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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바울과 실라에게 처음부터 부당한 대우를 하였다. 귀신에 잡혀 사람들과 귀신의 종 노릇 하는 한 여종을 회복시켜 준 것이 인륜적으로도 결코 이런 대우를 받을만한 죄악이었을까? 처음 건너간 유럽 마케도니아의 큰 도성 빌립보는 이렇게 바울 일행을 매질로 환영했고, 이것은 어쩌면 인본주의 세계에 복음을 들고 들어가는 모든 역사 속에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대우의 전형이었을 것이다.
또 지금도 그렇지만 어두움의 사람들은 이렇게 쉽게 부정당한 일에도 선동 당하는 무지함을 이 시대에나 그때나 다르지 않게 보는 안타까움도 본다. 자신의 이익을 잃어버린 소수의 사람에 선동된 빌립보 사람들은 이유도 알지 못하고 바울과 실라를 송사하고 잔인한 매질을 하는 어두움에 이용당하는 어리석음을 본다 이런 일은 여기에서뿐만 아니었다.
나중 에베소에서도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행19:32)는 인간군상을 보게 된다. 진리에 눈을 뜨지 못하면 결국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보지 못하고 악에게 이용당할 수 있음을 보는 것이다.
이들 군중이나 관료들조차 나중에 이 일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어리석음을 후회하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하고 다만 다수의 군중에 휩싸여서 우매함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38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오늘 우리는 이런 사람이 혹 없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다수가 옳다고 하는 것 때문에 놀아 난다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결과를 알았을 때는 책임질 수 없는 후회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질러 놓고 후회 하는 조급함보다는 행하기 전에 신중함이 지혜의 행동일 것이다.
우리가 다음 시간에 마지막 부분을 보면서 정리하겠지만 언제나 다수의 군중은 선동되는 일에 흔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나 이런 일에나 늘 다르지 않았음을 보는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애매하고 억울한 상황을 당했어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종들은 자신들을 이런 비운에 빠지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이나 직접 자신들을 구타하고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원망하는 대신에 오히려 주님을 인하여 고난 받는 것을 복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함으로 상황은 역전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는 복된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이렇게 즐거우나 괴로우나 주님께 찬양으로 자신을 맡기는 주님의 일꾼들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반전은 언제나 일어난다. 성경의 역사는 바로 이런 일로 채워지고 있다. 그러므로 의로운 고난은 충분히 당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조차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는 오래 참음의 부족 때문에 이런 놀라운 은혜를 놓지는 경우가 더 많다.
다니엘과 친구들인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이미 오래 전에 이러한 바울과 실라의 모델이었으며, 그보다 오래 전에는 야곱의 열 한번째 아들인 요셉이 꼭 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함을 본다.
우리도 이들과 성정이 같은 사람들이고 우리도 이들과 꼭 같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있다면 오늘 우리도 같은 형편을 같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소화한다면 우리도 또한 같은 은혜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믿습니까?
Ⅰ. 복음을 위한 환란.(22~25)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 사건의 원고 아닌 원고는 정확하게 몇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귀신들렸던 여종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은 로마의 자존심에 호소하면서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20b~21) 이라는 선동을 지난 주에 보았다.
이러한 애매한 선동이 도화선이 되어서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22) 무리는 송사하고 저자의 관원들은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는 부당한 형벌이 가해지고 이것에 만족하지 못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23) 모두가 합당치 못한 법정의 불법의 남용이다.
그러나 불법의 도구들인 이 관리들과 하수인들은 손발이 척척 맞는다.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interiora, 참고-communiora)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24)
그러나 여기까지는 안타까움과 불평등한 세상의 불합리를 보면서 울분하게 되지만 이러한 억울함 속에서도 그 비극을 영광으로 승화 시키는 믿음을 가진 자들의 진정한 승리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마음이 밝아지는 것은 바로 바울과 실라의 모습이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25) “만약에 나 자신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찬양과 기도가 나올까!” 라는 질문을 자신 속에 던지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격려는 성경 속에 많다. 심지어 예수께서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마26:31)시는 말씀에
33절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하였던 베드로가 힘없는 여종 앞에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는 허약함을 보였던 그가 나중 당부하기를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19~20)고 1세기의 믿음으로 고난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있다.
