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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16:1~10 2009-01-11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바나바와의 한바탕 다툼으로 나눠진 바울과 실라는 과거에 바나바와 함께 전도했던 육지의 곳곳을 거치면서 믿음의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도행전을 쓰고 있는 누가가 구브로로 내려간 바나바와 마가의 행동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는 것은 그가 주로 바울과 동행했거나 바나바와 마가의 전도여행이 바울 일행과 같이 적극적인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바나바는 온순하고 융통성이 많은 융화의 사람이었지만 바울과 함께 하지 않을 때는 복음적인 전도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부족한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중요한 것을 본다. 사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하면서도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단락에 보는 대로 적극적인 전도여행을 유럽으로 넘어가면서 계속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러므로 바나바는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을 현장에 투입하는데 까지가 그의 사명일 수도 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일은 때에 맞는 적절한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함으로 보다 적절하게 이루어짐도 배우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각 사람이 구원의 역사 현장에 등장하고 물러서는 일도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심을 깨닫고 그 순리를 적절히 받아들이는 자세도 중요함을 깨닫는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으로 나눠진 의미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특히, 오늘 우리가 이 두 단락을 읽으면서 언 듯 이해하기 어려운 두 가지의 상황을 대하게 된다. 먼저는, 바로 전에도 이들에게 문제가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오랜 토론으로 수습된 문제인 할례에 관한 것으로 바울이 디모데를 전도팀에 함께 하게 하려고 할례를 준 사실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계속 비두니아로 올라가며 전도하고자 하는 데도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는 사실이다. 바울과 실라는 분명히 관광이나 자신들의 사적인 일이 아닌 적어도 복음을 전하고자 애쓰는 일에 성령께서 허락지 않으신 것 역시 그냥 지나치기에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어떤 일은 그 사건 자체로 분명히 이해되지 않고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이런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일이 삐뚤어지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라는 절대적인 흐름에서 모든 문제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당시의 그 사건 하나를 볼 때는 마치 모순처럼 보이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획과 그 주님의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의지 아래서 개인의 삶의 문제보다는 전체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제로 하면 오히려 사람의 눈에는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넉넉히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는 오늘의 본문의 주로 뒷부분의 모순과 거절이라는 이 독특한 사건을 통해서 역시 우리 모두의 같은 상황들을 이해하고 헤아림으로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Ⅰ. 디모데를 자신의 사역에 참여시키는 바울.(1~3)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바울 일행이 루가오니아 지방의 더베와 루스드라에 가게 되는데 14:8~에서 본대로 나면서부터 걸어보지 못한 지체장애자를 일으켜 세운 일로 쥬피터 신전의 제사장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지내려 하는 것을 겨우 말려서 모면한 경험이 있었던 곳이다.

여기에 디모데라는 제자가 있었고 비록 아버지가 헬라인 이기는 했지만 외조모 로이스와 유니게라는 믿는 어머니에게서 나서 자라 이미 구약성경을 더러 읽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는 바울의 편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바울 일행의 전도를 통해서 복음의 진리를 알게 되었고, 본문에 보는 데로 이 디모데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 제자였다.

물론 나중 바울이 디모데를 여러 곳으로 보냈고 에베소 교회에 머물게 했고 그 곳에 직접 편지를 써서 보낸 내용이 오늘 우리들도 읽게 되는 디모데전, 후서이다. 문제는 바울이 디모데를 함께 데리고 떠나고자 했지만 그리스인인 아버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방인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로 그에게 할례를 베풀었다는 사실이다.

바울이 얼마 전 예루살렘에까지 올라가서 율법 문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율법의 제제를 받을 수 없다는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안디옥을 비롯해서 이방인들에게 전한 일이 바로 직전이었는데 이러한 행동이 조금은 의아해지기도 한다.

