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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치 재판석의 방청객처럼 가이사랴의 로마법정에서 바울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재판 상황을 참관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원고와 피고 그리고 변호사의 고발내용과 오늘은 친히 자신을 변호하는 바울의 선언을 듣는다.
지난 주에 우리는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이 고용한 더둘로 라는 변호사의 사실보다는 아부로 채워진 고발 내용을 들었다. 신앙의 지도자들이 채용한 변호사임에도 신앙 양심은 찾아 볼 수도 없고 이방 총독에 대한 아부와 허위로 죄를 씨워 바울을 죽이려는; 사람의 죄를 벗겨 살려야 할 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이 오히려 자신의 눈에 가시 같은 그러나 진리를 말하는 한 사람을 죽이려는 데 온 힘을 모으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불신의 모습이요 신앙인이라고 할 때는 오히려 불신자보다 악하고 간교한 저들의 모습을 우리는 그런 모습이 되어서는 결코 안되겠다는 경계의 내용으로 나누었다.
오늘은 이제 비록 공정하지 못한 법정이지만 신앙의 사람이 가져야 될 판사에게 아부하거나 법 앞에서 비굴하지 않은 바른 하나님의 종과 백성의 바른 자세를 생각하고자 한다. 하나님을 배경으로 모신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면 이런 정도의 소신과 당당함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모습을 바울로부터 배우는데 물론 이 모습은 먼저는 죄 없이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하시기 의해 빌라도나 제사장들 앞에 서셨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셨다.
이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사실적인 모습들을 제공하는 중계방송을 보는 것처럼 명료하다. 이제 다음 시간에는 불신으로서 법을 다루는 총독의 모습에서 법정을 운용하는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어떤 이유로 법 앞에 서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전적으로 따르는 바울의 당당하고 진실된 모습을 본받아서 적극적으로는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벧전3:13) 라는 권면과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14~15) 라는 베드로 사도의 권면에 부끄러움이 없는 …
Ⅰ. 변호의 시작.(10~13)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 이틀 밖에 못되었고, 저희는 내가 성전에서 아무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과 또는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제 나를 송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바울은 자신의 입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이 당당히 자신의 변호를 시작하는 모습을 본다. 당시에도 사건을 변호사에게 맡겨서 조금은 유익을 기대할 수도 있었겠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성도들을 위해서는 있는 대로 물질을 쓰면서도 자신의 변호를 위해서는 변호사를 고용하지 않는 모습 자체가 오늘 신앙의 지도자들과 믿음의 사람들이 배워야 할 또 하나의 귀감이다.
그야말로 건방진 벨릭스 총독은 바울에게 변호의 기회를 주는 것조차 말이 아닌 몸짓으로 한다.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사실 자신의 수많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통치의 자리에 올라와서 이러한 재판을 진행하는 벨리스는 그 수하에 수많은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다스림 받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나 기쁨으로 받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울은 당시 온 아시아와 마게도니아의 엄청난 바울로 인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 실지로는 이 벨릭스의 통치하는 사람들과 비교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존경하고 받들고 그리워했고 육신을 떠나 저 세상에서는 또 이에 더욱 비교될 수 없는 엄청난 차이가 주어질 것이다.
존경과 섬김이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처럼 스스로의 고백과 감동에서 일으킬 수 있는 것이야말로 가치가 있고 영광이 될 것이다.
변호사 더둘로의 고소를 시작하는 말과 바울의 변론에는 사실 하늘과 땅 같은 차이를 느낀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3~4) ⇔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10b)
말의 길이뿐만 아니라 내용에서 큰 차이를 느낀다. 나중에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행26:29) 라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나머지의 내용 역시 벨릭스에게 유대인들이 보고한 내용에서 조금도 더함이나 덜함이 없다.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 이틀 밖(일주일간의 정결예식, 나흘 동안 붙잡혀 있었다.)에 못되었고, [v5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정치적으로 가능한 기간이 못 된다]
저희는 내가 성전에서 아무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과 또는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사람들을 선동한 일이 없었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천부장이 기록하였을 것이다. 오히려 소란을 일으킨 사람들은 바울을 죽이고자 한 유대인들 때문이었다.), 이제 나를 송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11~13) 바울은 사실로서 거짓으로 고발하는 더둘로의 고발이 거짓임을 논리 정연하게 반박한다.
