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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25;1~12 2009-08-09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베스도가 벨릭스를 대신하여 후임으로 온 이유는 본문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지 않지만 유대역사가들은 바울의 문제에 우유부단한 것에 대한 유대인들의 로마정부에 대한 항의에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전한다. 그런 만큼 부임하자말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고 역시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은 여전히 바울의 일 처리를 들고 나옴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의 가장 강하고 끈질긴 의지는 사실 종교로부터 나온다. 그것이 옳건 그름을 막론하고 한번 쇠뇌된 종교적 신념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버리지 못하고 그런 이유에서 진리에 길들여져 있다면 더할 것이 없지만, 잘못된 교리에 길들여지면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처럼 평생을 고침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고 하는 데서 대단히 무서운 일이다.

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새로운 총독이 들어오자 말자 자신들의 잘못된 욕심부터 관철시키려고 든다. 그것도 사람을 살리는 일도 아닌 죽이는 일에 말이다. 이래서 이북의 혁명교육이 무섭고 안타깝다. 거의 종교화된 김일성 父子 숭배는 반세기의 역사가 흘렀어도 오히려 강화되어 갈 뿐이다.

잘못된 이단 사상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바른 교훈을 가르쳐줘도 버리지 못하고 그것에 맹종하다가 세상을 뜨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그런 걸 보면서 바른 진리에 순종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은 더욱 감사하고 찬양드릴 이유가 되는 것이다.

결국 계시된 23:11의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는 바울의 로마행은 이 베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이 과정도 역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과정이 되고 있다.



Ⅰ. 베스도 총독의 첫 소임.(1~5)

아무래도 베스도는 자신의 이사 짐을 풀자 말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 같다. 아무래도 자신이 통치해야 할 수도이면서도 독특한 종교적 열심으로 로마 정부에 반항해 오는 저들을 주동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과 함께 역시 이 도시에 포진해 있기 때문이었고 이들의 협조 없이는 베스도도 역시 그의 정치적 생명이 순탄치 않을 것이기 때문에 여장을 풀자 말자 예루살렘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베스도가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을 만난 첫 번째 과제는 역시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요구에서 이 새로 부임한 총독은 조금은 의아하지 않았을까 생각 되어 진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2) 유대 고관대작들이 맨 먼저 베스도 총독에게 가지고 온 것은 역시 고소였다.

그것도 이방인이나 타 민족이 아닌 자신의 동족을 고소하고 있는 유대 지도자들을 보면서 베스도는 과연 무엇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자신의 동족을 고발하는 종교 지도자들…

“베스도의 호의[은혜, 선물, 자비로운, 너그러움, 기쁨]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3) 유대인들은 부임지에 도착한 이 이방 총독에게 호의를 바라는데 그것이 가이사랴에 가있는 바울을 다시 예루살렘에 옮겨오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미 자신들의 속셈을 숨긴 체로였지만 성령께서 저들의 사악함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만다.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40명씩이나 맹세했던 유대인들(행23:12, 14)은 좋은 기회를 다시 만난 사람들처럼 이번에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기대로 이 새로 온 총독의 마음을 떠보고 있지만 역시 거절 당하는 것은 총독의 자존심도 있겠지만 역시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위한 주님의 보호였을 것이다.

그러나 베스도는 처음부터 저들의 氣 싸움에 지고자 하지 않는다.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미구에 떠나갈 것을 말하고”(4) 바울은 자신의 영지인 가이사랴에 구류되어 있고 자신이 곧 돌아 갈 것임으로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송사하라”(5)고 오히려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듯한 이들의 요청을 보기 좋게 거절한다.

어찌 보면 이것은 유대인들이 불신의 사람에게 첫인상을 아주 좋지 않게 주고 있는 상징적인 모습이다. 왜 이들이 그랬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자신들의 욕심을 관철 시키려는 데서 그렇게 되었고 오늘 우리 시대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경계를 주는 것이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살전5:15) 오늘도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지 자신의 욕심을 챙기려 한다면 전도할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도 여기에 비교되는 것이다.

항상 선을 좇으므로 생명을 나눠주는 …



Ⅱ.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6~9)

베스도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바울의 고발을 듣고 8~10일을 머물며 다른 일들을 본 후에 가이사랴에 고발의 당사자들과 함께 재판자리를 베푸는데 이 모습은 마치 옛날 이스라엘 왕 아합이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을 듣기 위해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문 어귀 광장에서 각기 보좌에 앉았고 모든 선지자가 그 앞에서 예언을 하는데”(왕상22:10) 라는 모습과 같이 보인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종교지도자들은 지난번에는 변호사를 썼지만 별 성과 없자, 이번에는 수로 밀어 부쳐보려는 듯이 여러 가지 중대한(, 무거운, 심상치 않은) 죄목들을 꾸며 대지만 2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였기 때문에 도무지 증명될 수 없는 것들로 사실이 아닌 거짓을 가지고 바울 사도를 모함하고 있기 때문에 전혀 호소가 되지 못한다.

보다 큰 죄목을 씨워보려 하지만 저들의 악한 의향만 탄로날 뿐이었고 오히려 바울에게 역습을 당한다. “…유대인의 ①율법이나 ②성전이나 ③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8) 바울은 이제까지 저들이 바울을 고발한 내용 전체를 논리 정연하게 반박한다.

