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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릭스의 후임으로 부임한 베스도 총독은 당시 유대지역의 왕인 아그립바의 방문을 받게 되자 역시 그의 가장 긴박한 문제로 유대 지도자들이 고발한 바울의 일로 마음을 쓰고 있었던 것처럼 그 문제를 거론하고 나서는 것이 오늘 읽은 말씀의 내용이다. 그럼에도 이 베스도 역시 바울에게 받은 인상의 대표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었다가 부활하신 사실이 그의 마음 중심에 차지하고 있었던 같다.
특히 오늘 우리가 읽은 내용은 바울이 배석(陪席)하고 있는 자리가 아니라 베스도와 아그립바 버니게 남매만의 대화 속의 내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말을 베스도가 전하고 있는 내용이라는 데서 바울의 가르침의 가장 강한 부분이 역시 주님의 구속역사(救贖役事) 라고 하는 것이 더욱 실감이 나는 부분이다.
그만큼 바울은 대상이 누구였든지 들은 사람들에게 가장 강하게 심은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 곧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과연 사람들이 나(우리 각자)를 만나고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말은 과연 무엇일까! “인상이 좋았다, 꽉 막혔다, 사람 좋았다, 고집불통이었다.” 등등 그러나 바울의 위대한 점은 베스도에게 남아 있는 것처럼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는 증거가 가장 생생하게 남았다는 사실이다.
하여튼 이렇게 베스도를 방문한 아그립바와 버니게 남매에게 바울의 증거와 모습을 전하는 데 중심을 차지 하고 있는 인상은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 증거하는 것이었다는 고백에서 바울이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5)고 고백한 것이 사실임을 주변에서조차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참 지식이 많다거나 철학적이라거나 감정적이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만난 모든 사람들이 바울을 재판하고 만나본 베스도와 같이 그리스도의 구속 즉,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는 것이 머리에 박혀 있을 정도로 복음에 민감한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Ⅰ. 아그립바에게 바울의 사건을 의뢰하는 베스도.(13~16)
로마의 식민지 통치는 대개 두 가지 관리방법으로 이루어 지는데 첫째는 분봉 왕을 통해서 이고 다른 하나는 로마의 행정관인 총독을 통해서이다. 이러한 양면의 통치 방법은 보다 견고한 권력의지를 발휘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그립바 왕은 이 당시에는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반세기를 넘기면서 유대지역의 왕으로 군림했고 베스도는 벨릭스의 후임으로 온지 얼마 안 되는 인물로 나타난다.
특히 본문의 아그립바 2세는 글라우디우스 황제가 ‘성전의 후견인’ 자격과 ‘대제사장의 임명 및 파면권, 성전 창고와 제사장 예복을 관리하는 권한’을 부여해 주었기 때문에 유대 사회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거의 종교적인 영역에서 이 사람의 허락 없이는 이루어지는 일이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로마를 등에 업고 행사해 오고 있는 인물이었다.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새로 부임한 베스도에게 와서 여러 날 동안 무엇을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여러 날이 지난 후에 비로소 베스도는 자신의 문제를 내어 놓기에 이른다. 자신의 전임이었던 벨릭스가 완결하지 못한 사건이면서 자신이 부임한 후에 가장 먼저 유대인들로부터 판결을 요구 받은 사건이지만 여전히 베스도에게도 쉽지 않은 사건이라는 것이다.
벨릭스와 베스도의 차이가 있다면 전임이었던 벨릭스는 뜨거운 감자 같은 이 사건을 2년 동안이나 끌다가 유대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게 되었고, 이런 이유에서든지 몰라도 베스도는 부임하자 말자 이 일을 신속히 진행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보지 못했던 한가지 내용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15절의 내용이다.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15) 라는 내용이다.
“정죄하기[헬, dike, 옳은, 공의→ 심판, 처벌, 복수]를 청하기[헬, emphranizo, 발표하다, 선언하다, 공표하다]에” 유대인들은 재판도 시작하기 전에 바울이 처벌 받아야 할 죄인임을 선언해 달라는 요구를 베스도에게 하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오늘의 아그립바에게 보고하는 내용에서는 자신의 야심은 숨긴 체로이지만 그도 역시 로마의 법을 전혀 무시하고 이 일을 처리했다가 나중에 어떤 변고를 당할까 하는 심중에서 고민스러운 이 문제를 아그립바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유대인들의 요구에 자신은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어 주는 것이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16) 하였지만 황제 가이사의 법정에 세울 분명한 죄목을 찾지 못한 입장에서 상소했기 때문에 그냥 로마로 보낸다고 하는 것이 합법적이지 못하다는 고백이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나 법정에서 이렇게 바울처럼 깨끗한 흠 없는 빛의 자녀로 설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2:12, 16]고 당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고 오늘 바울이 그런 것처럼 애매하게 비방을 받는 한이 있어도 어두움의 행위를 벗어버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참소하는 마귀들에게는 빌미를 주지 않는 성도의 삶을 감당하는…
Ⅱ. 복음 때문에 재판을 받고 구류되어 있는 바울.(17~19)
베스도는 지금까지의 진행 상황을 있는 대로 보고하는데 물론 자신의 입장에서 조금은 달리 전달하는 것도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신속히 이 일을 해결해 보려 한 것은 사실이다.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유대 지도자들을 대리고 가이사랴에 내려가 이튿날 재판을 속계 한 것은 이미 6절에서 본 바 있다.
