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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25:23~26:7 2009-08-23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음성녹음 앞부분 녹음 안됨)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이상하시고 신비하셔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한 것으로 인하여서도 로마의 고관들이 진리의 복음을 듣게 하심을 보게 된다. 수 많은 백부장들은 물론이고 그라우디오 루시아 천부장을 비롯해서 베스도총독과 벨릭스와 드루실라, 아그립바와 버니게, 이런 사람들은 사실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하지 않았다면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을 위인들이 아니었다.

이래서 바울의 고백인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는 말이 증명되고도 남는다.

바울 사도는 가이사랴의 로마 법정에서 계속 심문을 받으면서도 그의 변호 주제는 오로지 신앙적인 이유뿐이지만 각각 그 주제는 다르게 표현하고 있음을 듣는다. 23:1~11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24:10~21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이 되면서도 대상에 적절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면서 전하게 한다.

이제 아그립바와 버니게에게 전하는 이 고백이 사실 우리 신앙하는 모든 사람의 고백이 되어야만 한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당하든지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라는 고백이 가능하다면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는 이 바울을 재판해야 할 이 로마의 총독이 오히려 유대인들과는 다르게 바울의 무죄를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 듯 오늘 내용을 읽다 보면 벨릭스는 바울을 재판하는 총독이 아니라 마치 바울이 고용한 변호사 같은 기분이 들 정도이다.

이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발하며 십자가에 달아 달라고 아우성치던 군중과는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를 인정할 것을 그 아우성치는 무리들에게 종용하던 빌라도도 다르지 않았었다.

오늘도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무슨 이유 때문에 살고 일하는지는 각자가 자신의 모습에서 확인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그 모든 것의 이유가 되도록 까지 우리의 믿음을 강화 시킬 수 있는 …



Ⅰ. 죄를 찾지 못하였다.(23~25)

새로 부임한 베스도를 문안하기 위하여 찾은 아그립바와 버니게에게 자신의 임지에 오자말자 부딪치게 된 가장 큰 문제인 바울의 고소 사건을 말하고 협조를 구하는 내용을 ‘아그립바가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한다’고 하자 ‘내일 들으시리이다’ 라고 약조한 부분까지를 지난 주에 보았고 오늘 이어지는 내용은 바로 다음날에 이루어진 내용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정식 재판도 아니고 고소인들인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참여치 않은 의견을 듣는 자리가 너무 화려하다. “크게 위의를 베풀고” 했는데 [위의(偉儀) 헬, phantasia 헛된 모습, 공상, 허식 ← 헬, phantazo, 나타내다, 보이다]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사실 이상으로 전시하는 모습이다.

사실 이것은 역사가들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아그립바 보다도 그의 여동생인 버니게의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왕가의 여인들의 사치는 극에 달했고 유대에 전운이 감돌던 시기에도 오빠인 아그립바가 유대인들에게 전쟁을 피하도록 권유하는 시간에도 요란하게 치장을 하고 오빠 옆에 앉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는 마치 예후가 아합 왕을 죽이고 이스르엘에 갔을 때 남편을 죽인 예후를 맞는 그의 아내 이세벨과 같은 모습이었다. “예후가 이스르엘에 오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왕하9:30)

“…천부장들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신문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23b) 로마의 천부장들과 가이사랴의 높은 지위의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이러한 허세 앞에 선 바울의 모습은 초라해 보이기도 했겠지만 바울은 허세로 치장한 그들에게 꾸미지 않은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약속인 복음을 전하는 참으로 영광과 위엄에 속한 하늘의 스승으로 서있는 것이고 이것은 이미 주님께서 다메섹에서 바울을 만나셨을 때 약속하신 일이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9:15).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나는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저가 황제에게 호소한 고로 보내기를 작정하였나이다”(24~25)

여기에 고소하는 유대인들이 없을 뿐이지 베스도의 아그립바왕에게 질문하는 내용은 자신이 죄수를 다루는 재판장이기보다는 마치 바울의 변호사와 같은 내용을 당시의 모든 높은 지위의 사람들을 다 모아 듣는 가운데 아그립바 왕에게 변호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신기하게도 주님은 바울의 억울함을 이방 총독을 통해서 변호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바울처럼 충성하려 한다면 오늘도 주님은 그러한 자신의 일군과 백성을 절대로 초라하거나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이미 이러한 일들에 대해 말씀하신 바 있다.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18~20)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처럼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맡긴다면 억울함도 초라함도 모두 주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물론 주님께서는 어떤 대상을 사용하실지는 모르지만 충성된 자신의 종이 수치를 당하는 것은 곧 주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일이기 때문에 이방의 권세자들을 통하여서라도 바울의 위신을 회복시키시고 변호하게 하시는 것이다.



