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육신적으로 늘 안전할 수는 없는 경우를 역사 속에서 수없이 보아오는 사실들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위기에서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는 가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어려움 속에서 안타깝게 이생을 마치는 서로 다른 경우들을 보게 된다.
이것은 우리 사람들의 보기에서는 하늘과 땅 차이같이 보이지만 주님께서 보실 때는 사실 그리 큰 차이가 아닐 것이고 어찌 보면 사람이 보기에는 현장에서 순교를 당하는 경우가 안타깝고 답답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그것이 오히려 그 사람에게는 더 복되다는 사실도 믿음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 대한 이사야의 고백은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사57:1) 라고 확인해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주시하고 있는 바울은 동족들이 죽이려는 가운데서 오히려 이방인들의 손을 사용하여 위기에서 빠져 나오게 되고 안전한 곳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이어지는 내용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깨닫고 배워야 될 내용으로 세상과 신앙의 사람, 그리고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도 소신을 갖지 못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마13:22; 막4:19)라는 가시 떨기 같은 마음에 뿌려진 말씀 같은 이 세상의 편리와 잇속에 따라 움직이는 사두개인들과 같은 모습의 삶을 보게 된다.
우리는 이 24장에서 이러한 신앙의 삶의 차이들을 분명하게 보게 된다. 먼저는 자신들의 이권과 위신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는 것 때문에 바울을 끈질기게 죽이려고 하는 신앙한다고 하면서 철저한 현세주의 자들인 사두개인들이자 제사장 무리들의 법과 국가에 대한 모습과 거기에 대응하는 참된 하나님의 사람인 바울의 자세를 다음 주에 보게 될 것이다.
Ⅰ. 유대인들의 고발.(1~2)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니라,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송사하여 가로되”
닭 좇던 개 지붕 쳐다보는 양으로 잡아 죽이려고 온 갓 방법들을 다 동원했지만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신 생명이기 때문에 결국 저들의 영역을 벗어나서 이제는 지배국인 로마의 법정에서 또 한번 바울을 고발하는데 이른다. 사실 이 정도에 이르렀다면 그래도 신앙인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하고 놓아 줘야 할 것임에도 이들의 방법이나 목표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이래서 망할 사람은 결국 망하는 것이다. 어디가 끝인 줄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선치도 못한 욕심을 실현하려는 모습은 아담이래로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그래서 주님께서 희생을 당하셨음에도 여전히 고집이 꺾기지 않아서 광야에서 그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처럼 여전히 망할 사람은 망할 짓만 일삼는 것이라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도 어찌 해 보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 읽은 시작의 모습이 참 안타깝다. ‘누가는 이 장면을 기록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대제사장], 그리고 [장로들] 신앙의 지도자들이요 특히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일의 수장(首長)인 우두머리가 사람을 형벌해 달라고 이방의 총독에게 고발하러 백리 길을 달려왔으니 그들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벗어나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려는 인간적인 시도가 바로 이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모습으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일들을 경계한 바 있다.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6:4~5)
그것도 자신들의 말 주변으로는 확신이 안 서서 변호사 한 사람을 선임해서 자신들을 강점하여 섭정하는 이방 총독 앞에 내려와서 하는 일이 자신의 동족인 “바울을 고소하는” 객관적으로 볼 때는 누가 봐도 안되 먹은 마치 일제치하의 흔한 무라까미 순사 같이 얄밉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웃을 일이 아니라 조심해야 할 일이다. 어쩌면 우리의 신앙이 바르지 못하면 얼마든지 이러한 모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이 각자가 가진 생각과 믿음 속에서 이렇게 자신들도 모르게 초라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불신의 사람들에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오늘 우리가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고 시기 한다면 불신의 사람들 눈에 과연 어떻게 비칠까를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주님께서도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고 당부하고 계시다. 비록 부족 할지라도 이런 하늘의 백성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잘못된 모습은 없어야겠다.
Ⅱ. 더둘로의 아첨.(3~4)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이 고용한 이 변호사의 말투도 완전히 믿음의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려움을 그의 논고에서 듣게 된다. 적어도 종교의 지도자들이라면 변호사를 선임하드라도 자신들의 믿음을 대변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일 텐데 이 변호사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는 그야말로 들어 넘기기 힘겨운 이방 군주에 대한 아부로 가득 차고 있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3f) 지금까지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방 총독을 힘입어 흘러왔다는 말인가?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수많은 세월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역사였고, 만약에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이 없었다면 아마 벌써 침몰한 배처럼 되었을 것임에도 이 종교지도자들을 대표 한다는 변호사가 찬양하는 것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있게 한 하나님이 아니라 이 나라에 쳐들어와 지배하고 폭정(暴政) 하는 이방 총독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신앙이 잘못되면 오늘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안타까운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8:11) 하셨고 믿음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당부하시는 말씀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었다.
