까지의 구원에 동원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유대인으로서의 편견은 최소한 형식적으로라도 아브라함의 육신적 혈통인 유대인으로 귀화한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선택의 대상이라는 생각으로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보내지는 과정에서는 이것을 깨뜨리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적 가르침과 그럼에도 깨어지지 않는 사도들의 아집과 독선은 이러한 베드로의 예루살렘으로 돌아 갔을 때에 몰아 세우는 다른 사도들의 모습에서 여전하다.
이렇게 베드로가 주축이 되는 복음증거의 사역과 이 부정하게 여긴 사람들의 변화의 경험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는 모습에까지 기록되는 내용으로 11:18까지 계속되고 그 이후부터는 드디어 안디옥을 새로운 복음의 중심지로 한 이방세계의 복음의 확산을 변화 받은 바울을 중심으로 이루게 된다.
특히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두 개의 베드로 사도를 통한 기적은 죄로 불구가 된 인간의 회복과 그 결과로 죽게 된 비극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의 목적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러한 생명의 역사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같은 구원에 동참케 되는 구원의 확산을 일으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또 이 베드로 사도의 치유사역을 통하여 고침 받고 다시 살림을 받은 사람 둘이 남자와 여자 라는데도 인간구원의 역사의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남자는 불구의 중풍병자였고 여자는 죽어 있는 절망에서 일으킴 받음을 보는데서 죄로 이끈 하와와 아담의 후손들의 회복으로서의 교회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하나님의 분명한 진리가 정돈되어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점에서 육신적인 기적이 드물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도 우리 모두의 변화된 생명의 삶의 모습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생명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구원의 매개체로 역할 하는 …
Ⅰ. 하나님의 치유는 오직 긍휼히 여김에서 나타난다.(32~35)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 지 팔 년이라,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운명을 바꾸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은 예루살렘에만 머물다가 사마리아를 심방하여 구원의 역사를 확인하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하신 베드로를 유대의 다른 지역들로 순회하게 하셨다.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32)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라는 표현을 볼 때 단순히 이 말씀에 기록된 곳만이 아닌 주변의 여러 지역을 순행하였고 특별히 하나님의 큰 역사를 나타내고 경험하는 곳의 이름들을 기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32b)라는 기록으로 볼 때 예루살렘에 일어난 큰 박해 때 흩어진 사람들이 이미 그곳에도 복음의 씨를 심고 결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8년 동안 중풍병으로 있던 [애니아] 라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분명한 기록이 없어서 알 수가 없다. 다만 그의 이름이 [애니아, 칭찬 듣는 자] 라는 것으로 봐서 착한 사람이거나 그리스도인이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이 사람은 베드로에게 자신의 불편을 호소하고 고쳐 달라는 부탁이나 요청을 하지 않았지만 베드로를 통하여 완전한 치유를 허락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34) 기도했다는 기록은 없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치료자 이심을 증거한다.
어찌 보면 육신의 중풍병으로 평생을 불구자로 사는 것도 불행이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죄의 결과로 영원한 불구의 상태 즉, 지옥의 고통은 비교될 수 없는 영원한 절망이요 저주가 될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어떤 종류의 죄로 인한 저주이든지 완벽하게 치료 하신다는 사실이다. 할렐루야!
그러나 베드로의 치료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이 말씀은 사울의 변화를 비교할 수 있는 엄청나게 귀중한 요청이 담겨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저주로 죄와 저주의 중풍병의 자리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과거의 자리에 연연하여 죄의 자리 절망의 세상의 자리를 정리하지 못하고 그대로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루살렘 양 문 곁의 38년 된 중풍병자에게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요5:8) 마가복음 2:9의 네 친구들의 손에 들려온 중풍병자에게도 주님께서는 같은 당부를 하셨고(“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그들은 다 기꺼이 그렇게 했던 모습을 본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저주를 치료 받았다면 그 사람은 이미 같은 당부를 듣고 있는 것이다.