①“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행21:21) ②“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행21:28~29) ③“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행24:5) 이 세가지를 조목조목 반박하자 저들은 더 이상 반박할 말을 잃고 만다.

그러나 여기에 또 한번의 정치적인 계산을 가진 베스도의 또 다른 제안이 주어지고 있다.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9) 이것은 사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고자 제안 했던 것들이었는데 이 베스도는 벨릭스처럼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이런 사리에 맞지 않은 제안을 내어 놓는다.

총독이 고발된 죄수로부터 죄를 찾지 못했으면 석방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제안을 유대인들에게 내어놓는 것이다.

범사에 하나님을 의식하며 일하고 산 바울은 어떤 것에도 결코 흠 잡힘이 없이 당당하고 확신에 찬 용기로 자신을 당당히 내어 놓을 수 있었다. 그것이 종교이건 정치이건 동족 간의 문제이든 국가 간이든 당당할 수 있는 확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의식하고 최종적으로는 행한 대로 보응하실 주님의 재림을 의식하는 삶이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오늘도 여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다시 오실 주님만을 의식하는 삶으로 세상과 사회에서 당당할 수 있는 그래서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2)는 권면에 부끄러움이 없는 …



Ⅲ. 로마의 황제에게 상소하는 바울.(10~12)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어보려 하지만 바울은 당시의 로마의 법에 당당하게 호소하였고 이것은 순간을 모면해 보려는 바울의 임시응변적인 변명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사명이요 비전이었다. 23:11에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당부하시는 주님의 이상에 따른 선언이요 고백이었다.

다른 편에서는 이것이 세상의 중심에 복음을 전하려는 바울의 기대이기도 했었다.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행19:21) 요즘 흔한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불신의 사람들이 단순히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보다 분명하고 확실한 이상의 고백이 신앙인들에게는 있다.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9)는 속마음을 이미 주님의 성령과 더불어 읽어낸 바울은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10f) 답변하면서 “당신도 잘 아시는 바에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10b) 라고 예루살렘에 올라갈 필요가 없음을 선언한다.

지난번 자신의 조카를 통해 유대인의 무리들이 단지 미움 때문에 자신을 해치려는 간계도 알고 또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가는 것도 유대인들의 간교한 요청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마디로 거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바울의 결연한 의지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당당함의 고백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11) 어떠한 의롭지 못한 행동이 있다면 사형을 받을 각오도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인데, 이말 역시 바울의 허풍이 아니라 진심이었고, 신앙의 사람들은 이런 자세로 법 앞에 설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 줄 수 없삽나이다 …”(11m) 죄가 있다면 형벌을 달게 받겠다는 자세와 더불어 억울하게 고소를 당했다면 역시 법의 보호를 받아야겠다는, 그것도 로마의 법정의 주장은 누명을 쒸운 자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 현행법으로도 옳지 못하다는 논리로 그러므로 자신이 보호 받는 것 또한 바른 법의 적용이라는 변호이다.

그리고 가이사에게 상소한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한대,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가로되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11b~12) 어떻게든 자신의 임지에서 그곳 지도자의 마음을 얻어 어려움 없이 총독의 자리를 지켜보려고, 죄 없는 바울을 희생시켜보려고 유대인들에게 기울어지던 베스도는 이 바울의 논리 정연한 변호를 들으면서 속으로 내심 두려워했을 것 같다. 이미 자신의 의향과 마음을 읽고 있는 바울이 두려웠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 역시 죄에 대한 대가에 의연하고 당당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본다면 오히려 두려워할 것이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나 우리 나라 과거의 국가가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했다.

이러한 자세들에 대해서 당시의 간교한 권력의 하수인들이 두려워했던 대상이 역시 올바른 신앙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괴롭히고 핍박하면서도 두려워했다는 기록들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오히려 고난을 피하려 하고 권력의 힘을 이용하려는 야비함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나 옳지 못한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고 있는 일들은, 오늘 십자가를 의지하고 사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자성해야 할 자세이다.

Con. 결국 로마의 정치가들은 벨릭스였든지 베스도이든지 다르지 않았다. 의로운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라도 자신의 안녕을 지키려는 것에서 꼭 같음을 본다. 또 간교한 사람들은 이런 그들의 권력의지를 이용해서 자신의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 일종의 거래가 이루어지고 이런 주고 받음은 어느 역사에서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나 그의 충성된 종들은 달랐다. 오히려 회유하고 협박해도 흔들림 없이 진리 편에 서서 하나님을 의식했고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자신이 무죄하게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사신 것처럼 그러기를 기대하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를 믿으며 세상을 향하여 당당한 그리스도인들을 필요로 하는 시대에 우리가 산다. 부패된 세상과 적당히 결탁해서 무사안일 하게 인생을 살려고 하는 타협보다는 어느 누구 앞에서도 부끄러움 없이 당당한 자신의 백성을 주님은 기대하신다.

그것이 바로 법 앞에 당당하게 무죄를 외칠 수 있고 범법하였다면 죄값을 치르겠다는 비굴하지 않은 자세로 죄를 범한 것이 있다면 죽임도 수용하겠다는 용기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시대는 이런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다. 우리가 이런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