이런 일을 겪기 전에 바울 사도는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14:22)라는 당부를 한바 있다.
좀더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기쁨이어야 한다는 당부를 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1:29)고 격려 하였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의 진가는 믿음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손해를 볼 때 나타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롬5:3) 믿음이 없이는 신앙 때문에 오는 어려움과 고난을 절대로 견딜 수 없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25)는 내용은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의미가 크다. 모든 고통은 밤이 깊을수록 더 심해지는 것이 일반이다. 채찍에 맞은 것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더욱 욱신거리고 고통스러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가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마음 속으로 만이 아닌 모든 죄수들이 듣도록 찬미함으로써 그들의 의도하는 바는 아니었을지라도 세상사람들과 다른 하늘에 속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모든 일반적인 죄성의 사람들이 운명을 저주하고 독설을 퍼붓는 자리에서 저들은 찬미함으로 그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임으로서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노래하였던 것이다.
믿음의 깊이는 모든 것이 끝나버린 순간에 가려진다. 늘 말하는 것이지만 반드시 우리가 세상적으로 잘되고 형통해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 만은 아니다. 우리도 이 역사의 어두움 속에서 믿음으로 당하는 불이익과 고난 가운데서도 찬미함으로 바울과 실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
Ⅱ. 하나님의 기적과 불신의 반응.(26~28)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하나님은 살아 있는 믿음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셨다.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26) 기도와 찬미는 믿음의 양방향 통행이다. 하나님께 기도만 드렸다면 자신들의 필요만을 구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미와 기도는 반드시 함께 이루어져야 할 신앙의 표현이라고들 고백한다.
앞에서도 감옥에 갇힌 하나님의 종들을 풀어 놓았고[5:19사도들, 12:7~10베드로], 핍박 받는 예루살렘 교회가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할 때에 모인 곳이 진동하는 일들이 있었었다.[4:24, 31] 사실 하나님께는 어떤 닫힌 것(靈肉)도 의미가 없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계3:8f) 한 것처럼 주님께서 열지 못할 문은 없기 때문에 그의 충성된 종들을 가두어 둔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입장에서는 장애가 되지 못한다.
하늘의 사람들은 사방이 막혔어도 하늘이 열려있고 기도와 찬미는 바로 그 열린 하늘을 통해서 하나님께 상달되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닫히는 것뿐이다. 믿습니까?
특히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라는 내용은 그 발을 차꼬[두 개의 기다란 나무토막을 맞대어 그 사이에 구멍을 파서 죄인의 두 발목을 넣고 자물쇠를 채우게 되어 있다.]에 채웠기 때문에 더욱 놀랄만한 역사였다.
이런 주님의 역사 속에 전혀 상반된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범죄자라로 잡아 차꼬까지 채워 둔 죄수 아닌 죄수들은 찬미하리만큼 여유를 갖는 반면에 그들을 지키며 자고 있던 간수는 오히려 공포와 절망을 겪게 된다.
간수의 이러한 극단적인 행동을 묘사하기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27) 이것은 어쩌면 세상의 것들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겪는 일반적인 모습으로 이 세상의 권세가 좋은 것 같지만 위기 앞에서는 바람 앞에 등불 같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극단적인 상황을 만나게 되는 그것을 해결하기 힘들 것이라 짐작이 되면 쉽게 생명을 포기하려 드는 것을 오늘의 시대에도 본다.
또 주님의 천사가 베드로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었을 때도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 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행12:19f) 하는 것처럼 중요 죄수를 놓진 간수는 많은 심문을 당하고 죽는 것보다는 오히려 창피와 모멸을 당하기 전에 죽어 버리는 것이 더 상책이라는 극단적인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도 어두움의 영의 하수인 노릇 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또 하나의 반전은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28)는 것이었다. 갇혀 있는 죄수가 자신들을 지키고 있는 간수를 염려하는 일이 과연 이 간수의 일생에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일생에 겪어보지 못한 이 경험이 간수를 감동시켰을 것이다.
