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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16:11~21 2009-01-18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목표가 분명한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비전이 문제이다. 주님의 뜻을 좇아 가는 순종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계속 주님의 일을 감당하도록 앞길을 열어 주시고 인도하신다. 이래서 비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순종하여 생명을 드려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구로 그의 길을 인도하시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 대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는 것은 비전이라고 할 수 없고 어느 순간에는 마침내 막혀버리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는 길은 때로 허락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지시하신 것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가고자 하는 길일 뿐이고 그러한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은 반드시 주님께서 원하시는 다른 길을 열어주심을 본문에서도 깨닫게 된다.

우리 하나님은 영광에 굶주린 분이 아니시다. 다만 그의 백성들이 그 영광에 참여되고 그들이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바라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영광도 사실에 있어서 우리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아시아로 계속 올라가고자 하는 바울을 막아선 하나님의 성령은 주님께서 주신 이상에 순종하는 바울과 실라를 드디어 유럽의 전 지역에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하여 지체 없이 이끄심을 본다. 드로아에서 배를 탄 바울 일행은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기착지인듯한 사모드라게 라는 섬으로 직행하여 다음날은 네압볼리라는 유럽의 연안을 거쳐서 빌립보에 이른다.

유럽의 마케도니아에 상륙한 바울은 빌리보를 시작으로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 등지를 여행하면서 온 마케도니아를 복음과 함께 생명의 색깔로 뒤덮는다.

최초의 빌립보 교회의 성도로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를 부르시고 연이어 귀신들려 점쳐서 여러 주인에게 복채를 받아 바치는 가련한 여종의 귀신을 쫓아내어 교회 속에 더하게 하시지만 이 일로 바울 일행은 많은 고난을 겪게 되고 이 사건의 연장으로 간수의 가정이 변화를 받아 교회 속에 더해진다.

결국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수 있지만 여기서도 하나님은 복음을 위해 충성하는 일꾼들에게 당하는 시련에 비교될 수 없는 귀한 열매들을 주신다. 오늘도 헌신과 충성으로 주님을 섬기려 한다면 반드시 고난은 각오해야 하겠지만 주님은 그에 비교될 수 없는 열매들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믿습니까?



Ⅰ. 루디아 가정의 구원(11~15)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이 도시를 마게도니아의 ‘첫 성’이라고 하는 데는 당시에 행정적 위치나 규모 등등 여러 가지 논란의 여지를 가지고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대로 마게도니아의 복음의 출발지라고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다.

바울 일행은 유럽에 발을 들여 놓고 다음의 하나님의 지시를 받기 위하여 안식일에 기도처[헬, 프로슈케(proseuche), 기도, (함축적으로) 예배당]를 찾았고 강가에 모여있는 여인들을 만나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마침내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소아시아의 위쪽에 위치한 두아디라 성 출신의 자주장사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 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인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유대인의 회당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섬기는 자로 이해할 수 있지만, 아직도 구약의 율법에 속한 이 여인을 하나님은 마음을 열게 하셔서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셨고 마침내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마게도니아 지역의 첫 그리스도인이 된다.

하나님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예비하시고 순종의 마음을 보시고 구원을 받게 하시며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 루디아는 그의 출신지인 두아디라 성 사람이었지만 이미 가족이 다 빌립보에 와 살고 있었고 이 여인의 이곳에 오게 된 것은 결코 자주장사를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주시켜 두신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여인은 아직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이미 하나님께 마음을 드린 경건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어떤 것이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바울은 강가에 않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즉, 한 사람이 아닌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인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오로지 복음을 듣고 순종하는 여인은 ‘루디아’ 한 사람뿐이었음도 귀하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라는 표현은 이미 마음을 주님께 드린 여인이기 때문에 주께서 구원의 복음을 듣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또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14~15f) 라는 기록은 순서는 다소간 바뀌었지만 바로 구원받는 과정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회개한 삶(행17:30~31, 26:20-하나님을 공경하는), 복음을 듣고(롬10:17-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롬10:10; 요3:16, 5:24-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세례를 받고(막16:16, 행2:38-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가르침을 받는다.(마28:20; 벧후1:5~11-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는 내용에서 확인하게 된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15b) 성도의 교제가 여기서도 나타나고 교회는 바로 이 여인의 집에서 시작됨도 본다. 다음 절에 연결되는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16ff)는 이후부터 루디아의 집에서였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마게도니아로 바울 일행을 불러 첫 열매로 루디아를 택하심으로 빌립보에 복음의 발판을 놓게 하셨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마게도니아를 구원하시려고 소아시아의 두아디라에서 이미 오래 전에 이주시켜 준비해 두신 복음의 보석이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심령들이 듣고 구원과 은혜를 누리고 유쾌한 인생이 되게 하신다.



