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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가 현실이 되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이 시행됨에는 반드시 사람들의 믿음과 순종을 필요로 한다. 사람의 완전한 순종이 하나님의 계시를 이루게 됨을 본다. 여기서는 구약의 율법이 정지되고 새로운 복음이 효력을 나타내는 것을 보는 것이다.
다만 고넬료는 구약 율법의 계명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던 사람이고 베드로는 자신의 고백대로 율법의 가르침과 그것을 지킴에 철저했던 사람이다. 여기에 비로소 유대인과 이방인, 율법과 법 없는 자들이 일반으로 하나가 된다.
오늘의 말씀은 그 말씀의 흐름의 순서보다는 세 종류로 나타나는 인물들을 내용으로 다루는 것이 더 박진감 있고 이해가 쉬울 것 같아서 그런 형태로 다루면서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은 우리 각자의 자세와 결단을 요청하고자 한다.
이 말씀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그들의 가진 신앙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서로 다른 입장의 세 부류의 사람이지만 전혀 다른 배경과 경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순종하는 믿음의 자세에서는 하나로 만나고 있음을 본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의 순종과 함께 주님의 사람들을 대함에까지도 믿음의 덕으로 다가서는 것을 본다. 뿐만 아니라 비록 베드로가 확신을 가지 못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확신을 얻고 난 후부터는 말씀을 행함에 있어서도 서로가 조금도 머뭇거림이나 더 이상의 의심을 갖지 않음을 본다.
이런 모습에서 하나님에 대한 같은 믿음과 그의 종들에 대한 신뢰는 귀중한 상관관계를 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그 말씀을 가졌다고 믿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고넬료의 종들은 그때까지의 유대인들에 대한 경험과 편견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인 베드로를 청하러 감에 머뭇거리지 않았고, 비록 처음부터 그렇지는 못했지만 베드로는 고넬료의 보낸 종들의 요청을 거절치 말도록 천사의 지시를 받고 그들을 따랐다면, 고넬료의 가족들은 베드로를 마치 하나님을 기다리듯 준비된 상태로 기다리고 있었고 고넬료는 자신의 부름에 응답한 베드로를 마치 하나님을 대하듯 정중한 서로의 모습을 오늘 본문 속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이들과 같은 복음의 말씀과 성령을 순종한다면 같은 모습을 나타낼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믿음 안의 불협화음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런 신앙적 바탕이 되어 있을 때 비로소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4~6) 라는 말씀이 사실적으로 우리의 것이 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주시는 교훈이 분명한 이상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처럼 자신의 판단이나 생각을 접고 하나님의 가르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즉각적으로 순종 하는 …
Ⅰ. 경건한 사람 밑에 경건한 사람들을 본다.(고넬료의 종들, 17~22)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순종이 믿음의 행동으로 구체화된다.
지난 시간에 말했듯이 걸어서나 느린 나귀를 타고 여행하는 거리에서 50Km의 간격인 가이사랴와 욥바 사이의 움직임은 자동차를 가진 지금의 시대와 비교한다면 생각처럼 가까운 거리는 분명히 아니었을 것이고 만약에 고넬료의 종들이 주인과 같이 경건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순종하는 대신에 오히려 불평을 할 수도 있을법한 명령이었다.
‘이제는 집안 일도 모자라 이 먼 거리를 갔다 오라고, 아니 그것도 일상의 문제도 아닌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환상을 보고 그대로 하려는 것은 정상이 아닌 것 같아!’ 불평할 수도 있지만 이 종들과 부하는 조금의 불평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두 종들과 한 부하는 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함께 가게 한 것 같다.
결국 그러므로 베드로에게 주신 환상도 성취시키고 이방인들을 마치 불결한 짐승처럼 취급하던 베드로에게 새로운 믿음의 눈을 뜨게 하는 계기를 주기도 했다. 세상의 대부분의 특성들도 그렇겠지만 무엇보다도 신앙은 경건한 사람과 훈련을 받는 것이 이래서 중요하다.
이 종들은 주인의 지시에 따라 그대로 찾고 움직인다. 가이사랴에서 욥바에 도착하여 가죽세공 하는 시몬의 집을 찾은 이들은 자신들이 이방인들이기 때문에 유대인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18)고 집안의 반응을 살피자 지붕에서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19) 여기서도 절묘한 하나님의 역사를 본다.
