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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15:30~41 2009-01-04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율법의 문제로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안디옥 교회의 대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에서 함께 보낸 사람들이 안디옥으로 돌아와 어찌 보면 전전긍긍하고 있던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에게 사도들과 장로들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권위로 문제의 해결점을 전달하면서 오히려 이방교회의 형제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고 다른 누구의 위로보다 주님의 권위를 통한 성령의 위로는 안디옥 교회의 고민을 씻은듯이 해결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진리가 아닌 어떤 종교적 계율도 사실 쓸데없는 짐일 뿐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다시 오심만이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기대와 소망일 뿐이다. 믿으려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십자가를 가로막는 다른 짐 같은 것들로 어렵게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저주받아 마땅할 것이다.

사실 이 15장의 사건이 1세기에 없었더라면 오늘 우리에게 까지도 복음과 율법 속에 혼란을 겪을 수 있었겠지만 지혜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을 미리 아시고 이방교회의 출발지인 안디옥에서부터 이 문제를 돌출 시켜서 일찍이 이러한 혼란을 잠재우시는 지혜를 보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바울 같은 고백을 드릴 수밖에 없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이 모든 것이 바로 십자가의 지혜요 감추어진 지혜요 하늘의 지혜인 것이다.

또 이러한 고민과 안타까움은 당시 비단 안디옥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안디옥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은 비시디아를 비롯해서 수리아와 길리기아의 모든 이방 교회들은 틀림없이 이러한 문제의 발단과 진행을 전해 듣고 안디옥교회와 같은 심정으로 예루살렘의 해답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36)는 제안을 바나바에게 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 일이 마무리 되면서 바울의 이 제안은 이제까지 좋은 팀웍(team-work, 동역자)으로 함께 일했던 바나바와 바울 사이에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켰고 마침내 선교팀은 둘로 나누어 육로와 바닷길로 떠나게 되는데 어찌 보면 이 불미스러운 일조차도 합력해서 선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깊이 경험케 한다.

오늘도 세상과 세월의 물결 속에 복음으로 행하는 일들이 여러 가지 암초에 부딪힐 위험성은 언제 어디서든지 도사리고 있고, 이러한 위기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하나님께 잘 가져가는가?’ 하는 것이 복음의 동역자들의 과제이다.

어찌 보면 성경 속에 빼버렸으면 하는 오늘 말씀의 뒷부분 즉, 바울과 바나바의 심히 다투고 피차 갈라서는 불미스러운 일들을 통해서도 배우게 하시고 지혜롭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무한하신 용서와 사랑을 인하여 더욱 찬양하게 된다.

이 21세기의 그리스도인 세계에서도 복음 속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세상의 방법과 지혜로 해결하려 한다면 오히려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의 문제는 주님께 올려드리고 오직 말씀과 기도로 거룩함을 받으려는 자세가 될 때 인간의 어리석음이나 부족함 조차도 은혜로 바꾸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을 맛보게 될 줄로 믿는다.



Ⅰ. 안타까워 하며 기다리던 일에 오히려 위로의 말을 듣는다.(30~35)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안디옥에서 율법의 문제로 바나바와 바울을 예루살렘에 보낸 기간이 정확하게 언급이 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 기간이 얼마가 되었든지 안디옥과 이방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대단히 길게 느껴지는 초조한 기간이었을 것이다. 과연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바울과 바나바는 어떤 결론을 가지고 돌아올 것인가?

그러나 기린처럼 목을 늘어뜨리고 기다리던 사람들은 마침내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안디옥에 도착했고 기도와 기다림으로 지쳐있던 교우들을 모은 예루살렘의 파송자들은 그들을 책망하고 두렵게 하는 대신에 위로의 말로 기뻐할 수 있었다.

저들이 받아서 읽었을 편지의 내용을 되돌아 보면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행15:24, 28~29)

이러한 내용과 보낸 사람의 위로를 듣는 안디옥과 이고니온을 비롯한 이방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얼마나 감격이 됐을까 짐작이 된다. 그 동안 힘들었던 시간들을 충분히 갚고도 남을 수 있는 위로였을 것이다. 우리말에 ‘십 년 된 체증이 내려간 듯하다.’ 라는 말이 아마 여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이 될 것이다.

