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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24:22~27 2009-08-02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우리는 가이사랴에서 바울을 법정에 세워 정죄하려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그 법정의 판결자인 벨릭스의 정치적으로 저울질하며 의로운 바울을 바로 석방하지 못하는 모습을 오늘까지 참관자(observer)의 모습으로 보고 있다.

유대인들이 고용한 말 재주꾼인 변호사 더둘로의 바울에 대한 고발과 거기에 대응하는 바울의 변호의 내용도 지난 시간에 들을 수 있었다. 이제 고발과 변호가 있었으면 이 사건을 자세히 조사하여 처리하는 문제만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원고와 피고 그리고 판결을 다루고 있는 이 법정의 모습을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데서 크게 세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고 이것은 오늘 날에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며 우리가 바울과 같은 입장에 처할 수도 있다는 데서 배워 둘 점이 적지 않다.

앞에서 이미 하나님보다는 자신들의 지위와 위신을 위하여 의로운 사람을 정죄하는 이름뿐인 종교지도자들의 안타까운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이나 사람들에 의해 흔들림 없이 사실과 진리의 증거와 이러한 조건을 통해서도 복음을 전하려는 충성된 증인인 바울의 변호를 들을 수 있었다.

오늘은 이 24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대를 따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세우려고 분명한 판단의 근거를 가지고도 우유부단한 이 재판정의 벨릭스 총독의 모습을 통해서 세상을 다시 한번 알아가는 계기가 되고 우리가 이런 형편에 처했을 때 과연 어떤 자세를 가져야만 하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찬521:1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편에 설건가,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 2고상하고 아름답다 진리 편에 서는 일, 진리 위해 억압받고 명예 이익 잃어도, 비겁한 자 물러서나 용감한 자 굳세게, 낙심한 자 돌아오는 그날까지 서리라; 4악이 비록 성하여도 진리 더욱 강하다, 진리 따라 살아갈 때 어려움도 당하리, 우리 가는 그 앞길에 어둔 장막 덮쳐도, 하나님이 함께 계셔 항상 지켜 주시리 아멘

오늘 우리가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주님만을 바라 볼 때 가능하고 세상이나 사람들을 바라본다면 대제사장 아니니아나 유대의 장로들, 그리고 벨릭스와 같은 역사의 수치스러운 인물들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Ⅰ. 판결을 미루는 벨릭스.(22~23)

어찌 보면 유대의 총독들은 한결같이 꼭 같은 인물들이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 빌라도가 그랬던 것처럼 이때의 벨릭스 역시 이스라엘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을 까봐 로마정부와 유대인들 사이에서 마치 외줄을 타는 곡예사들처럼 오락가락 하는 모습이 다르지 않고 오늘날에도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역시 그런 것을 보는데 안타깝다.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anaballo-법정 전문용어로 ‘휴회하다, 휴정하다’는 의미] 가로되…”(22f) 라는 모습 자체가 의아하다. 이 “도(道)”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를 바로 안다면 절대로 이런 우유부단한 모습은 아닐 것은 같은 장소에 있는 바울에게서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도” 라고 할 때 그것은 십자가가 중심이고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죽게 하신 사랑의 도를 바로 이해한다면 이렇게 정의와 거짓 사이에서 애매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라는 말은 당시 로마의 정치하에서 그리스도교가 어떤 입장에 있는가를 더 잘 안다거나 아니면 뒤에 나타나는 것처럼(24) 자신의 아내인 [드루실라]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이건 바울을 고발하는 아나니아 대제사장이나 장로들보다는 더 잘 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는 …”(22f) 것은 역시 그의 정치 수완에서 취한 자세인 것이 분명하다. 이미 천부장 루시아가 사건의 내용을 편지로 충분히 써서 보내왔고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와서 고발하는 내용이나 바울의 변호를 충분히 들었기 때문에 양심적이라면 판단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사실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22b)는 것도 핑계에 불과 한 것은 천부장에게서 다른 정보가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볼 때는 바울의 무죄를 안 총독이지만 이 제사장 아나니아나 장로들 앞에서 바로 바울의 무죄를 인정해서 석방한다면 저들의 반감을 살 수 있는 이유들을 충분이 감안하고 이런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백부장을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anesis← aniemi, 늦추다, 버려두다, 단념하다, 사슬을 풀다]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수종하는 것을 금치 말라 하니라”(23)는 뒷 처리를 보더라도 이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가이사랴에는 전도자 빌립도 있었(21:8)고 유대인들의 바울 살해 계획을 알아채고 이 일을 전부장에게 고한 바울의 생질(23:16)과 아시아를 거쳐 예루살렘까지 함께 온 사람들 중 일부[20:4 소바더, 아리스다고, 세군도,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드로비모]도 이곳까지 와 있었을 것이다.

무죄한 사람을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 때문에 붙잡아 두는 것은 인간적인 처세에서는 지혜로울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분명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정치가들도 이것을 깨달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Ⅱ. 믿음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모습.(24~25)

벨릭스와 드루실라는 헤롯과 헤로디아처럼 정실 부부가 아닌 것으로 유대 역사가들은 전한다. 유대여자인 드루실라에게 벨릭스가 두번째 남편이고 이 드루실라는 15세에 결혼했으나 그녀의 미모에 반해서 벨릭스가 마술사까지 동원해서 자신의 세 번째 아내로 맞아들인 여자라고 한다.

유대의 전통을 가진 드루실라가 첫 번째 약혼을 파기한 이유는 에피파네스 왕자가 할례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행실이 정결치는 못했지만 역시 반대적으로는 종교적인 관심이 많았고 이런 이유 때문에 벨릭스와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자 해서 만나지 않았나 하는 판단이 지배적이다.