드디어 하나님은 자신의 본 환상으로 고민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확신을 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은 베드로의 모습보다는 이 백부장의 하인들의 자세를 살피고 있다.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22)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당시의 일반적인 로마의 높은 신분의 가정의 종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당시 하나님을 모르는 로마 사람들은 종을 자신의 제산으로 취급하여 혹독하게 부릴 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대우를 해주지 않았고 여종일 경우는 성적인 노리개로 다루었고 이러한 부도덕한 주인들의 행동은 종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기 일수였었다.
오늘 날도 자신의 상관을 억지가 아니면 좋게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시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자신의 주인인 고넬료를 섬기는 이들은 고넬료를 단순한 주인으로 받들어 섬기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거룩한 분으로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그들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고 또 말에서나 일에서나 삶에서 다른 주인들과 다른 구별됨을 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며 양은 양을 낳고 나귀는 나귀를 낳을 뿐이다. 오늘 우리가 경건하지 못하면서 경건한 자녀와 경건한 부하를 기대하는 것은 독선이고 지독한 이기주의일 뿐이다. 우리 모두가 고넬료와 같은 경건의 사람이 될 때 같은 수준의 자식과 일꾼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율법이 없는 이방인도 하나님이 받으셨음을 고백하게 되는 베드로.(17-29)
[본문 읽기-화면상으로]
꼭 같은 본문이지만 이 내용에는 군데군데 고넬료의 종졸들에 대한 반응과 함께 베드로 사도의 하나님과 이방인들에 대한 보다 진전되는 반응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교제하다가 예루살렘의 야고보에게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왔을 때 마치 이방인과 함께 먹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사도 바울에게 면박을 당한 경우를 제외하고 베드로는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을 복음 속에서 구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인하여 율법을 넘어서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는 베드로를 보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17~21)
앞에서 봤던 대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상을 보면서도 아직까지 확신치 못함을 보인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13)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15) 그리고 3번씩이나 반복적으로 환상을 주셨지만 오늘 본문의 서두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주신 환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해 있는 베드로를 보게 된다.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17) 그러나 좀더 구체적인 명령이 성령으로부터 주어진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그 환상이 말하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19f)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19b~20)
하나님은 자신의 본 환상으로 고민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확신을 주신다.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20) 이제 베드로의 고민은 사라지고 자신이 먼저 그들 앞에 나아간다.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21) 욥바에서 본 환상이 아니었다면 이방인들의 요청에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율법을 넘어서 복음으로 나아가는 베드로 사도의 변화를 본다.
베드로의 변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의심이 사라진 이상 하나님의 지시를 행함에는 베드로 사도답게 과단성을 본다. “베드로가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새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가니라”(23) 욥바에서 자신을 찾으러 온 형제들을 불러들여 함께 숙식을 하고 이튿날은 자신의 일행 몇 사람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의 현장으로 떠난다.
또 다시 꼬박 하루가 걸려서 가이사랴에 도착하고 자신에게 최고의 존경을 표하는 고넬료에게 자신도 꼭 같은 사람임을 밝히고 자신의 입장과 하나님의 역사로 인한 예전의 생각을 버리고 부름을 따라 온 사정과 자신의 믿음의 변화를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한다.
“…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28~29)
이 말씀 속에는 자신의 본래적인 입장과 하나님께서 자신을 변화시킨 역사를 고백하고 있는데 이미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환상에서 주님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는 음성에 응답했던 내용을 우리는 앞에서 볼 수 있었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14) 과거의 자신의 성결을 위한 율법을 지킨 사실을 고백했지만 주님께서는 거기에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15)고 새로운 확신을 선언하신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보이는 모습에서 우리 사람들은 부정해 버리는 예가 바로 이방인과 같은 예이다. 이러한 사실을 다시 기억하면서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신앙적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28) [다른 종교인들이나 오늘 같은 날의 우상 숭배자들 조차도] 어떤 상황에서든지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은 하나님의 명령이 언제나 첫째이다.
