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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고전 3:1~9 2010-03-07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고린도 교회는 영적인 은사가 대단히 풍부했고 열성적인 교회로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것으로 봐서 영적인 것이 결코 은사가 기준이 아님을 이해하게 한다. 은사적인 일들이 분명히 영적인 것들임에도 바울은 은사의 혼돈에 있는 고린도 교회의 상태를 부분적으로 안다거나 청동거울에 비교하면서 보다 성숙해야 할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상태가 여전히 자라지 못하고 정체(停滯)되어 육신적인 편견과 기준을 가지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수준에 있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이나 받아들이는 것들이 성령으로 만 가능하고 육신적으로 소화될 수 없는 것임을 지적했다면 훌륭한 개척자나 스승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가 어린아이 수준에서 머무르는 것에 대한 탄식과 안타까움을 바울은 지적하고 있는 말씀을 오늘 본문에서 읽는다.

신앙의 성숙은 반드시 연륜에 의해서 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계실 때 제자들에게도 직접 말씀하신 바를 공관복음들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30)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20:16)

이런 경계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갈6:3)

결국 신앙적으로 성장하는 방법은 육신의 성장과 다름이 없다. 순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먹고 그것을 영향소로 만드는 것은 열심히 영적인 활동 즉, 운동을 함으로서 가능한 것이다. 육신적인 성장은 이 땅에 살 수 있는 기한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에서 멈추고 말지만 영적인 성장은 영원에 어울리게 영광에 들어갈 때까지 지속적으로 가능함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시92:12~14)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4:18)

모두가 영원에 합당한 사람답게 지속적으로 장성하고 열매를 맺는 일에 최선을 다하므로 유치하게 다투고 싸우는 일이 없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Ⅰ. 영적으로 자라지 못한 자.(1~3)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오늘 본문의 첫 부분은 자라지 못한 신앙적 특징을 어린아이의 상태로 나타내고 있는데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면 그 자신의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 문제를 일으키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 또 따른 문제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1. 신앙이 자라지 못하면 어린아이와 다를 것이 없다.

마치 자라지 못한 아이가 온 집안을 다 헤집고 다니면 그보다 장성한 가족들이 그 흩어놓은 것들을 정리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과 일반이다. 그래서 생산적이지 못한 일에 시간을 쓰게 되는 것이 같은 교회의 장성한 자들에게까지도 영향이 미쳐서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일에 힘을 모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앞에서도 이미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고 한 것처럼 믿음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부단히 옮겨가는 싸움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영적인 성장이 멈추면 또다시 육적인 상태로 돌아와 오히려 영적인 일에 대항하고 장애를 일으키게 되기 때문에 성경은 끊임없이 영적인 성장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8~39)는 믿음의 호소도 이런 관계에서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1) 요즘 7~80년 살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얼마나 사람들이 애를 쓰는가! 당연히 영원을 위한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는 얼마나 더 애써야 할까!

2. 거친 음식을 감당치 못한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2) 이에 대한 이해를 히브리서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2~14)

3. 시기와 분쟁을 일으키는 육신에 속한 모습을 가진다.(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영에 속해야 하고 앞에서도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b) 육신의 입장에서 영적인 일은 절대로 소화가 안 된다는 것이 영적인 어린아이와 같다는 즉, 다시 육신의 삶의 원리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경계의 교훈이었다.

자주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 신앙한다는 사람의 눈에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것이 더 잘 나타난다면 주님의 말씀처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4:9) 라는 당부를 생각해야만 한다.

세상적 ‘배움 조차도 죽을 때까지 끝이 없다.’고 하는데 우리 영원을 향하여 가는 영원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천국행의 삶이 비록 삶의 자리는 변함이 없을지라도 영적인 가치는 점점 자라서 바울 사도의 당부처럼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2:4)는 권면을 실천하는 …

주님의 날로 모든 세상에서의 날을 사는 사람과 세상의 죄만을 가지고 주님의 날을 맞는 사람이 있다. 결국 주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애쓰다가 죄를 짓는 것과 죄와 더불어 살다가 주님의 날을 맞는 것과의 차이이지만 이것이 마지막 주님의 앞이었을 때는 더 이상 소망을 갖지 못할 것이다. 날마다 장성하여 영원의 삶을 향해 자라가는 …



Ⅱ. 주신대로의 역할을 사용하시는 하나님.(4~7)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시기와 역할에 따라 필요한 사람들을 보내주시고 각각 그들의 역량대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게 하신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셨음에도 사역자가 자신의 분수를 지나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은 사실 그 사람에게는 비극이 될 것이다.

결국 영적인 기관으로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3:15b)인 교회에서 영적이지 못하고 육신적인 부조화를 일으키는 경계를 오늘 두 번째 부분에서 보게 된다.