이들은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기는 하였지만 역시 그 도를 자신이 살아야 할 삶의 바탕으로 삼지는 못했던 것을 본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25) 역시 바울은 참된 하나님의 종이었음을 이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어떻게 보면 주어진 기회를 통해서 자신의 석방을 위해서 환심을 살 수 있는 기회로 이용할 수 있음에도 바울은 여기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복음을 확실히 전하고 있었음을 본다.

바울은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 벧릭스 부부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었음을 충분히 알면서도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는 이 부부에게 가감 없이 하나님의 의와 절재와 심판을 증거하고 있다.

벨릭스는 탐욕적이고 잔인한 인물이고 무절제한 여자인 드루실라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는 것이 이들에게 기쁨을 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서로가 이권에 의해서 만나진 관계요 의와는 거리가 먼 그래서 회개치 않으면 장차 당연히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사실을 숨김없이 증거하는 바울에게서 역시 하나님의 종다운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여기서 義는 하나님 편에서의 공의, 그리고 절제는 하나님의 의를 수용하기 위한 인간의 의지를 꺾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를 전적으로 의지해야 할 인간 측의 자세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구체적인 모습이며 그렇지 못하면 기다리는 것은 당연히 장차오는 심판뿐으로 죄가 있어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이 비극이다.

이러한 바울 사도의 강론에 “…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25b) 이 부부의 모습은 그대로 세례 요한의 가르침에 반응하는 헤롯의 모습 그대로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막6:20)

사실 사랑의 하나님은 세상의 권모술수와 사람들의 형편과 처지를 생각지 않고 자신들의 무절제를 채우기 위해서 뭇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이들에게도 복음을 듣게 하셨지만 역시 空延拂이 되고 말았다.

또 꼭 같은 생명의 복음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과 회피의 이유가 된다. 주님의 이 땅의 재림과 심판도 마찬가지다. 죄의 굴레에 힘겨워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완전히 자유케 하기 위하여 오시지만 반대로 자신의 죄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두려움만 남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죄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끝내버리면 안된다. 두려움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두려움에 대한 장치를 해 두셨다.

오늘도 기쁨과 은혜로 이 말씀을 듣고 있다면 감사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감사로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25b) 이 말이 진실이었을까! 역시 순간의 두려움을 모면하려는 핑계에 불과했다. 시방 즉, 현재에 두려움을 해결하지 못하면 영원히 해결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죄 사함을 확신하고 이 순간도 심판의 공포에서 영원히 자유 하는 이 말씀을 듣는 …



Ⅲ. 세상정치가들의 잘못된 태도.(26~27)

안타깝게도 이 죄 많은 부부는 귀한 생명의 기회를 놓지고 만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권력을 가진 벨릭스는 자신의 육신적 안일과 세상의 안정을 위해서만 애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모두는 아니지만 지금도 여전히 정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 그대로이다. 적어도 이 세상의 영화에만 눈이 먼 벨릭스의 어리석음은 크게 세가지로 이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고 있다.

①“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26) 이 사람이 유대 총독까지 하고 마음에 원하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었을 것인데 바울 같이 돈에 대해서는 관계가 없는 빈궁한 사람에게 돈을 받을까 바라는 불쌍한 가난뱅이이다.

무론 그러는 데는 바울이 아시아와 마케도니아 그리고 아가야에서 거금을 마련하여 예루살렘에 주고 아마도 지금도 그 일부를 가지고 있으리라는 주워들은 이야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이 어리석으려면 이럴 수 있다. 바랄 수 있는 것을 바래야 하는데 눈이 먼 사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②“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27) 이렇게 지낸 기간이 2년이라는 말이다.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22b) 약속해 놓고도 어떻게 되었든지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세계만방에 전하려는 꿈을 품은 귀한 주님의 일꾼의 발을 이태 동안이나 묶어 두었으니 이 일 또한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가 될 것이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

③“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27b) 어쩌면 이것이 결정적인 실수였고 이것 때문에 소환 되고 베스도가 후임으로 부임하게 되는 것 같다.

인간이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하면 그것이 가능할까? 벨릭스는 이 반란의 기운이 강한 유대에서 그래도 총독생활을 좀 오래 해보고자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해서 의로운 사람도 풀어주지 않고 하나님도 거역하면서 자신의 세 번째 정부인 드루실라를 이용해 보려 하지만 그것은 한 낫 자신의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서 옴을 알았다면 오히려 그 권세를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표면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처세술은 결국 오래 갈 수 없음을 이 타락한 정치인에게서 보는 것이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8)

안타까운 사실은 벨릭스 후임으로 유대에 온 베스도도 그랬다.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행25:9) 오늘 우리 시대는 어떤가?

무엇이든지 생명이 길고 싶다면 영원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믿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계산하고 머리 굴리는 것 보다 어리석음은 없다. 마치 부모에게 잔 꽤 부리는 어린아이보다도 어리석은 짓이다.

솔로몬은 자신의 경험 속에서 고백하기를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16:7) 하였다. 우리가 오늘 이런 역사적 사실을 들추어 내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 그러한 어리석음에 살지 않기 위해서이다.

Con.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일이든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미루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경우에는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도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눈치나 환심을 얻기 위해 사람을 의식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지 못한다면 바울의 모범을 따른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언제든지 의와 절제와 심판을 선포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은혜의 기회를 주셨다. 세상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진리를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벨릭스처럼 단순히 마음에 공포를 느끼는 것으로 진리를 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꼭 같은 은혜의 말씀이 선포되는 대도 유익될 수 없는 이유를 히브리서 기자가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히4:2)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정치가들은 대상에 관계없이 세상에서 힘이 있는 돈을 기대하고 시간을 소비하며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는 일에만 온 힘을 다 쓴다. 우리모두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보려고 최선을 다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