그런 것을 주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부터 여러 번 경험해온(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라!) 베드로 사도이기 때문에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29) 라고 고넬료에게 정중히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부분에서 가진 것은 무조건 지키려는 소위 말하는 보수적 성향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시대에 뒤떨어지기 때문에 버리는 것은 안되겠지만 하나님께서 “놓아라!” 하시면 놓아야 하고 “잡으라!” 하면 잡아야 하는 것이 바른 신앙이고 베드로 사도에게서 배워야 할 자세일 것이다.
우리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명령보다 사람의 전통을 더 중하게 여기는 것을 보면 그렇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은 시대가 바뀌어도 유행에 뒤져도 순종해야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것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신앙적 자세이다.
이런 입장에서 베드로 사도의 획기적인 변화는 높이 사야 할 신앙적 자세이다.
Ⅲ. 하나님의 지시로 베드로를 청하여 구원의 말씀을 들으려 하는 고넬료.(24b~25, 30~33)
“…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고넬료가 가로되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느니라 하시기로,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위에서 봤던 두 부류의 신앙의 자세에 결코 뒤지지 않는 고넬료의 모습으로 이 말씀을 마무리 한다. 비록 구원의 확신도 갖지 못했지만 이 사람의 경건은 구제와 기도를 생활해 왔고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4]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더 구체적이다. ①기도는 들으시고, ②구제는 기억”(31) 라는 천사의 전달을 받은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물론 베드로 혼자만의 순종도 고넬료만의 순종으로는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서로의 순종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된다.(다음시간)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24b) 이 명절에 우리는 이 고넬료의 자세를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가나 가까운 친구를 언제 모으는가? 고넬료처럼 말씀을 듣는 사경회에 일가 친척을 모을 수 있을까? 그것도 요즘처럼 복음이 보편화 되지 않은 때에 말이다.(물론 오히려 어두운 시대이기 때문에 유리한 것도 있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넬료는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11:14) 하는 천사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25) 라는 정중한 자세로 맞이한다.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사람이라는 확신 때문이었기에 더욱 정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넬료는 자신의 경험을 숨김없이 그대로 베드로 사도에게 내어 놓는다.(30~32) 천사의 지시를 받아 신앙을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만은 그것도 고넬료 같은 신앙적 자세를 갖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고넬료의 결정적인 신앙적 모습을 보게 된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33) 오늘도 이렇게 영적으로 준비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아끼지 않으실 것이다.
①제가 필요해서 청했는데 잘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청함의 이전에 고넬료의 신앙적 자세가 간과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 할 바를 다하면서 필요를 요청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다. “주를 찾는 모든 자로 주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로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70:4)
②주님께서 당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모든 것을 듣겠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좋은 것이던 궂은 것이든 말씀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듣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84:11)
③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베드로 라는 사람 앞에서가 아니나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기 위하여 보내신 사람이기 때문에 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고백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앙적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는 고넬료와 그의 가족 친구들에게 넘치는 은혜를 쏟아 붓는다. 하나님은 오늘도 꼭 같은 주님이시고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을 외면치 않으실 것이다.
비록 종살이 하는 사람들이지만 주인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원망하는 주인이 아니라 존경하고 감격하는 가운데 섬기고 신앙하는 종들은 당시의 믿음이 없는 주인들보다 행복한 삶이었고 신앙으로 이루어지는 삶은 같은 믿음을 나누는 주인의 명령은 무엇이든지 감사로 순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계를 기대한다면 우리 자신이 먼저 경건한 사람이 되어야 자녀들과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같은 모습을 기대할 수 있다.
철저한 보수주의자였던 베드로였지만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15)시는 말씀을 순종으로 받들어 인간의 모든 판단을 버리고 하나님의 판단에 자신을 맡기는 모습을 배운다.
비록 세상적으로 보장된 자리였지만 로마정부가 주는 그 어떠한 가치보다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고 오직 영적인 일들을 위하여 삶을 진행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면 무엇이든지 듣겠다는 자세와 늘 하나님을 의식하는 거룩한 삶은 최초의 이방인 구원의 모범이 되고 있다.
이 세 종류의 사람들과 오늘 나(우리)는 어떤 신앙적 차이를 가지고 있는가? 고민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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