이 역사는 어찌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면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신앙하는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주실 위로와 상급의 모형 같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마치 예루살렘에서 오는 길을 매일매일 바라보며 기도하던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이나 마치 일제시대 때 감옥에 갇혀서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며 감옥의 고통을 잊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죄악 된 세상에서 믿고 순종하는 삶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러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여기에 비긴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성경만이 옳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어리석다고 비아냥거리면서 시대와 상황을 적절히 융합하는 것이 이 시대에는 더 합리적이라는 이론들이 더 많기 때문에 신앙적 안타까움을 가장 분명하게 규명하고 판단해 주시러 오실 분이 주님뿐이기 때문에, 진리를 순종하려는 사람들의 기대는 이 세상이 채워 줄 수 없고 위로를 줄 수 없어서 이 안디옥 교회의 주님의 백성들의 기다림이 더욱 이해가 된다.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32~33)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견한 유다와 실라가 안디옥 형제들을 권면하고 믿음을 굳게 하는 일들도 복음의 출발지인 예루살렘 교회의 사랑이고 배려였을 것이다. 안디옥 교회는 이러한 사랑에 합당하게 형제애로 대우하고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35) 예루살렘에서 파견한 사람들이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 갔다는 기록에서, 왔던 모두가 다 간 것 같지는 않다고 보는 것은 “… 다수 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는 말씀과 마지막 단락에서 보는 것처럼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40) 라는 사실 때문이다.

바울과 바나바의 변함없는 충성과 여기에 합류했을 실라 같은 사람들이 안디옥 이방교회의 믿음을 더욱 굳게 가지도록 권면했다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안디옥 교회와 같은 취사 선택의 문제가 여전히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혼란할 필요가 없는 것은 이 사건을 비롯해서 모든 신앙의 규범을 빠짐없이 기록한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 주님의 진리에 흔들림이 없는 확신을 가짐으로 주님 다시 오실 때에 잘했다 칭찬 듣는 백성으로 사시기를…



Ⅱ. 공의와 사랑의 간격을 본다.(36~38)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안디옥에서 가르치던 바울은 어느 날 갑자기 바나바에게 일차 전도여행 때 함께 복음을 전했던 곳으로 어떤가 돌아보자는 제안을 한다. 이것은 아마도 앞에서 이미 언급했던 대로 그들에게도 이 율법 문제의 파장이 없지 않았으리라는 염려 때문이었던 같다.

그러나 처음 안디옥을 떠날 때처럼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의 제의에 문제가 되고 만다.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38) 여기에 바울이 문제 삼는 내용을 보면 앞에 아주 간략하게 거론 되었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마가 요한의 행동이 분명히 신앙의 유약성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바보’ 라는 구브로의 동쪽 항구에서 엘루마라는 박수무당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총독인 서기오 바울을 개종시킨 후(행13:4~13)에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라는 짧은 기록이 우리가 가진 성경에서는 전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많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마가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사실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바울의 표현처럼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말로 미루어 분명히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간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 내용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양면을 또다시 보는 것 같다. 바울은 공의를 더 강조하는 사람이었다면 바나바는 은혜와 사랑을 더 나타내는 인물이었었고 어떤 면에서 사람은 이 양면에 다 철저할 수 없음을 배우기도 한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가진 성품과 특성을 따라 일을 맡기시고 또 일하게 하심도 배우게 되는, 어찌 보면 과거의 과격한 바울 대쪽 같은 사울 때의 성품이 여기서 나타나고, 바나바는 실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변함없이 대하자고 하는 온건적인 성품이 역시 바나바 답다. 사실 이러한 바나바의 온건성이 없었다면 여기의 바울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성경의 기록은 마가가 바나바의 생질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어떤 면에서는 바울의 입장이 이해되기도 한다.[골4:10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온건한 사람들이 사실 우유부단한 면은 없지 않다. 그래서 순한 것이 좋기는 하지만 잘 못 이용당할 위험성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서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마가 요한은 인간실존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주님 없이는 유약한, 바로 이끌어 주지 않으면 멸망의 구렁텅이로 잘도 따라가는 목자 없는 양처럼 유약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사람을 사랑과 긍휼로 보아 주셨기 때문에 오늘 날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는 그냥 대가 없이는 용서하실 수 없으신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제물 심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들릴 수밖에 없다. 할렐루야!



