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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21:15~26 2009-05-31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예루살렘에 들어 오기 전에 많은 이야기를 이미 들었기 때문에 바울에게 있어서는 사실 많은 생각들이 교차되는 가운데 바울은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바울 일행은 온 이방인 세계에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고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보고를 들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참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장래에 대한 우려를 없애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유대인 사도들은 일어날 불상사를 미연에 막아보기 위해서 구원의 교훈이나 바울 사도 자신도 밭아 들일 수 없는 구약의 행동을 바울에게 하도록 권하고 바울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러한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러한 이유와 결과들을 오늘 우리 시대에도 여러 가지로 분석하고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데서 이 일을 우리가 공부하고 나누는 것은 중요한 과제가 된다.

바울 사도 자신으로서는 분명히 환영할 수 없는 일련의 유대적 관습을 행하라는 것을 받아 들였고 이 일에 대한 결과는 그렇게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하는 데서 오늘 우리 시대에 비슷한 상황을 결정하는데 귀중한 전례를 주고 있다.



Ⅰ. 예루살렘 도착과 보고.(15~20f)

드디어 소아시아에서 마케도니아와 아가야를 거쳐 지중의 해로를 따라 가이사랴에 이르는 긴 여정은 끝나고 친숙한 몇몇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가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을 만나 그 동안에 자신을 통해서 이방 세계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전하지만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도 바울에 대한 염려를 가지고 그것을 피해보자는 방안을 주문한다.

1.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16~17) 바울은 가이사랴에 이르면서 이방과 복음의 출발지인 예루살렘 교회를 조화시키려는 이 귀중한 일을 하면서도 결코 겉치레를 허용하지 않았다. 많은 수행원이 아닌 몇 사람의 제자와 함께 가면서 특히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16)는 기록은 인상적이다.

바울은 이미 아시아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의 교회들에서 예루살렘의 굶주리는 성도들을 위하여 거둔 거액의 연보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용도 외에는 한 푼도 허비하지 않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도 무료로 숙박할 수 있는 나손을 데리고 갔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오늘 우리 시대의 신앙의 지도자들이 배워야 할 또 하나의 모범이다.

2.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하신 일의 보고.(18~19) 보고하는 사람도 지금까지 이루어진 일들이 자신들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19) 이렇게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음을 본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3.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20f) 이러한 주님을 의식하는 보고를 받고 있는 야고보를 비롯한 사도들과 장로들도 역시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20f) 바울의 수고를 인정하면서도 사람을 칭찬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 신앙의 지도자다운 모습이다.

이것은 언제나 바울의 일반적인 자세였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 당시에 이 바울의 보고를 함께 접했을 베드로 역시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4:11)

결국 모든 이루어진 역사는 하나님께 영광으로 결과되어야만 한다.



Ⅱ. 유대인 속에서의 바울에 대한 평가.(20b~22)

바울의 이방세계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를 듣고 감격하면서도 그들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동족 유대인들의 오해를 인해서 바울을 아끼는 그들은 “어찌할꼬!” 라고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1. 아직도 율법에 열심 있는 유대인들.(20b)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헬, 포사이 뮈리아데스(posai myriadrs)-많은 수]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야고보의 권면은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관심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모세의 율법을 비롯한 각종 규례들 역시 아직 당연히 지켜야만 할 법으로 아직 복음이 율법의 완성임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깨달은 것처럼, 복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율법의 매임으로부터 자유 한다는 것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다음 절에 이야기 되고 있는 것처럼 율법에 매이지 않는 바울의 신앙적 자세를 용납할 수 없었다.

2. 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21)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으로 율법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은 율법의 자구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복음 속에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여 이런 오해를 일으켰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율법을 배반하라고 가르쳤다는 것은 악의에 찬 거짓이었다.

바울은 율법을 신령한 것으로 인정했고(롬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율법의 긍정적인 역할도 인정하였다(갈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율법의 역할을 분명히 깨달은 바울은 사람들이 율법 자체에 얽매여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행위 자체를 경계하였다(롬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결국 율법의 목표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의 형식주의 매여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사실 율법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바울은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5~16).

할례에 대해서도 형식으로 살가죽을 베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할례의 본래의 정신을 가르친 것을 오해하는 것이다. 로마서2:29m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하였고 “할례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전7:19)고 가르쳤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이 사도행전16:3 같은 경우에는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해서 디모데에는 할례를 받도록 하기까지 하였다.