1. 계파를 만드는 것 자체가 육의 사람의 모습이다.(4) 앞에서 1:12에서는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했는데, 여기에서는 좀더 범위가 좁혀져서 실제로 고린도 교회에 영향을 미쳤던 두 사람을 거론하고 있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4)

사실 자신이 부족함이 없다면 이름있는 사람을 간판으로 내세울 필요가 없다. 어릴 때 이런 경험은 더러 있었을 것이다. 서로 관련되어 있는 사람을 들이대며 자랑을 하게 되는데 어떤 경우에는 이러다 보면 실지로는 관계가 없는 사람까지도 갖다 붙이기도 한다.

아마 고린도 교회는 교회를 세운 창립자인 바울과 학식으로나 율법에 능했던 아볼로(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행18:24) 두 사람의 영향에서 莫上莫下였을 것 같다.

오늘 정치계를 보면 헤쳐 모이기를 하면 몇몇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뒤에 가서 서는 것이 사실이고, 유치한 세상 사람들은 그래도 뭐라 할 것이 없다. 그러나 영적인 교회가 어떤 인맥으로 파당을 짓는 것은 참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고 부끄럽게 만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를 전도자와 장로로 나누는 것도 옳지 않은 육적인 생각이고, 또 장로와 교우들로 나누는 것도 그렇고, 전도자와 교우들을 따로 나누는 것도 육신의 생각일 뿐이다. 다만 주님의 몸의 구성원으로 모두가 있을 뿐이다.

2.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일꾼들은 믿게 한 일꾼들일 뿐이다.(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할지라도 그들은 주님께서 쓰신 사람들일 뿐이지 교회의 우두머리거나 주인은 될 수 없다. 사역자[헬, 디아코고스(diakonos) waiter; 시종인, 즉 일반적으로 식탁이나 다른 천한 일에 시중드는 사람, 집사, 일꾼, 종]

바울이건 아볼로건 김관평이건, 故이찬우건, 양태봉이건, 이종배건 모두 이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주님께서 보내시고 쓰는 사람들일 뿐이다.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라는 것이다.

주님을 더 깊이 믿게 하기 위하여…, 육적인 것 보다 영적인 하늘의 사람 만들기 위하여 보내주신 일꾼들일 뿐이기 때문에 지나간 모든 사람들은 물론이고 여기 서 있는 저 조차도 이런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비극이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망각하는 데서 교회에 문제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3. 이들의 수고의 역할도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셔야 가능하다.(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참으로 귀중한 교훈이다. 사실 바울은 고린도에 복음을 심었고 다시 아볼로는 그 심은 복음의 밭에 걸음을 주고 물을 주는 일을 하였다는 고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두 사람의 노력과 수고도 하나님의 자라게 하심이 없었다면 아무 가치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또 다른 믿음의 고백이 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래서 다음 절에 고백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7) 이 말씀은 ‘심는 이나 물 주는 이’가 쓸 데가 없다는 말씀이 아니다. 마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는 말씀과 같은 중요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여기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기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막4:28) 결국 주님은 사람과 동역(同役)하셔서 이 지상에 교회를 세우시고 결실을 이루게 하신다는 교훈이다.

칼로칸 교회가 발렌수엘라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기도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그 일을 가능하게 하신 것이다. 다시 하나님의 자라게 하심으로 열매 맺게 하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같은 원리에서 우리 모두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 기도로 물질로 몸으로…



Ⅲ. 각각 일한대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7~9)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우리를 부르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용된 대로 각자에게 상을 주실 것인데 그러한 것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원리는 다음 시간에 더 깊이 다루게 될 것이다.

①심고 물주는 이들보다 자라게 하실 수 있는 주님께 영광이 되어야 한다.(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앞에서도 지적한바 있지만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교회에 관한 한 사람이 아무리 중요한 역할을 했을지라도 그것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께 비교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경고이다. 결국 영적인 일에 사람이 내세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절대로 거저 일을 시키시는 분이 아니시다. ②각각 일한 사람은 그들의 헌신만큼 상을 받게 될 것이다.(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그러나 이러한 교훈은 일한 것이 없다면 기대할 것도 없다는 논리도 된다.

또 교회와 복음을 위해 일한 자들은 거기에서 자긍심이 끝이 아님을 오늘 마지막 절에서 말씀하신다. ③사역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자긍심으로 하게 된다.(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적어도 직분에 관계없이 주님의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자는 사람과 더불어 하는 일로 끝나지 않고, 시간 속에 일을 하지만 영원을 위해 일한다는 엄청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이런 이치 때문에 사람들의 알아줌이나 칭찬에 연연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상 주심을 기대하는 것으로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영적으로 자라서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 육신의 삶은 성장이 멈출 수 있지만 영적인 삶은 영원을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육신의 성장이 멈추어도 계속 자라는 것이다.

주님의 집이요 밭인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던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 결실할 수가 있고 일하는 사람이 감격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직분으로 일했든지 거기에 따른 상은 주님으로부터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