오늘 나(우리)는 어떤가! 과거의 자리를 아직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알기 전의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나서 이제는 영적인 걸음을 걷는 …
Ⅱ. 하나님의 치유는 믿음과 사랑을 확신시킨다.(36~42)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룻다는 그래도 직접 바다와 접하지 않은 내륙에 있는 곳이었다면 두 번째 부활의 역사가 일어난 욥바는 유명한 요나의 불순종으로 다시스로 출발한 이스라엘의 항구 도시이다.(욘1:3)
여기에는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라는 것으로 봐서 그녀는 분명히 믿는 사람이었고 특히 선행을 많이 행한 경건한 신앙인임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 36절에서뿐만 아니라 나중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과부들의 증언에서 들을 수 있다.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39b)
그런데 왜 이 경건하고 아름다운[다비다(아람); 도르가(헬) 가젤영양, 암사슴(아7:3) 암노루] 이 여인이 아직 죽을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죽었을까 의문이다. 그러나 그 나타나는 결과를 볼 때 경건하여 안타까운 이 여인의 죽음은 역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11:4)이었음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앞의 애니아처럼 베드로의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기서는 함께 신앙하는 쉽게 말하면 욥바에서 같이 신앙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속히 오라!]는 요청은 듣는다.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17Km)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38)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비로소 평가가 됨을 본다. ‘안타깝다!’는 표현보다 ‘에이~ 잘 갔다’는 식의 주변 사람들의 말들은 그 사람의 삶을 정리하는 결론이 될 수도 있다.
함에도 이 다비다는 한결 같이, 그것도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낼 만큼 귀한 삶을 살았음을 배운다. ‘오늘 내가 세상을 떠난다면 사람들은 무엇이라 평가를 할까!’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귀한 한 여제자의 죽음은 욥바의 모든 사람들을 안타까움으로 눈물짓게 했고 그렇기 때문에 멀지 않는 곳에 머무르는 베드로를 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된 소녀를 살리실 때 주님께서 요한, 야고보와 자신 외에는 모든 사람을 내어 보낸 후에 “다리다굼!” 하셨던 것처럼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40)는 같은 기록과 함께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고 나사로를 불러 내시던 주님처럼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생명을 불러냄을 본다.
앞의 애니아를 치료할 때는 기도한 기록이 없지만 이 도르가를 살리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도 다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루신 이 놀라운 역사를 안타까워하던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41) 아마도 사람의 경건이나 능력으로 도르가를 살린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신앙적 역사를 확신하게 하려고 사람들을 다 내어 보낸 후에 기도하고 하나님께 부탁을 드렸지만 회복의 기쁨은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눔의 모습 속에서도 우리 모두의 신앙의 자세를 일깨운다.
대개 있어지는 치료의 역사에서 우리는 ‘~와 기도함으로 이 일이 이루어졌다’고 주님의 역사를 인간의 경건으로 약화시키는 경우들을 베드로는 미연에 방지함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역사가 무엇이 되었든지 그것을 사람이 차지해서는 옳지 않은 것이다.
이 은혜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헌신했던 도르가를 회복시키실 뿐 아니라 또 그의 죽음으로 안타까움을 고백하는 과부들의 안타까움도 치유하고 계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생명의 회복은 어떤 종류의 안타까움이든지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과 신뢰를 영광으로 회복하시고 확신을 주심을 깨닫게 한다.
Ⅲ. 베드로를 통한 치료의 역사는 사람들을 주께 돌아오게 하였다.(35, 42)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사실 모든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는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의 회복을 위한 것뿐이다. 그럼으로 불치의 병을 고치심이나 죽은 자를 다시 일으켜 살리시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허락하신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모두 유익한 것들뿐이다. 다만 조건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방법과 목적을 따라 사용할 때 그럴 것이다.
오늘 날 우리가 사도들의 시대처럼 기적의 역사를 흔하게 경험할 수는 없다. 기적은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은 분명히 진리가 확정된 오늘의 기적과는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이 베드로 사도를 통한 치유와 생명회복의 결과는 같은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의 치료의 역사는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였음을 본다.
