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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눅 12:1~5 2013-01-27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  
사람들은 대부분 힘겹고 부정적인 교훈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것도 기본적인 신앙의 문제로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 육체를 가진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것들이 사실 많다. 암에 걸릴까 두려워하고,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까 두려워하고, 자연재해를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이를 잃을까 두려워하고, 직장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죽을까 두려워하고, 교통사고를 당할까 두려워하는 등등, 사실 우리 주변의 모든 일들이 두려운 것뿐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주님의 경계는 앞의 11장에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신앙의 형태를 책망한 후에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못하고 주님의 형벌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신 후에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누구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삼상21:10~13에 다윗이 사울을 피해 이방 가드왕 아기스에게 망명하러 갔다가 죽을뻔해서 미친 채 하기까지 하여 위기를 모면한 후에 믿음의 백성들에게 당부하기를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34:9) 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하나님을 극진히 사랑했던 다윗이지만 이방의 왕이나 방백들을 두려워했다가 얻은 것이 없었음을 권면하는 것이다. 오늘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을 분명히 하고 그러므로 영원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로서 모자람이 없는 …



Ⅰ. 외식을 주의하라!(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주님께서 잘못된 신앙의 지도자들을 책망하시는 동안에도 서로 밟힐 만큼 사람이 몰려 들었고 그 수를 표현하기를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누가는 수만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사실 이 엄청난 수의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요즘 소위 말하는 음향기기도 없이 어떻게 말씀을 증거하셨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그러나 최대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그 수많은 군중들의 마음을 끄는 주님의 영성이 첫째였을 것이고, 두 번째는 귀한 주님의 음성에 귀를 세워 집중하는 군중들의 자세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오늘도 같은 상태라면 구태여 Amplifier를 사용하지 않아도 가능한 같은 영적인 깊이가 있다면 가능하리라 확신한다.

주님을 찾는 수많은 무리들의 이유를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4~26)라고 책망하시고 결국 이런 이유 때문에 주님을 찾았던 무리들은 다 물러갔던 모습도 읽을 수 있다.(66)

그런데 이 수많은 군중들 가운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당부의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에서 보는 대로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시는 것이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신앙을 배우들이 연기하듯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가장 무서운 적은 ~체 하는 것이라고 바울 사도 조차도 경계해주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8:2)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갈6:3) 사실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데서 오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누룩이라는 것은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눅13:20~21)고 좋은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전염에 대한 것이 경계되어지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갈라디아서2:11~13에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더 치명적임을 보는 것이다. ~채 하는 잘못된 신앙은 빨리 고칠수록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득이다.



Ⅱ. 숨겨질 것이 없다.(2~3)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여기서는 외식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증거해 주고 있다. 사실 사람들의 눈에는 가려질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가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하고 나면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다 보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더 심각한 사실은 주님께서 직접 책망하셨던 바리새인들처럼 외식을 반복함으로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신다는 사실 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될 때 주위를 들러보는 것은 그래도 양심이라는 경고 등이 켜지기 때문인데 이런 행동을 계속하다 보면 양심의 경고 등이 고장이 나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1~2)

어떤 것도 주님 앞에는 감춰질 수 있는 것은 결코 없기 때문에 주님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시다. 많은 정치인들이 청백리처럼 보이다가도 어떤 높은 자리를 위해서 국회 청문회 앞에 서게 되면 그 동안 몰랐던 것들이 낱낱이 드러나고 만다. 더욱 두려운 청문회는 우리가 주님 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바울 사도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하였고, 히브리 기자는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3)고 고백하고 있다.

더욱 두려운 것은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3)는 가르침이다. ‘어두운 데서,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들이 공개되리라는 사실이다. 아무도 모르게 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보시고 듣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숨길 것 없는 공개된 빛의 삶을 삶으로 미래의 영원 속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는 …(요8:32)



Ⅲ. 두려워 할 분을 두려워하라!(4~5)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에 대한 경계를 주시면서 말씀하시는 것들을 보면 참으로 놀랍다.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14, 32→)“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너희 각 사람은 자기 이웃을 속이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25:17, 43) 너는 그를 엄하게 부리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모든 말씀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의식해야 하는 내용들이다.

여기서 주님은 특히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라고 권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으로서가 아니라 친구에게 마음을 터놓고 주시는 당부의 말씀 이시라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 몸에 위험을 끼칠 수 있는 것들을 두려워하는데 주님은 오히려 그 반대로 가르치시고 계신다. ‘기껏해야 육신의 목숨만을 빼앗을 수 있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목숨만 살려주시오!’ 라고 애걸하는데 믿음의 선진들은 그러지 않았다는 모범들을 읽게 된다.(다니엘과 친구들)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히10:33~34)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히11:35~37)

오늘 4~5절의 말씀을 마태복음에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고 말씀하신 내용 속에서도 확인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를 두려워해야 한다.

사실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옥 가는 것이 두려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공로를 의지하고 주님의 희생을 믿으므로 지옥의 저주를 피하려고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믿음의 사람들조차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또한 末世至末의 현상중의 하나이다.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는 것이 불신이라면 신앙 안에 있다고 해도 사람과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한다면 불신자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신앙을 배우가 연기하듯 하는 외식은 가장 두려워해야 할 주님을 의식하지 않는 背恩忘德이다. 어디든지 충만해 계신 주님을 의식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이요 마지막이다. 우리의 어떤 말이나 행동도 감추어질 것은 없다. 그런 이유에서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62:8)라는 다윗의 권면을 들어야 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돈, 권력, 명예)은 결국 육신의 생명을 빼앗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이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영원 속에서 지옥에 보내 형벌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