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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21:1~14 2009-05-24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바울 일행의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은 계속되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도 바울 사도를 아끼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있을 일들을 내다보면서 예루살렘 여행을 자제할 것을 당부하지만 바울의 의지는 단호해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이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밝히며 어떤 일들이 자신의 앞에 가로 놓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뚫고 가겠다고 선언하고 결국 권면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맡기면서 그치고 만다.



Ⅰ. 어디에서나 십자가의 감격으로 인한 교제의 아름다움을 본다.(4~6, 7~8)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대단히 냉담한 사람으로 비쳐진다. 7장에서 스데반을 죽이는 데 증거물을 지킬 정도로 침착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세 번째의 전도여행을 마무리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우리는 바울의 전혀 다른 면을 보게 된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새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4~6)

가는 곳마다 만남은 감격으로 가득하고 바쁜 중에서도 몇 날이 되었던 상관없이 머물렀고 보냄은 언제나 아쉬움과 서운함을 이기지 못하는 교우들의 모습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두로로부터 수로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7~8)

사실 진정한 兄弟愛라는 것이 이런 것일 것이다. 한 아버지의 자녀 됨과 하나되게 하시는 감격, 그리고 같은 생각을 나눈다고 하는 것은 같은 믿음 안에서 가장 분명할 수 있는 것을 본다. 사실 이 마지막 시대에는 육신의 형제간 조차도 너무나 이기적이고 잇속을 챙기는 모습 때문에 마음을 상하게 되는 일들이 너무나 흔하다.

이런 안타까움 때문에 영원 속에서의 형제 됨은 사상과 지향하는 목표가 같다는 데서 참으로 바울과 그의 사람들과 같이 아름다운 교제를 주님 오실 때까지 지켜 가야만 할 것이다.

베드로도 같은 권면을 주고 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벧전1:22)

두로에서 배의 짐을 내리는 시간을 사용하여 일주일을 그곳의 성도들과 만나고 그러고도 헤어짐이 안타까워 가는 뱃머리까지 바울을 전송하고 바울은 그들을 위하여 기꺼이 바닷가에서 축복의 기도를 함께 올리는 모습은 이권이 없이 참된 사랑을 보는 데서 감격이 되고 우리 모두가 같은 십자가의 피로 형제가 되었다면 오늘도 이래야 된다고 확신한다.[마치 南北離散家族再會와 같다.]

편지마다 이러한 애정은 넘치고 있고 표현에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빌4:1)

예수께서 부활 후에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20:17b]신 말씀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은 의무 이상으로 의무를 넘어선다. 우리가 서로 한 주 동안을 보지 못하면 같은 안타까움을 가질 수 있어야 정상이다.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이 말씀은 주님의 당부로 “너희도 이와 같이 사랑하라!”는 우리 교회를 향한 주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 …



Ⅱ. 모든 것을 알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항상 있다.(4, 10~11)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4,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11”

바울은 에베소 아데미 신전의 은세공들의 소란 중에는 경기장에 들어 가지 말라는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 들였다. (19:30~31)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달랐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어떤 일이 있을 것을 이미 주님께서 아시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바울에게 일러 주신다. 하나님은 과거건 현재건 미래건 모두를 현재로 보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는 바울에게 왜 부정적인 사실을 구태여 알게 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러한 성령의 권고로 바울이 가려는 길을 저들이 권면하는 대로 포기할 수도 있을 것임에도 그것을 공지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바울이 어떤 장애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실천할 사람이라는 사실 조차도 주님은 아셨기 때문이다.

때로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엄연히 앞에 부정적인 장애가 있음에도 그 일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니엘이 자신이 왕의 금지명령이 선포된 후에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 쪽 창문을 열고 기도하는 것을 빌미로 자신을 함정에 넣으리라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인간적으로 볼 때는 이 무모한 일을 계속함을 같은 내용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일꾼이나 성도는 바울과 같은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밀실에서 일을 추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모든 되어질 일들을 만천하에 들어내 놓고 일하신다. 그것이 국가의 일이든지 개인의 일이든지 마찬가지이다.

바울 사도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앞에서 선언한바 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행20:23) 두로의 제자들이나, [아가보]라는 유대에서 내려온 선지자 뿐만 아니라 바울이 들리는 각성에서 마다 같은 경고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왜 바울의 발목을 잡는 이 일을 성령을 토하여 계속 말씀하시고 계시는가 하는 것이다. 이 일은 마치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요구처럼 바울을 힘겹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역시 바울은 아브라함처럼 태연히 이 일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나는 이미 결정 다 되어 있는데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말하는 것은 ‘나는 각오한 일을 가지고 여러 사람 마음 아프게 하지 말라!’ 주변의 사람들을 위한 안타까움이었다.

주님은 우리의 미래와 자세를 모두 아신다. 우리 앞에는 어떤 어려움과 환난이 있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지속적으로 우리를 그 만날 일들에 대처할 수 있도록 단련시키시기 위해서이다.



Ⅲ. 과정과 결과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12~13)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 사도는 이미 에베소교회의 장로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적 결단을 고백한 바 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

고리도서에 보면 신비한 하나님의 질서를 말하고 있는 곳을 읽게 되는데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고전14:32) 라는 것이다.

1.권면하는 측의 사람들은, 개인의 안녕을 위한 권면. 바울에게 이와 같은 권면을 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①신상의 안전을 위한 권면. ②이 사람의 가치와 역할을 위한 권면. ③지상의 교회를 위한 권면. 을 하는 거이다.

2.바울 사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위한 판단. 그러나 적어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①십자가를 유용하게 하기 위한 판단. ②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판단. ③개인에게 있어서는 미래의 영원한 약속을 확신하는 판단.

3.서로의 입장에서는, 결국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의탁할 수 있어야 한다. 선한 권고나 상대를 위하는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14)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21)

형제 사랑은 의무에 매인 만남이 아니다. 나를 형제로 맺어주신 그리스도의 뜨거운 피를 감격할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의 길은 이미 세상에서는 예고된 어려움을 수반할 수 있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 때문에 어떤 어려움을 당할지를 알고 게시고 또 계시하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주어지는 어려움과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예고되는 어려움을 우리는 신앙적으로 바로 판단할 수 있어야만 한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으로 하고, 늘 최종적으로는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실 수 있어야만 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10:31)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빌1:20)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