사실 바울의 소문에 대하여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은 지금까지 오해하고, 이런 부분들의 잘못된 이해를 풀어줘야 한다는 것이 예루살렘의 바울을 아끼는 지도자들의 생각이었다.

이렇게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익숙해 있는 율법 속에서 아직도 예수와 복음을 이해 함으로서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모순 속에 있었던 것이다.



Ⅲ.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제안.(23~26)

바울을 아끼고 사랑하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바울을 위해 미리 유대인들로부터 바울을 향한 잘못된 분노를 제거하기 위해서 바울에게 자신들의 요청대로 행할 것을 당부했고 이러한 진심을 믿음으로 이해한 바울은 이미 완성된 복음의 구원의 논리에 굳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결과는 오히려 예상치 못했던 상황을 불러오게 됨을 다음 시간에 확인하게 될 것이다.

1.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이 말 자체가 “너의 입장에서 굳지 필요치 않은 것일 지라도 우리의 의견대로 해다오” 라는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바울을 염려하는 데서의 이런 요청을 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서원은 나실인 제도를 비롯해서 레위기 27장에서부터 역시 구약의 신앙적 행위로 더러 나타나는 것으로 바울 사도 조차도 행18:18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본문에 나오는 4명의 서원 역시 겐그레아에서의 바울처럼 본인의 자유 의사에 의해 일정한 기간 동안만 하는 서원이라고 여겨진다.(민30:2~8)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24)는 저들의 요청은 결례 기간이 끝나는 날에 머리를 깎고 희생 예물을 드리는 때에 드는 비용을 바울에게 부담하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서원이 끝날 때 드리는 제사 비용(민6:1~21)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고 더욱이 4명의 몫은 더 컸을 것이지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난한 서원자를 위해 비용을 대신 부담하는 것은 매우 경건한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 비용을 바울에게 부담하라고 한 것은 율법을 부정하지 않고 지키고 있음을 보여줌으로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의 이해의 부족으로 인해 생긴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2. 구약의 결례를 행하는 바울. 자신은 이미 복음 속에 있지만 이들의 배려를 존중하는 데서 받아드리고 있다. 이것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바울 같으면 수용하기 힘든 주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죄악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체험한 바울은 이들의 진심을 이해하고 지금은 별로 의미가 없는 구약의 신앙적 행위들을 함께 행하는 데서도 바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본다.

이것은 적어도 고전9:19~22의 더 많은 사람들을 얻고 구원시키고자 하는 바울의 신앙적 자세에서 나온 자신의 신앙과 관계없는 종교적 행위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방인 성도들에게 율법의 짐을 지우기 보다는 금한 4가지 조항을 거론하는 것(25)은 자신들로서는 사실 이 네 가지 이상의 요구를 하고 싶지는 않다는 속마음에서 일 것이다.

“결례의 만기된 것을 고하니라” 바울은 야고보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제안을 받아 들여 그대로 행하여 절차를 마치고 기간이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보고하는 내용으로 오늘 말씀이 마무리 되고 있다. 바울과 그에게 이것을 제안한 사람들에 대한 이해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행동을 어려움을 피하기 위한 타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우리는 앞에서 예루살렘에 들어오기 전에 성령으로 이 곳에 있을 어려움과 고통을 예고할 때도 13절에서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였고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는 고백 속에서도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각오는 이미 되어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타협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①성령에 의해 주도되던 사람들도 100% 온전할 수는 없어서 이런 시행착오를 겪었던 것은 하나님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불안전 때문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지상의 교회나 신앙하는 사람 중 어떤 것도 완전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것은 모든 것을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렇게 서로를 위하고 아끼는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벗어나거나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②주님께서 허락하신 우리에게 닥칠 어려움이나 고통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신뢰함에도 인간적으로 염려한다고 해서 없어질 수 없다. 야고보는 바울을 아끼고 사랑해서 이미 환란이 예고된 가운데서도 바울에게 고통을 피할 수 있도록 이 제안을 했고 바울은 야고보의 제안에 순종했지만 그것이 결국 예정된 결과를 더 빨리 부르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다음 주에 보게 되겠지만 27절에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라는 내용을 보면 오히려 이 제안을 행하기 위하여 성전에 있는 바울을 보고 유대인들은 더 흥분했다는 사실에서 더욱 그렇다.

결국 우리 모두에게 정해진 것들을 피하려고 꾀를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다. 부질없는 사람의 염려와 방책은 별 가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