진실된 사람은 용감할 수밖에 없다. 솔로몬의 경계가 실감이 되는 대목이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잠28:1)
또 이 말은 언제나 미래의 수치 될 것을 기억하고 진실과 성실로 살 것을 우리에게 도전한다. 심지어 우리의 모든 행한 대로 사람들에게 공개될 수도 있다는 경계를 가진다면 더욱 진실 할 수 있을 것이다.
Ⅱ. 불신자 앞에서의 신앙고백.(14~16, 21)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항상 바울의 최고의 목표는 신앙의 고백이었다. 그것이 어느 시간이나 장소에 상관없음을 나중 그의 로마 옥중에서의 모습에서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14f) 고백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언제나 그대로 삶의 이유이다. 오늘 우리는 누가 삶에 이유를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이제 조금은 부정적인 내용으로 자신을 내놓는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이내용은 성경의 기록에 대한 확신이다.
비록 사두개인들과 산해들인 공회가 바울에게 이단이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할 지라도 “①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②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③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14)
“①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②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15) 이것은 바로 바리새인들의 신앙과 같은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영광의 약속이다. “③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16)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21) 사실 이 부분은 아덴의 철학자들이 비웃었던 부분이다.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17:32) 사람들은 이런 일을 본적이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어서 조롱하는 것이다. 오늘도 부활의 약속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정신이 나갔다고 말한다.
바울은 단순히 전하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는 것 같다.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 krazo, 본래 의미 (까마귀처럼)소리지르다, 크게 부르다, 소리치다, 탄원하다]
실제로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죽은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23:6b)고 했던 사실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21m) 여기 단연 중심은 내가이다. 오늘 우리 각자의 고백에서 내가 오늘 고난을 당한다면 무엇 때문인가? 믿음의 사람 바울은 영원에 대한 소망 즉, 부활의 믿음 때문에 심문을 받고 고난을 당하고 끌려 다닌다고 고백한다. 대부분의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조차 이 세상의 약속 때문에 힘겨워 하는데,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이러한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시기를 …
하나님께서 사실 세상적으로 보기에는 어떤 불이익으로 나에게 대하신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전혀 불만이나 이유를 달지 않고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불공평할지라도 그것을 기쁘게 여길 수 있는 것이 신앙이다. 그러나 이것은 미래의 약속 즉 부활의 약속에 확신이 분명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Ⅲ. 사실을 고하는 진술.(17~20)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저희가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저희가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송사하였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벨릭스와 자신을 고발하는 동족 앞에서 다시 신앙을 고백한 바울의 마지막 진술은 이제 또 다시 현실과 사실로 되돌아와서 자신이 행한 일들과 거기에 대응했던 저들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역시 꾸밈없이 고백한다.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17~18f)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21:24f)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저희가 보았나이다”(18m)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저희가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송사하였을 것이요(18b~19) 21:27~28의 바울의 예루살렘에서의 행로를 다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지역에서 받은 이야기들 만으로 바울을 매도하였다. 만약에 이들이 바울의 성전에서의 바울의 행동 하나하나를 성전 맡은 자들에게 묻기만 하였어도 이런 억지 주장을 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전후 좌우를 다 보거나 듣지 못하고 한 토막의 이야기로 사람들을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은 신앙의 사람들이 여전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20) 22:30에도 공회 앞에서 바울은 거리낌없이 양심을 따라 호소했고 결코 자신의 행동에 더하거나 빼지 않았다.
오늘 정치가들이 공적은 부풀리고 수치는 가려뒀다가 청문회에서 들어나 수치를 보이는 것과 바울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거짓은 들어 나고, 행한 일은 사람 앞에서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로 숨길 수 없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 소망의 사람들은 오늘보다 미래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짓될 수 없고 진실 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매사를 진실히 삶으로 미래에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도 당당한 천국백성으로 살 수 있도록 힘쓰되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을 의지할 때 가능하기 때문에 역시 믿음으로 살아야 할 이유이다.
Con.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람들에게 아부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만 인정받고 산다며 언제 어떤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셨고, 바울 사도 역시 그랬으며 오늘 주님의 제자로 사는 우리가 또한 그래야 할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자신의 믿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의 이유가 이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벧후1:4)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산다고 누구에게나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미래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는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를 소망하는 사람들답게 진실과 성실로 살아야 함을 배운다.
우리는 이 세상의 삶에 머무는 사람들이 아니다. 모든 것을 미래에 목표하고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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