또 바울 사도의 논지는 이 할례에 대해서 분명한 것을 그의 편지들에서 읽을 수 있다. 이제 그런 부분들을 몇 군데만 살펴 보면…

“할례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전7:19)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갈2: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롬2:26)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롬2:28~29)

그럼에도 바울의 아량은 언제나 한 사람이라도 복음을 듣게 하고 구원하고자 하는데 자신의 명분이나 입장도 늘 뒤로 버렸음을 더러 볼 수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9:20)

특히 이 같은 서도행전 21:24~26에서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다른 유대인들의 오해를 없애고자 “결례를 행하라”는 권면을 받아들이는 것을 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결례를 행한 후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은 소동을 일으키고 만다. 어떤 경우 충성된 일꾼을 얻으려 하면 많은 희생과 어려움이 따라야 함을 배운다.



Ⅱ. 믿음을 굳게 세우며 성장하는 교회들….(4~5)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바울과 실라는 디모데에게 할례를 줘서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떳떳이 데리고 여러 도성들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한 율법 속에 요구되는 것들인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28~29)는 규례를 전하며 지키게 하면서 일차전도여행 때 세웠던 교회들을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유대인들의 율법조건에 관한 사항들에 어려움을 겪었던 교회들은 이러한 예루살렘 교회의 간결한 결정으로 인하여 더 이상 혼란이 없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믿음이 더욱 튼튼하게 되고 확신에 찬 교회들 속에 구원 받는 사람들의 수는 날마다 더해가는 것을 본다.

이방인들의 교회가 예루살렘의 율법에 대한 한계를 분명히 함으로서 혼란은 잠재워 지고 확신에 찬 사람들의 진리의 증거에 사람들이 날마다 더해짐을 보게 된다. 이것이 어찌 보면 교회성장의 모델이다. 믿음이 확고히 굳어지고 거기에 구원받은 사람으로 더해지는 것이 교회성장의 모범인 샘이다.



Ⅲ. 유럽전도를 위한 하나님의 계시.(6~10)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오늘 말씀의 뒷부분은 소아시아 전도에서 유럽으로 복음을 들고 가게 되는 역사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바울과 실라를 본다. 여기 우리가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지시가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6f~7)는 대목이다.

당시 아직 아시아에 복음을 다 전하지 못한 곳이 아직도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가운데 바울 일행은 더 위쪽 지역 ‘비두니아’ 즉, 지금의 터키의 북쪽으로 올라가려고 애쓰지만 역시 예수의 영 즉, 성령께서 허락지 않으셨다.

여기에서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한가지는 바울과 일행이 가고자 하는 것과 성령께서 그들의 의지를 꺾으신 것이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주신 주님께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막으심은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사람의 의지와 하나님의 뜻이 다른 경우를 보게 되는 것이다. 바울의 계획과 의지를 막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을 당부하시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의 뜻에서 주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원하시는 역사를 보게 되고 예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 하셨지만 항상 밤이 맞도록, 새벽 오히려 미명에 기도로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것은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사람의 바램과 이상에 대해 허락지 않으실 수 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꿈을 꿨다고 하고 비전이라고 제시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께로 주어진 것이 아닌 자신의 기대와 꿈일 때 하나님은 허락지 않으시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의 예언하는 선지자를 쳐서 예언하되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에게 화 있을진저”(겔13:2~3) 라고 경고하신다.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저희가 거짓 경고와 미혹케 할 것만 보았도다”(애2:14) 라고 책망하셨다.

바울 일행이 거치는 곳마다 믿음이 굳어지고 구원받는 사람이 더해지는 놀라운 역사에도 불구하고 어찌 보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앞길을 막아 서시는 것이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6f)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실라는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6b~7f) 라는 나름대로의 복음을 들고 가고자 하는 바울의 의지가 함께 보인다.

결국 약간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무시아를 지나 에게해(the Aegean Sea)의 바다 쪽인 드로아로 내려갔을 때야 비로소 주님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신 이유를 깨닫게 하신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9)

여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지시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도 자주 사용하는 비전(헬, 호라마(horama), vision)이다. 비전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보여 주시는 계시이다. 같은 표현이 바로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날 때 다메섹의 제자였던 아나니아에게 “…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행9:10m) 하는 내용에서도 볼 수 있다.

