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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23:1~11 2009-06-28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무질서한 군중의 난리법석은 정리되고 이제 이스라엘의 종교적 정치적 최고 기관인 산헤드린공회 앞에서 다시 자신의 진실된 신앙적 고백을 듣는다. 이러한 장면은 어떻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심문과 비슷한 과정을 겪게 되지만 거기에 대하는 바울의 모습은 그리스도와는 약간 다른 면을 볼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은 분명히 그 지위에서 비교될 수 없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하셨던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바울은 앞장에서 보아왔던 것처럼 마지막 순간에는 로마의 시민권을 내세우기도하고 여기서는 자신이 바리새인으로 이런 고난을 겪고 있다고 호소하기도 한다.

그래서 역시 주님과 바울은 다름을 본다. 주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창조주요 주인이 시지만 하찮은 사람들로부터 심문을 받으시면서도 바울과 같지 않으셨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벧전2:23) 라고 주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끝까지 잃지 않으셨다.

물론 이러한 모습에서 바울이 기회주의자라거나 비양심가 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모든 고난을 하나도 피하지 않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와는 다름을 본다.

권리에 있어서나 능력에 있어서 결코 모자람이 없으신 그리스도시지만 온 인류의 대속 물로 제물이 되셔야 하셨던 주님은 이런 면에서도 완벽하시고 또 그러한 희생에 힘입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더욱 감사드릴 수 밖에 없다.



Ⅰ.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당당한 바울.(1~5)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심을 잃어버렸다. 바울 사도가 나중 옥중에서 디모데에게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2)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양심] 조차도 바른 기능을 할 수 없도록 굳어버렸다.

마치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간경화(肝硬化)]처럼 부드러운 양심은 굳을 대로 굳어서 기능을 잃어버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옳고 그름의 바른 판단이 불가능하게 되도 말았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사회적이나 종교적 지위의 최고 사람들이라고 하는 산헤드린공회 앞에서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고백하는 것을 듣는다. 결국 굳어있는 양심이 치료받기 위해서는 새 언약의 약속이자 온 인류의 새로운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를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인침으로 주시는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양심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를 힘입어 소성된 양심, 회복된 양심을 가진 자만이 바울처럼 당당히 양심을 선언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조차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거짓말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의 마비된 양심을 자극 받은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오히려 바울의 입을 치라 명하고 이로 인하여 주님은 바울을 통해 그를 책망하신다.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이 말은 바울이 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거짓된 제사와 헛된 희생을 백성들에게 주문했던 이름뿐인 이 대제사장직을 정죄하신 것이었다.

예수께서도 당시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같은 책망을 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 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

그러나 나중에 바울을 통해 선언된 이 책망은 예언대로 아나니아에게 비참하고 부끄러운 마지막을 맞았다고 유대역사가인 요세푸스 는 전한다.

네데배우스(Nedebaeus)의 아들 아나니아(Ananiah)로 48~58년까지 대제사장으로 군림하면서 잔인함과 탐욕으로 유명했다. 그는 분반 제사장들로부터 십분의 일 세(稅)를 몰수하여 재산을 축적했고 로마 고관들에게는 아낌없이 뇌물을 바쳤다고 한다. 이렇듯 아나니아는 탐욕적이고 술수에 능한 자였으며 그의 친 로마 정책으로 인하여 유대인 국수주의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66년에 로마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아나니아의 집은 國粹主義者들에 의해 불태워졌고 아나니아는 헤롯 대왕의 궁전으로 피신하여 궁전 뜰에 있는 도수관 속에 숨어있다가 그의 형 히스기아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Jos. Wars II, 426).

대제사장에 대한 단호한 책망을 듣고 있던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4)고 항의하지 바울은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5)고 비록 책망 받아 마땅한 사람이지만 자신의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지니라”(출22:28) 말씀을 어긴 것에 대해 지체 없이 회개하는 모습도 본받을 만 하다.

그러나 이 경우도 예수께서는 다르셨다.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요18:22~23)

바울은 그리스도의 한번으로 영원한 제사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완전하게 회복된 양심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비록, 진리를 어기는 사람들일지라도 범사에 양심을 따라 행하는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Ⅱ. 내세의 삶을 더 귀중히 여기는 바울의 고백을 듣는다.(6~9)

오늘의 세상사람들을 둘로 나눈다면 이 유대인들의 두 종파 같은 사람들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철저한 현세주의자들인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사상처럼 미래도 부활도 영계도 인정치 않은 데다 이들은 철저히 현세 지향적이고 친 로마적이고 체제 유지적인 귀족 집단이었으므로 민중들의 생활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생활을 했다. 때문에 사람들의 지탄을 받으면서도 성전을 통해서 현세상에서 부를 누리는 것에 그들의 삶이 집중되고 있었다.