Ⅱ. 아그립바왕에게 변호를 시작하는 바울.(26~26:3)

베스도는 자신의 딱한 처지를 계속 하소연 한다. “그에게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재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어 세웠나이다. 그 죄목을 베풀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26~27)

유대인들이 고소를 해와서 재판을 베풀었고 자기가 보기에도 억울한 바울은 황제에게 상소했지만 죄목도 없이 가이사의 법정에 세우는 것은 사실 당시의 로마법 상으로도 불가능한 일임을 너무나 잘 아는 베스도였기 때문에 상소한 재료를 찾을 수 있을까 하여 아그립바는 물론이고 로마의 높은 관료들을 다 모았다는 이야기이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1) 이것도 상황에 조금은 맞지 않는 내용이다. 난감한 아그립바에게 고발된 바울의 죄목이나 상소에 합당한 재료를 찾아 달라는 부탁을 들은 아그립바는 ‘베스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한 것이다.

물론 이것도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였을 것임으로 바울은 이것이 주님의 확실한 역사임을 믿고 복음 증거를 위한 서두를 꺼낸다.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1b~3)

이 말은 어쩌면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온 신앙의 역사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서론이었음을 이어지는 부분에서 확실히 이해할 수가 있다. 어찌 보면 이 노련한 처세술에 능한 유대 왕에게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키는 내용을 여기서 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오늘 우리의 문제도 마찬가지일 것은 구원의 진리를 전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 되어 있지 못하면 복음은 스프링처럼 튀어 나오고 말 수 있기 때문에 아부가 아닌 사실로 준비시키는 기초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자신의 종교와 민족성을 아는 아그립바의 가진 지식을 바르게 사용해 줄 것을 주문하면서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 지식 위에 복음을 들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Ⅲ. 그러나 자신의 변론이 아니라 역시 복음증거였다.(4~7)

베스도는 바울에게 분명히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였지만 바울은 언제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자신의 입장이나 처지가 아니라 복음이었음을 여기서도 읽을 수가 있다. 유대인의 제사장 직이나 제사는 물론이고 성전과 관련하여 모든 것을 직접 명령하고 움직이는 아그립바이기 때문에 바울은 또한 성전과 유대 지도자들 사이에서 이미 바울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데서 복음 증거를 시작한다.

이러한 내용이 바로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바라”(4)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신앙의 양대 산맥 같은 인물들이 바로 성전을 장악하고 있는 사두개파 사람들이고 율법과 계율을 풀어 증거하고 가르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또 다른 무리들이었다. 이런 사실에 역시 무지하지 않은 것을 짐작한 바울은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5) 증거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죄로 인해 유대인들의 고소를 당하고 법정에 서서 죄인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유대인들과 같은 이유인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이유로 인해 정식재판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로마관료들의 재판의 재료를 찾기 위한, 법정 아닌 이런 입장까지 당하고 있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6) 오늘 우리들도 같은 믿음을 가졌다면 어려움을 당하던 억울함을 당하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이루어질 약속을 인하여 당한다면 그것은 가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베드로 사도도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0~21)고 하나님의 약속을 인하여 고난을 당한다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같은 증거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자신의 것으로 누리기 위하여 믿음의 조상들은 주야로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자신의 것으로 얻기를 바라는 것이라는 고백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약속을 듣고 믿고 순종하는 자들이 누릴 것이기 때문에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삶으로 행동으로 그 약속이 자신에게 유효하도록 힘쓰는 자세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7f)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7b) 오늘 나의 고백도 같은 것이라야 가치가 있다. “이 소망을 인하여” 비록 동족들로부터 고소를 당하고 있을지라도 이유가 소망적이고 분명하다면 어려움도 당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기대와 확신이 있어야 한다. 내가 오늘 어떤 형편과 처지가 될지라도 견디기 힘든 고난이 수반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하다면 그것은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불쌍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믿음에서 나온 고백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9) 것이다. 믿음으로 산다면 분명한 주님의 십자가로 인한 약속을 확신하고 신앙하는 사람들은 결코 힘겹지 않은 것이다.

Con. 솔로몬은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16:7)는 주님의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의 삶이 십자가를 의지함으로 어울한 고난 속에 있다면 이방임금이 바울의 무죄를 확인해 주는 것처럼 반드시 그러한 사람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실 것이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충성된 사람의 팔을 들어 주실 것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오해나 불이익 속에 놓여지더라도 자신을 변명하는 것보다는 주님의 이름을 먼저 생각하여 존귀를 잃지 않게 하는 복음의 증거가 결과적으로는 우리를 더욱 귀하게 입힐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복음보다는 자신을 변명하려 한다면 더욱 초라해질 수 있고 영원한 영광도 잃을 수 있을 것이다.

바울처럼 자신을 변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어도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증거할 때 우리의 억울함은 비교될 수 없는 영광으로 준비하실 주님이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