베스도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 적어도 종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 중에서도 지도급 인사들이 죽여야 한다고 동족을 고발하는 데서 종교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혹은 로마 당국에 대단히 큰 죄를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이사랴에 와서 원고와 피고의 고소와 변론을 다 들은 총독은 이 문제가 자신들의 종교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이 더 난감해 진 것은 죽일 죄는 고사하고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인 죄도 아닌 자신들의 신앙적 차이인 것 같은 문제로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베스도가 이 일을 아그립바에게 꺼내 놓는 것은 사실 자신의 난감한 입장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것이었다.
결국 유대인들의 고발 문제의 핵심을 말하기를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뿐이라”(19) 했다. 주님의 희생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이 이방 총독은 참으로 귀중한 믿음의 핵심 원리를 모르는 데서 이 문제는 역시 자신이나 로마 정부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앞의 간략하게 기록된 가이사랴의 재판 광경에서 사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한내용은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베스도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바울을 죽여달라고 고발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 베스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에 관해서는 바리새인들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만큼은 그들은 물론 유대교 지도자들 모두가 자신들의 사활을 걸고 반대하고 나섰고,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믿음을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된다면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리기 때문에 이들은 그것만은 막아야 되다고 이렇게 종교 지도자들답지 못한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베스도가 자기들의 [종교, 헬, deisidaimonia, 종교→ 미신, 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유대인들과 바울 모두를 포함해서 ‘자기들의 미신과 또는 예수라 하는 …’ 식의 말투이다.
이방 총독인 베스도가 바울의 재판 받는 이유를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는 것 때문이라고 인식한 것은 참으로 바울이 복음의 사람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 표현은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이다.
오늘 우리가 바울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라면 역시 사람들은 우리로부터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로부터 들어야만 할 것이다. 그 왜의 믿음의 문제는 모두 부수적인 것들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바울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8)는 고백을 드릴 수 있는 …
Ⅲ. 황제의 판결을 받을 때까지 지키고 있을 뿐이다.(20~22)
우리는 마지막에서 로마의 총독인 베스도의 한계를 고백하는 내용을 듣게 된다. 우리는 9절에서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하였던 내용을 보았다. 그런데 베스도는 이 말을 나름대로 유리하게 아그립바 앞에서는 편집해서 전한다.
‘내가 이 일을 어떻게 사실할는지 의심이 있어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20) 앞의 내용을 바꿔치고 뒤의 내용은 그대로 옮긴다. 세상의 권력의 상부에 앉아 있다는 유대의 총독이 이렇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는 권력이 높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님을 본다.
이것은 많은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 앞에서 진리를 증거한 바울과는 대조적인 모습이고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딤전6:13) 라는 모범을 제시한다.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21) 이러한 베스도의 고백은 자신이 바울을 재판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의 명령을 들어줄 수 밖에 없다는 고백으로 들린다.
이러한 사실 역시 바울은 로마서8:33~34에서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자신만만하게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만 절대적으로 믿고 충성한다면 우리의 대적들이 오히려 우리를 지키는 자들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실 것이다. 믿습니까?
사도 요한도 같은 고백을 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할렐루야! 결국 로마 총독도 이 세상의 최고 권력자도 하나님께서 위하시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든 원치 않든 지켜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그랬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지키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믿습니까?
Con. 세상권력이 최고인 것 같지만, 때로는 베스도처럼 다른 권력자에게 자신의 문제 해결을 부탁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가졌기 때문에 사실 아그립바도 베스도에게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의뢰하는 모든 자들을 기꺼이 도우신다.
바울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부활하신 것이었다면 오늘 같은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서도 같은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오늘 사람들은 나를 통해서 과연 무엇을 보고 들을 수 있을까!
세상에서 큰소리치고 자만하는 최고의 권력자들일지라도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을 어찌하지 못하고 오히려 보호해 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주님께서 모든 권력의 머리(골2:10)이시기 때문이다. 세상권력을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주님을 경외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권력을 통해서라도 그러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실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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