Ⅲ.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깨닫는다.(39~41)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우리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성령의 사람들이 어찌 이럴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게 한다.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39) [심히 다투다, 헬, 파라바테스(parabates), violator, transgressor; 범법자, 파괴자, 범죄자(약2:9)] 이러한 표현은 분명히 진리 안에서 사용될 수 없는 형용사이다.

그럴 뿐 아니라 둘이 “피차 갈라 서니” 라는 표현은 한 사람도 양보가 안 되는 대단히 격한 묘사이고 ‘어떻게 온유한 바나바조차 그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한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39b~41) 사실 이 문맥이 자연스럽지 못함을 본다. 과격하게 표현하면 두 패로 나눠서 정 반대 방향을 가는데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는 모습이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는 내용이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은 비록 심히 범죄자처럼 다퉜어도 하나님의 일을 두 사람 다 그만 두지 않았다는 데서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만약에 다투고 한 사람이라도 그만 뒀다면 결국 기뻐할 것은 어두움의 마귀 사탄일 것이지만 바나바와 바울 두 사람 다 그렇게 마귀의 기뻐할 일은 하지 않았다는 데서도 배울 점이 있다. 다툼은 다툼이고 그래도 하나님의 일은 멈출 수 없다는 모습이다.

또 이 두 사람들은 복음의 현장에서 서로의 아픔이나 미움을 생각지 않았다는 데서도 다른 면을 보고 배우는데, 사실 그래야 계속 일할 수 있다. 사실 앞에서 부정적으로 표현했던 두 가지[“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는 내용을 뒤집으면 하나님께 부족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은혜에 부탁함을 받는” 것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종들로서 다투고 싸운 죄스러움이 더욱 자신을 낮추어 교회를 굳게 하는데 최선을 다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툼과 싸움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다투고 싸우는 것은 절대로 합리화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도 사우면서 ‘바울과 바나바도 심히 다투고 싸웠는데 뭐 우리야 더 할 수 있지!’ 라는 생각은 위험 천만이다. 앞에서 골로새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를 보면 분명히 바울은 화해를 한 것이 분명하고, 어떤 이유에서도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이 말씀 속에서 또 하나 배우는 것은 하나님은 이 연약한 성향까지도 뒤집어 사용 하시는 선을 만드는 최고의 명수이시다. 만약에 두 사람의 싸움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지 않으셨다면 오늘 우리는 이 부분의 사도행전을 읽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일은 중단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이것 조차도 사실 인간적인 생각일 분이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추진하시는 일은 절대로 중단될 수 없다. 어떤 환경의 변화나 어려움에도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가룟 유다는 돈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제사장들에게 팔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여서 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엄청난 일을 이루시고 성경을 이루신 것을 본다.

늘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가룟 유다를 그렇게 하도록 창조하신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선하지도 못하고 거룩하시지도 않을 것이며 공의로운 분이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가룟 유다가 나기 전부터 이미 그런 사람임을 아셨고 그 성향대로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구원에 도구로 쓰신 것뿐이다.

Conclusions: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율법의 문제로 예루살렘에 보내놓고 얼마나 안타까워 기도하고 기다렸을까를 생각해 보게 한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린 결과는 위로와 격려의 편지와 사람들이다. 진리를 순종하는 기다림은 절대로 비극의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리를 순종하면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면 세상의 어떤 변화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이 안디옥 교회가 받은 위로와 격려와는 비교될 수 없는 영광을 누리게 될 줄로 믿는다.

우리는 사람마다 태어난 환경이 다르고 신앙에서도 어쩌면 그러한 성향들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폭력은 절대로 정당화 될 수 없고 화가 난다고 하나님의 일을 그만 둔다면 기뻐하는 대상은 복음을 방해하는 어두움의 세력들뿐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라는 양면을 다 충족시키시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늘 치우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령과 말씀을 의지하는 사람들이라면 서로의 아픔을 인하여 하나님의 일을 그만 두는 일까지는 없어야 할 것이다.

나중 바울 사도는 이 일 조차도 마음에 두면서 고백한 것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고 선언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에 탄복하고 오늘도 그 사랑의 옷깃에 우리를 맡기는 것이다. 주님의 지혜에 바울처럼 탄복할 뿐이다.

우리의 모자람과 부족됨에도 우리를 가장 바르게 이끄시고 쓰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 올 해도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기고 의탁함으로 귀한 하나님의 복음의 도구로 쓰임 받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