오늘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도 오로지 현실에 복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은 사실 사두개인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죽은 사람들의 부활과 내세, 천사나 마귀와 같은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면서 이들은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권만을 인정하는 그들의 신앙에 배치된다고 봐서 로마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율법과 선조들의 전통에 충실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개혁하고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성경 외의 유대 전승들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자신들의 경건만이 절대적이라는 독선 때문에 사람들에게 위선적인, 요즘 흔히 말하는 오버 액션(over action)까지 서슴지 않았고 사람들로부터 신령한 사람들이라는 평을 듣기 위하여 길거리에서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대중들의 눈에 띄기 위하여 지나친 경건을 나타내려고 했던 것으로 역시 주님께 책망을 받았다.

이런 전혀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다스리도록 로마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바울을 심문하고 있는 산헤드린공회였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은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6b)고 고백 함으로서 이들의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의 지적처럼 바울 사도가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받으려고 잔머리를 굴리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과거에 자신이 바리새인으로 있으면서는 어땠을 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자신이 과거에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에 행한 것들이 얼마나 모순되었는가를 철저하게 깨닫고 회개한 바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는 고백은 자신의 순수한 신앙의 고백이었을 것이고 비록 이 쓸데없는 심문 속에서 벗어나고자 했다고 할지라도 바울 사도는 자신의 안전이나 무사를 위하기 보다는 오늘 마지막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명을 잘 수행하기 위한 고백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에 의해서 산헤드린공회는 서로간에 완전히 혼란을 일으키고 만다.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이니”(7) 이 시대에 [위험한 동거] 라는 말을 더러 쓰는데 그것은 생각이 갖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이권이나 입장 때문에 함께 있는 정치집단 같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8) 여태껏 물밑에 숨어있던 싸움의 불씨는 폭발하고 말았다.

“크게 훤화가(소동이) 일어날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뇨 하여”(9) 여태껏 바울을 정죄하던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종파라는 한가지 사실 대문에 금방 바울을 변호하고 나섰다.

이것은 사실 신앙의 자세는 아니다. 바로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것을 봐도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문제가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 책망을 받았는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러나 바울은 언제나 자신의 사명과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사명을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도 감당하려는 자세로 주님께 충성했던 모습을 그의 고백 속에서 들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Ⅲ. 다시 다음 단계의 이상을 내다보는 바울.(10~11)

바울이 로마시민인 것을 안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자신의 신분과 나중의 일을 위하여 바울을 철저하게 보호하는데 나중에는 이것을 27절에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라는 자신의 공로를 벨릭스 총독에게 보고하는 것을 보면 들어난다.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이 바울이 저희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사를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문으로 들어가라 하니라”(10)

바울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혼란으로 인한 자신의 입장이나 출세와 명예를 위하는 이유이긴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천부장을 통하여 바울을 위기로부터 또 한번 구출 하신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주님께 충성된 자를 철저히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오히려 더욱 확신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찢겨 죽을 뻔 했던 바울이 로마의 군대의 영내로 들어간 오늘 우리가 읽은 마지막 말씀이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11)

하나님은 그의 대적들이 있는 장소이건 불편한 로마 군대의 진영이건 관계없이 오로지 하나님의 이상을 보는 비젼의 사람이었다. 마치 한 가문을 국가로 키우기 위해서 요셉을 애굽에 이상과 함께 가게 하는 요셉과 같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순종하는 사람은 장소와 시간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의식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음을 보는 것이다. 소아시아와 유럽을 복음화한 바울에게 이제는 세계의 중심 로마에서도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리라는 이상은 바울에게 또 다른 기대와 설렘을 가지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①그 날 밤에 주께서 ②바울 곁에 서서 ③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④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⑤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결국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을 향한 증거가 바울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바울은 이렇게 주님께서 새롭게 주시는 이상에 의해서 로마에 가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음을 확신하고 25:11에서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고 자신 있게 상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앙은 운명을 하나님께만 맡기며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사람으로 경험할 수 없는 전율(thrill)을 경험하게 한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들은 두려움 대신에 하나님의 신비한 경험들을 갖게 하고 담대하게 만드는 것을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無事安逸 한 신앙에는 이러한 역사를 경험할 수 없는 것도 신앙의 사실 속에서 본다.

Con. 바울은 어떤 대상이나 입장에서든 모든 일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회복해 주신 양심을 따라 주님을 섬기고 그의 사람들과 교회를 섬겨야 할 것이다.

신앙한다고 하면서도 지나치게 현실에만 현실에 만 안주하려는 이 상 중심의 사두개인들도 지나친 경건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하여 위선적인 모습도 주님께서는 다 책망하셨다. 오늘 우리는 지나친 현실주의 자든지 지나치게 영계만 중요시해서 현실을 부정하려는 둘 다 옳지 못한 것이다. 특히 이중적인 자세는 주님께서 가장 무섭게 책망하셨던 모습임을 기억하자.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면 어느 시간이나 장소에 관계없이 가까이에서 격려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다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미래가 결코 어둡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내일을 열어 주시는 주님을 늘 경험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