오늘 역시 우리가 잘못되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엉뚱한 것들에 돌리게 되고 이것이 우상숭배가 되며 찬양 받으실 주님의 존귀는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의 당부처럼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오늘 내가 있는 이유를 고백하는데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이것은 분명 한나님께 드려야 할 찬미요 감사이지 무력으로 지배하고 있는 총독에게 올릴 칭찬은 아니다. 특히 우리 말에는 단순히 “평화”라 하였지만 원문에서는 오히려 “많은(대부분, 크게) 평화()” 라고 기록이 되고 있다.
[평화]나 [평안]은 싸움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왕이신 하나님의 지배를 눌릴 때만 가능한 것이라는 데서 이 더둘로의 아첨은 들어주기에 지나친 표현이다.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3m) ‘이 민족’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수없이 많은 미래를 미리 보는 선지자들에 의해 역사가 이끌려왔음에도 이 어리석은 어두움의 하수인은 로마 총독의 선견지명에 의해서 자신들의 가치가 향상되었다는 잠꼬대 같은 달콤한 말을 이방의 총독에게 계속하고 있다.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3b) 이 내용 역시 장소와 공간을 넘어서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할 찬양을 이방 그것도 자신들을 괴롭히는 총독에게 잘못 돌리고 있는 말쟁이의 잘못된 아부일 뿐이다. 어느 모양, 어느 곳이든 그곳에 우리를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찬양을 돼먹지 못한 사악한 인간의 마음을 얻기 위한 아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본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4) 갈수록 더둘로의 고발은 들어주기 힘겨워 진다. 총독은 지금 피 지배국의 사건을 심리하는 자신만의 권위와 명예를 십분 발휘하여 즐기고 있음에도 이러한 구역질 나는 아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이 세 마디 역시 하나님의 백성 됨의 수치를 완전히 들어내고 있는 도에 지나친 아부이다. 이 말과 비교되는 바울의 변론을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어떤 형편에나 처지에서도 하나님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께만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드리는 …
Ⅲ. 고소의 내용.(5~9)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의 송사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이제 구체적으로 바울이 자신들에게 끼친 불이익을 나열하는 저들이 죄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가지고 보발해 보긴 하지만 여전히 저들의 간교한 속 샘만 들어내 보이고 만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5)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혹은 ‘율법을 좇아 보기에…’도 아니고 단순히 삐뚤어진 저들이 보기에… 문제였을 뿐이다. 결국 바울은 사두개인들이 보기에는 모든 자신의 민족을 괴롭히는 페스트 같은 유행병을 전염시키는 매개체였을 뿐이었다.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 어쩌면 이 내용이 벨릭스를 자극하기에는 가장 효과 있는 고소 내용이 될 수 있는 것은 당시에 로마가 많은 나라들을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가장 주목하는 부분이 바로 소요사태였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당연히 그 지역을 다스리는 총독들이 문책을 받을 것은 당연하므로 어던 내용보다 이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 라는 죄목이야 말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사렛 이단의 괴수” 같은 항목은 역시 사람들을 선동할 수 있다는 데서 호소력을 가질 수 있고 특이 이 “이단”이 종교적이기 보다는 로마 정부에 대항하는 유별난 자로서 고발하고 있는 내용 같이 들린다.
하지만 자신들의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다는 내용들은 별로 호소력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자신이 변호를 하면서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14) 라고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자신들이 죄를 정하지도 못하고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7) 이것은 논리상으로도 맞지 않다. 자신들이 죄를 열거하여 그 죄가 형벌 받아 마땅하다는 논리를 펼쳐야 당연한데도 이제는 할 말을 잃고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의 송사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7~8)
마지막으로는 옆의 사람들을 시켜서 동조한다.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9) 대제사장은 장로들뿐만 아니라 충분한 응원 부대를 거느리고 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여하튼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더둘로라는 변호사를 고용하여 사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것처럼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궤변적, 허위적 자신감이 나타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의 확신은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8:33) 라는 말씀이다.
오늘도 마귀 사탄은 밤낮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참소하고 고발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하나님 앞에서 이런 모든 것을 덮고도 남을 만큼 충만하다는 사실이다.
Con. 종교지도자들이 사람을 살리는 일에 열심을 갖지 못하고 죽이는 일에 시간과 물질과 열정을 쏟고 있다는 데서 오늘의 경계를 갖는다.
그런 종교는 당연히 현 세상의 권력과 타협하고 아부하면서 오히려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악독을 범하게 된다.[좀비 PC (zombie computer )=소신없는 신앙인이나 기준이 없이 우직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
언제나 잘못된 종교는 참되신 하나님과 대치하게 되고 바른 진리에 사는 주님의 일꾼이나 백성을 참소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위협과 고발에도 하나님은 모르심이 없으시기 때문에 진리에 헌신하려는 하나님의 일꾼을 분명히 알아 보실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거리낄 필요가 없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