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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재판은 아니지만 그래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잃지 않으려는 바울 사도다운 면모를 여기서도 본다. 유대를 다스리고 있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막연히 는 들었겠지만 아직 제대로 복음을 접해보지 못한 이 아그립바와 그의 여동생에게 그의 고백대로 구원의 주님을 소개함을 기쁘게 여기고 자신 속에 나타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가감 없이 증거한다.
바울 사도가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9:20~23)고 고백한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오늘 아그립바와 버니게를 향하여 증거하는 바울 사도 자신이 주님을 만난 경험을 증거하지만 거기에도 질서정연한 논리를 가지고 있고 이런 내용은 오늘 우리가 남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메시지이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사실보다 분명한 것은 없을 것이고 그것은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에도 그럴 것이다. “나는 어떻게 복음을 전할 지 몰라서 전도를 못해요!” 라고 말하는 사람은 오늘 이 말씀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어떤 미사여구(美辭麗句) 보다 중요하고 호소력이 있는 전도는 바로 자신이 만나고 변화 받고 경험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또 이것은 물론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것이다. 어떤 말씀을 전할까 고민할 필요는 없다. 한 영혼을 사랑하고 그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원한다면 내가 만난 예수를 성령을 의지하는 기도로 증거하는 것이다.
이런 예는 성경에서 직접 가르치고 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요1:45~46)
바울은 두서없이 전하는 것 같지만 오늘 말씀에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상태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 그리고 주님을 만나서 변화된 현재의 삶을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오늘 제목으로 삼은 말씀이 바울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불신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삶의 상태를 잘 말해 주는 내용이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2:19b) 결국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우리 자신들에게 더욱 큰 괴로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범사에 순종하여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
Ⅰ. 믿기 전의 자신의 불신고백.(8~12)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도 희생도 용서도 대부분 받아드리고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귀하고 복된 소식인 죽음을 정복한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는 데 이르게 되면 고개를 내저어 버린다. 그러나 이 삼라만상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분이시라면,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라면 죽은 사람 살리는 부분은 얼마나 더 쉬울까를 인정치 못하고 여기에 이르러 끝내버리는 것이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8) 이 질문이 하나님을 인정하면서도 이성적으로 신앙하는 믿는다는 사람들까지도 인정치 못하고 믿음생활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묻는 질문이다.
사실에 있어서 사람들이 다른 것들을 다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하고 요긴한 생명이 되는 역사를 부정해 버린다면 얼마나 비극인가!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바울 자신조차도 같은 입장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9)
하나님의 계시의 결정적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일깨어 주신 것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 하고…” 즉 스스로 그렇게 판단해 버린 것이다. 많은 일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언제나 알량한 우리 스스로의 판단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각자의 판단을 접어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명령을 존중할 수 있고 행할 수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신앙을 바로 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10)
이런 신앙의 사람에게 권세가 주어지면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11) 자신만 부인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협하여 주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도록 사단의 앞잡이 노릇을 할 수도 있고 이것은 주변에서 끝나지 않고 외국에까지 원정을 가는 무서운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나중에 고백한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1:13)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어리석고 무지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위해 움직이는 대신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에 적극적일 수 있음을 경계하여 바울처럼 주님을 만나 완전한 의의 일꾼으로 사는 …
Ⅱ.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고백.(13~18)
아무리 종교적이라고 할지라도 어둠에 사로 잡힌 사람은 육신의 눈 그대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뵐 수가 없다. 우리가 태양도 계속 볼 수 없는데 그 태양빛과 비교될 수 없는 주님의 영광의 광체를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자신을 빛의 일꾼이라고 착각하면서 주님을 끝임 없이 거역하는 이 일꾼을 빛으로 찾아 주셨고 이것은 우리 모두도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도 자신은 온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위한다고 설치고 다니며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사울을 향하여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셨을 때 얼마나 두려웠을까! 오늘의 시대에도 나는 열심히 주님을 위한다고 움직이는데 뜻밖에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신다면 얼마나 어처구니 없을까!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사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른다. 어리석게도 충분히 쟁기를 끌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뒷걸음질을 치는 소나 말은 계속 채찍의 고통을 맛볼 뿐이고, 마치 앞에 주어진 일을 하지 않으려고 뒷걸음질 치다가는 탱자 가시 나무 같은 가시를 계속 뒷발질 하는 거나 다름없이 무서운 고통을 당할 뿐이다.