짧게 생각하면 옥문이 열리고 차꼬는 다 벗어진 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앞에서 “주님께 충성하려고 하는 우리로 도망하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셨다”고 생각하고 뛰쳐나갈 수도 있었지만 이들은 자신의 형편보다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더 걱정하는 원수를 사랑하는 모습이 여기에 있음을 본다.
주님께서 평소 말씀하셨던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는 가르침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모습을 배운다.
Ⅲ. 복음과 순종에 따른 구원.(29~34)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이들의 주님께 대한 충성과 막다른 상황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모습이 결국 큰 구원의 역사를 이룸을 보게 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하늘의 빛이 내려 비쳤고 이 빛 속에 바울과 실라는 빛을 입은 사람들로 간수에게 보여졌기 때문에 간수는 그들 앞에 부복했을 것이다. 결국 이 광명한 주님의 구원의 빛은 간수와 그 가족들을 구원함으로써 빌립보교회는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29) 왜 간수는 이 무기도 갖지 않은 채찍을 맞아 온몸에 피 멍이 맺혀 지칠 대로 지친 이 두 사람 앞에 무서워 떨고 엎드렸을까? 간수는 바로 육신으로는 피투성이가 된 이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위엄의 주님을 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 구원의 요청을 호소하게 된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30) 이 말을 그대로 옮긴다면 “어떻게 하면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는 당신들 같은 삶의 모습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일 것이다. 그 간수는 자신의 일생에 처음 보는 생명의 신비를 경험한 것이다.
우리는 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31)고 전도해야 하겠지만 사실 우리의 삶이 저들과 다른 것을 보이면서 이러한 구원을 선포한다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이 간수의 가족은 이미 주님의 십자가를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32)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치 에디오피아 간다게의 내시처럼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듣고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세례를 요청했던 것처럼, 이 가족도 날이 새는 것도 기다리지 않고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33~34)는 모습은 구원 받은 감격으로 유쾌한 인생으로 바뀌는 저들의 흔연한 인생을 보게 된다.
우리가 주의 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장소는 자신의 집이 아닌 것으로 이해된다. 만약에 자신의 집에서 세례를 했다면 그 다음에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라는 말이 필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그 밤중에 자신의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 분명하고 세례의 긴박성을 또 한번 확인하게 된다.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가장 중요한, 그리고 믿는 자에게 신앙에 있어서 가장 먼저 실행되어야 할 은혜의 역사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반드시 탄생이 있고 성장이 있기 때문에 거듭남은 그만큼 중요하고 장소나 시간에 관계없이 행해져야 할 귀중한 약속이기 때문에 이 간수의 가정도 이를 순종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라는 주님의 약속의 확인이다.
또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33~34)는 모습은 마치 루디아의 가정의 구원된 결과와 다르지 않음을 본다.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15) 구원의 감격은 그것을 나누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Conclusions: 주님께서는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고 미래를 내다 보시면서 격려하신바 있다.
믿음으로 인하여 오는 고난과 손해를 기쁘게 감당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바울과 실라의 겪은 역사를 오늘 날에도 능히 경험하게 하실 것이다. 위기와 어려움 속에 믿음이란 보석은 빛나게 되어 있다. 오늘 우리에게도 분명한 약속이 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
위기 속에서 불신과 신앙의 형편은 확실히 차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는 약속은 확인되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에게 오는 위기와 고난을 믿음으로 잘 감당했을 때 나 자신이 신앙에 담력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절망과 위기 중에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어려움을 잘 감당한다면 그것은 비로소 구원이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나타내게 되고 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을 갖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불신의 사람들과 차별 없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의 전하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31)는 증거도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역사는 점점 빌립보의 깊은 감옥처럼 어두어가고 있어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시기에 와 있다. 빌립보 감옥의 역사는 얼마든지 우리 모두의 믿음의 자세에 따라 오늘도 이 마지막 역사 속에 재현될 수 있을 것이다. 믿으시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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