요한 복음에 기록된 주님의 7가지의 정선된 기적의 역사들은 대부분의 결론을 오늘 두 사건의 마무리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2:11b) ~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11:45)로 마무리 하고 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두 가지 사건의 마무리가 달리 기록되어 지고 있다는 것인데 애니아의 치료를 통해서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는 것이고, 도르가의 부활은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는 것이다. “보고” 라고 하는 것은 보이는 표면적인 것이라면 거기에서 더욱 성숙하게 나아가서 알고 믿는 것이다. 그럼으로 신앙의 진보에서도 그렇다. 처음에는 보고 믿지만 점점 성숙해 갈수록 알고 믿게 되는 것이다.
또 한가지 여기서 노치지 말아야 할 것은 “주께로 돌아가니라”는 표현이다. 돌아간다는 표현은 떠나온 것을 전제로 한다. 이 애니아의 치료를 보는 사람들이 마치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탕자처럼 떠나온 인간의 본향인 하나님께 돌아가게 되었다는 깊은 의미이다.
또 애니아의 치료의 역사는 그 역사의 현장인 룻다 뿐만 아니라 그 이웃 마을인 사론까지 ‘그의 치료의 사실을 보는 사람은 다 주께 돌아 가니라’는 시너지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면 도르가의 부활은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42)고 기록하였다. 온 욥바에 사는 사람은 다 이 소식을 알게 되었으면 다 믿을 것 같은데 결과는 ‘많이 주를 믿더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는 병이 낳은 것 보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일이 더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할 것 같은데, 중풍병으로 수족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의 방법으로는 어쩔 수 없었는데 성한 것을 보면 그 일을 보는 사람들은 신기해 할 수 있지만, 아직 죽을 연령이 되지 않은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믿음을 가지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런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유 중에 하시는 말씀이 부자는 “…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눅16:30b) 하였지만 “…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눅16:31)고 경고 하셨다.
오늘 마지막 절은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43)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내용이 아니다.
율법에 기록하고 있는 대로 죽은 짐승의 시체이나 일부분에 접촉되는 것조차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결하게 여겼다.(레11:39 ) 이런 이유에서 유대인들은 가죽을 가공하거나 세공 하는 사람들을 부정한 자로 여겨서 함께 거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지식이다.
그러한 자의 집에 유했다는 것 즉, 먹고 자는 행위를 한 것은 적어도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예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열려 진 베드로이지만 고넬료에게 보내지기 전에 더 명확한 증거들을 보이셨음에도 그 주님의 당부를 거절하는 것을 본다. 여기에 대해 심지어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10:15)는 책망까지 하심을 듣는다.
베드로 사도의 유대 주변을 순회하는 사역들은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처음 주신 주님의 당부(1:8)에 대한 순종이었다. 사울의 변화의 소식을 듣고 주님의 명령을 회상했든지 아니면 예루살렘에 일어난 큰 박해로 인함이든지 그것도 아니면 흩어진 자들로 통해서 증거된 복음으로 사마리아의 변화를 직접 확인해서인지, 아니면 이 모든 당시의 상황 전체를 종합한 결과인지는 기록에 없어 모르지만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것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확신하고 마치 주님과 같은 모습과 방법으로 고치고 살리면서 복음을 전하는 모습들을 본다.
하나님의 긍휼은 모든 인류를 향한 것이고 죄의 결과로 나타나는 모든 비극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감당하신 십자가의 희생의 피로 회복하시기를 원하신다. 그 희생이 세상과 우리를 살게 하시고 고침 받기를 원하시고 기대하신다. 이것이 복음의 목적이고 이유이다. 보고 돌아오는 시작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성장을 바라시고 기다리신다.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고 알게 한다.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그대로 멸망에 버려지기를 원치 않으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이왕에 드려진 한번의 제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인류와 족속이 하나님의 허락하신 구원을 헛되게 흘리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주어진 모든 것들을 통해서, 그것이 말씀이든 기적이든 사람이든 물질이든 지식이든 잃어진 영혼의 회복을 위해 쓰여지기를 바라시는 주님이시다. 물론 그 모든 것의 바탕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과 승리의 부활을 기초로 주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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