당시의 마케도니아, 지금의 유럽 사람 하나가 건너와서 자신들을 도와 달라고 청하는 것을 바울이 보고 바울은 바로 갈 길을 결정한다.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10)

계시가 분명한 이상 바울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막으신 것도, 아시아의 북쪽인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써도 허락지 않으신 이유를 이제는 확신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제는 비두니아로 가고자 더 이상 애쓰지 않고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라는 모습 속에서도 분명하다.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10) 여기에서 도 다시 머뭇거림이 없는 하나님의 종의 결단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종이 온전히 순종하기를 기대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께서 열어 주시는 전도의 문은 이제, 당시 세상의 중심이었던 로마와 유럽을 중심 하여 세계로 퍼져나가게 된다.

이렇게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는 자세가 중요하다. 오늘도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갈 길을 분명히 열어주시는데 우리는 그 앞에서 얼마나 머뭇거리고 있는지 모른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결정해 놓은 일을 더 고집하고 거역할 대가 많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완벽하게 계획을 세울 수 없고 헌신하겠다는 순종을 가진다면 주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한 지시에 순응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 하나님의 뜻을 제쳐두고 사람이 완벽한 계획을 세운다면 그 일에는 오히려 성령께서 역사치 않으실 수도 있다. 바울 역시 복음과 함께 자신의 섬김을 계획하였지만 언제나 성령의 개입에 순종하였고 이런 자세이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그의 일상을 주도하시고 간섭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경우 우리는 주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일들을 비전이랍시고 세우고 그 계획을 따르는 데만 몰입이 되어 정작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곤 한다.

주님께서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지만 바울의 일대기를 보면 스스로 앞날을 계획하지 않고 온전히 주님의 의지에 자신을 맡김으로 때마다 시마다 주님의 만드신 일들을 만나면서 그런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함을 본다. 그러나 이 말은 신앙의 사람은 계획 없이 살라는 말은 분명히 아니다.

로마로 가게 되는 것도 처음부터 세운 계획은 아니었고 서바나 즉, 스페인으로 가려던 것도 처음부터 자신이 세운 계획은 아니었다. 바울 사도는 언제나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일에 충실하면서 그 다음 단계를 보여주시는 비전에 충실했음을 그의 전기를 보며 깨닫게 된다.

Conclusions: 바울 사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일에 사람들을 참여시키지만 신임과 덕망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복음을 전했고, 특히 그의 일생에 믿음의 아들 같은 디모데를 얻기 위해서 어찌 보면 자신의 의지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하는 모습을 배운다.

비록 자신이 원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는 일이라면 진리가 아닌 이상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한 무수한 그의 희생을 본다. 자신이 비록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 중에도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이 갇혀있기 때문에 복음을 더 열심히 전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7~18)는 고백을 본다.

혼란이 없는 진리에 확신을 가질 때 믿음은 견고하여지고 구원받는 사람들은 매일 더하게 된다. 사실 진리가 같지 못한 것 때문에 천국 문에서 떨어지는 낙오자들을 더러 본다. 하나님의 진리를 같이 외치면 얼마나 좋을까 만 진리가 하나 되지 못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느끼고 은혜를 잃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마련해준 즉, 성경에 기록된 것만을 증거하고 가르친다면 믿음은 견고해지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들이 더 많아 질 것이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좋은 의지로 애쓰고 힘쓰는 일들을 막으시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 사람들보다는 하나님이 옳다. 우리가 애쓰고 힘쓰는 일들이 막힌다면 그것은 분명히 주님께서 더 좋은 길을 예비해 두신 것이라 확신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환상 즉, 비전을 바로 볼 수 있는 보다 영적인 눈을 가지고 더욱 확신에 찬 하나님의 일꾼들로 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