우리가 사실 이렇게 어리석은 일들을 더러 더러 하곤 한다. 말씀대로 순종하면 평안하고 행복할 것인데도 이리 재고 저리 재면서 거역하다 보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주님께 대한 부끄러움으로 인한 양심의 고통과 죄스러움 뿐이다.
여태껏 자신은 나름대로 주님을 열심히 섬겼는데도 정작 그 주님이 나타나셨는데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묻고 있으니 어찌 주님을 섬긴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나중에 고린도 교회를 향해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15:34)고 경계를 주고 있다. 주님의 교회 속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자신의 주님을 알지 못할 때를 마음에 떠올리면서 이런 당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에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그럴 것이라고 경계를 주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다.
바울은 “주여 뉘시니이까?” 했는데 여태껏 자신이 최선을 다해 섬겼다고 생각했던 주님의 답변은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15) 왜 이런 일이 있게 되는가! 그것은 나중에 바울이 동족들에게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 2~3) 이유 때문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사울에게 긍휼을 선언하신다.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①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②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③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16) 만남이 없이는 주님을 깊이 알 수 없고 증인이 될 수 없다. 본래 바울은 주님을 따르거나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다메섹에서 만나 주셨고 사환으로 삼아 주셨다.
이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원리가 된다. 육신으로는 주님을 알지 못했고 뵈지 못했지만 바울처럼 주님을 만난 신앙의 사람들은 증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을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17) 이 말씀은 구원을 받은 자가 갈 수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보내는 최고의 목표는 “그 ①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②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③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④기업을 얻게 하리라”(18)
오늘 우리 각자도 이렇게 주님을 만난 경험을 필요로 한다. 남으로부터 전해들은 예수가 아니라 내가 만난 예수가 될 때 비로소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물을 필요가 없다. 모두가 바울 같은 경험과 고백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증인으로 사시기를 …
Ⅲ. 변화후의 복음증거의 고백.(19~23)
바울은 이제 자신의 새로운 변화와 함께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19)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 과거에 바울은 사울일적에 자신이 기뻐하는 것,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라는 변화를 고백하는 것이다.
믿음에 관한 한 세상에서 온 것은 가치가 없다. 야고보의 말처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즉,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 것들만이 온전한 선물이기 때문에 거스려서는 안된다. 이것이 주님을 만난 바울의 고백이다.
하늘에서 보이신 명령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사울이 주님을 만나 뒤집어진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인류 모든 사람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행하려고 할 때 오히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때보다 장애가 더 많았음을 고백한다.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21) 그전까지 자신과 함께 했던 동료들이 적이 되어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과거보다 더 유리한 일도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22) 현재 아그립바왕에게 증거하기까지 반드시 되리라는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을 말한 것 밖에 없다고 증거하면서 이제 바울은 복음의 최고의 정점을 말한다.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23) 바울의 증거하는 메시지는 어떤 대상이든지 바뀌지 않았다.(21장에서 예루살렘에서 잡혀서 이 가이사랴에 있는 현재까지 그가 증거한 메시지는 전혀 다르지 않았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에 힘쓴 것은 바리새인들과 더불어 율법과 계율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그리고 다시 오심을 증거하는 일을 명령 받았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Con. 바울은 자신의 거듭남을 말하면서 지금의 상황만이 아닌 과거 믿기 전의 하나님을 거역했던 일을 숨기지 않았다.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행한 일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일들뿐이었음을 고백한다.
주님을 만나고 들은 책망은 열정적으로 행했던 모든 일들을 통하여 만족과 감격이 아니라 마치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짐승처럼 고통스럽기만 했음을 통회한다. 주님을 만나면서부터는 자신의 열정보다는 위에서 보여주신 것들을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라신 명령을 확신하였다.
바울이 주님을 만난 후에 증거의 주제는 이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뿐만 아니라 승천과 재림으로 바뀌었고, 모든 사람들로 자신처럼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할 것을 온 인류에게 전하라는 당부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가 거듭났다면 역시 다름이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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