Ⅱ. 귀신들린 여종을 고침(16~18)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유럽의 관문인 빌립보에서 루디아의 한 가족을 모두 구원으로 불러들인 하나님이 두 번째로 복음 속에 불러들인 여인은 루디아처럼 귀부인이 아닌 초라한 여종, 그것도 귀신들린 여종으로 자신의 주인들에게 돈을 벌어 바치는 가련한 수탈을 당하는 노예였다.

언제나 정세가 불안한 시대에는 점집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고 복채로 내는 돈은 아까운 줄 모른다. 여하튼 이 가련한 여인도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하는 것으로 봐서 상당히 여러 사람에게 돈벌이를 해주는 여종이었고, 기도하는 곳에 갈 때마다 바울 일행을 좇아오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16)고 소리질러 사람들에게 복음의 사자들임을 선포하는 일을 여러 번 했던 것 같다.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 지라…”(18ff) 하는 것으로 봐서 그렇다. 문화와 어두움이 짓누른 풍요의 도시에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종들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오히려 어두움의 영에 사로 잡힌 이 여인이었다는 사실이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하고 오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바울 일행은 이 귀신들린 여인이 여러 번 이렇게 하도록 그냥 뒀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유를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를 일이지만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라는 기록으로 봐서 이 귀신에 잡혀 자신의 인생은 없고 오로지 여러 주인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사는 이 여인의 인간됨에 연민을 느꼈던 것 같다.

오늘 날에도 사람을 지배하는 영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성령에 처소로 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된 사람이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역시 어두움의 공중권세 잡은 자, 세상 주관자에게 잡혀 사는 사람들뿐이다. 이 외에 다른 영은 없다.

두려운 것은 이 어두움의 영에 사로 잡힌 자임에도 하나님의 종들을 정확히 알아 봤다는 사실이다. 야고보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고 경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종들을 알아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복음 속에 온전히 나를 맡기고 사는 것이다.

안타까운 바울은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18m) 하여 자신을 움직이는 주님의 권능을 의지하여 이 가련한 이생을 귀신의 수하에서 불러내 자유케 하였다.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18b)

이 가련한 여인은 사람에게 종 되고 귀신에게 종이 되어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잃어버린 짐승 같은 노예로 살았던 과거의 삶을 완전히 접어 버린다. 오늘도 이 여인 같은 가련한 인생들은 우리 주위에 넘쳐난다. 사람의 근본을 모르고 돈의 노예 되고 또 그 돈을 상납하는 사람의 노예 되고 명예와 권세의 노예로 사는 삶은 이 가련한 귀신들린 여인과 다를 것이 없다.

복음은 바로 이런 가련한 인생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므로 주신 것이다. 오늘 날에 안타까운 것은 복음 속에 들어와 산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유의 종이 아닌 세상의 종 노릇 한다는 사실이다.

베드로 사도는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벧후2:19~20) 라고 경고하고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21)고 안타까워 하는 것을 듣는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는 과거에 비록 이 가련한 여인처럼 온 갓 것들에 종노릇 하였을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공로로 과거에서 완전히 자유 하여 빛이시고 사랑이신 하나님 아버지만을 섬기는 의의 종으로 사시기를 …

이 두 번째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지나칠 수 없는 한가지는 이 기록을 쓰고 있는 누가의 표현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라는 기록으로 볼 때 누가가 이미 바울의 여행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Ⅲ. 점치는 여종의 주인들의 고소(19~21)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한 사람의 귀신에 잡혀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던 여인이 온전한 정신과 자신을 되찾았다면 박수를 쳐서 환영해야 할 일임에도, 경제 논리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체제에 익숙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계산하기 때문에 이런 귀중한 문제는 저들의 관심 밖임을 본다.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19) 도대체 몇 사람이 이 가련한 여인으로 인하여 이득을 챙기며 살았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이 여종의 ‘주인들’ 이라는 표현으로 볼 때 분명 둘 이상이었을 것이다. 성경에서 조차 “유익이 없느니라!”는 표현들이 있지만 그러한 기록은 적어도 육신에 머무르는 유익은 아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13:17)

적어도 성경은 영원의 가치에서 유익을 말씀한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보이는 소득, 즉 돈벌이가 끊어진 것에 분감을 감추지 모하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가”(19b) “저자[헬, 아고라(agora), forum, 본래적 의미로는 (공공 장소로서) 읍, 광장 함축적으로 시장이나 한길]”로 끌어 간 것으로 봐서 사람들을 선동하고자 하는 모습이고, 관원들에게 자신들의 손해를 배상 받고자 끌어 갔다.

“상관[헬, 스트라테고스(strategos), 장군, 장관, 대장, 행정장관]”들은 당시의 행정 관료들이었고 이들 앞에 데리고 가서 자신들의 이익이 끊어졌다는 문제를 거짓말을 꾸며대며 로마의 자존심까지 들추어 내면서 허위로 과장하며 문제를 일으킨다.

“…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20b~21) 당시에 로마의 행정구역에서 ‘유대인’들은 골치 아픈 반란 자들로 문제 삼고 있었던 것을 짐작하는데 바울의 움직임에서도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며 소란을 일으키는 인물들이었음을 볼 때 그렇고, 이런 이유 때문에 결국 “…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행18:2) 라는 기록도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20b~21)는 내용은 당시에 문제를 일으키는 가장 합리적인 고발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유대인들’이라는 사실 자체가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었고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는 것은 듣는 모든 로마 사람들의 자존심을 은근히 부추기는 간교한 표현이었다.

이들이 외친 선동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켰는가를 다음에 우리가 상고하겠지만 다음 두절 속에 잘 나타나고 있다.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22~23)

오늘도 다르지 않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빛을 잃은 모습도 문제이겠지만 다른 사람이면 그냥 지나갈 수 있는 것일지라도 ‘예수쟁이’ 라는 비속어로 꼬집는다. 그래서 우리는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1:17)는 당부를 듣는다.

이 땅에 살지만 우리의 본향은 이곳이 아니라 나그네로 지나가는 인생이기 때문에 이 남의 세상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 보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내라는 당부를 듣는 것이다. 오직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이 타국 같은 세상에서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좋은 일 한다고 박수 쳐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 해 둬야 낙심치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함께 죄를 짓는 것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안되고 의를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은 복 있는 것임을 확신하고 그 상급이 하늘에 쌓임을 잊지 말고 의로운 순례자로 살아야 할 것이다.

Conclusions : 하나님은 환상가운데 즉, 비전가운데 바울 일행을 유럽으로 부르시고 그곳에 이미 ‘루디아’ 라는 주님의 순종자를 예비해 두심으로 마케도니아의 첫 출발지부터 교회를 세우도록 하셨다.

그러나 이 루디아의 집을 시작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하여 기도하던 바울 일행은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고쳐주는 선한 일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오히려 맞고 갇히는 어려움을 당하게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온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유럽의 구원에도 바울과 실라 일행의 희생을 필요로 하였고, 첫 복음의 정착지인 빌립보에서부터 복음을 위한 파란만장한 희생이 요구되고 있는 것처럼 오늘도 또 다른 곳에서 우리의 희생을 필요로 함을 각오해야만 한다.

세상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려고 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종들을 호락호락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역사의 마지막까지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필요로 하시는 것이다.

바울의 고백처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2:17) 라는 각오와 고백으로 오늘도 빌립보의 역사가 우리 모두의 복음을 위한 헌신과 함께 나타날 수 있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