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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계 4:6~11 2013-03-17
주 하나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가장 많이 쓰여진 표현이 …

오늘 본문 8절의 내용은 마치 이사야갸 봤던 이상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사6:1~4)

사실 “거룩하다[히, qadosh, 오염되지 않은 상태, 오염이나 망치게 하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있는, 흠이나 점도 없이 온전히 완전하신;→헬, hagios 역시 같은 의미” 더 쉽게 이해하면 우리 문화에서 흔히 사용하는 어떤 종교의식에서 “부정 탄다”는 말(여자와 배)이 있는데 이와는 반대되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부정 탈 수 없는 분이시고,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주어진 은혜의 복음과 세상에서 생겨난 종교와 차이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떤 대상으로부터도 절대로 부정탈 수 없는 분이라고 이해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가장 가까운 의미가 될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근거는 이스라엘의 율법 속에 대단히 자주 나타나는 것을 본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출15:11)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삼상2:2)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개념 자체도 죄인 된 사람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의미이다. 같은 영적인 존재인 천사들조차도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찬양할 때에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했다고 이사야가 본 두려운 광경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모셔선 “스랍[히, saraph, 타다, 태우다, 불사르다]”에서 왔는데 창세기 3:24의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는 의미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Ⅰ. 하나님은 거룩하시다.(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되시다. 주님의 위엄은 죄인의 입에 올릴 수 없는 이름이며 영적인 존재들조차도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라고 찬양하고 있고 이사야가 본 비전도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라고 끊임없이 찬송하였다.

이러한 모습이 죄인 가운데 있던 이사야는 몹시 놀라 넋을 잃을 수밖에 없는 광경이어서 자신의 수치를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6:5)

이런 이유에서 죄의 사람은 그분의 형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모실 수 없고 죽을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 우리 중에 누구든지 이사야처럼 하나님의 위엄스런 모습을 뵙는다면 이런 모습으로 살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그대로 깨닫게 될 때야 인간은 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고 감당할 수 없는 영광으로 인하여 두려워 떨게 된다. 분명히 하나님을 모시면서 죄와 관련이 없는 천사들조차도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두려워 자신의 수치스러운 것들을 날개로 덮어 숨길 수 밖에 없는 경외감을 보이고 있다.

많은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을 자기 식으로 생각하고 상상하면서 그 그림의 틀에 주님에 관한 모든 것을 자신의 좋아하는 방식대로 꾸미기도 하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일 것이다.” 라고 살아 가고 있다. 사실 이사야도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는데 실제로 하나님을 뵙고 기절하며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계시해주신 대로 하나님을 바로 안다면 많은 사람들의 삶이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표현하기를 “한나님을 경외하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그릇 이해하고 있는(창1:27) 대표적인 예가 그래도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며 살았던 이사야의 모습보다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 이러한 왜곡된 하나님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잘못 비춰 줌으로서 내가 매정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고집 센 모습으로 하나님을 잘못 전달 할 수 있고, 믿는다는 내가 무감각하고 비도덕적이고 습관적으로 죄를 저지르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대로 하나님을 그리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려 하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다 이해해 주실 거야!” 라고 자위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와 같지 않은 분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으로 우리와 전혀 다른 분이시다. 우리도 이사야처럼 하나님을 뵙게 된다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탄식하게 될 것이다.

제가 이렇게 증거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님의 모습을 왜곡시키지 않을까 사실 두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처럼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Ⅱ.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한다.(9~11)

(9)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10)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11)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본문의 네 생물들과 이십사 장로들은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렸고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라고 찬양합니다. 그리고 영광의 위엄과 함께 찬양하는 이유를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라고 창조주를 노래한다.

시편 기자도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시99:3) 라고 찬송드린다. 주님의 선택을 받은 자라면 당연히 영광과 존귀만을 그분께 돌려야 하는데 사실 죄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은 영광을 돌려 드릴 수가 없다.

사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기 때문에 교제하고 영광을 받으시려고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제물 삼으시고 그 희생의 은혜를 힘입어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셨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5~6)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1~12)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14)

구별된 자들만이 영광을 돌릴 수 있다.



Ⅲ. 거룩한 자들만 그와 거할 수 있다.(6~8f)

(6)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 (7)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거룩하신 분과 교제하려면 반드시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방법으로 안 되는 것은 주님의 수준에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거룩한 분을 닮아가야 최종적으로 그분의 영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성도들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과 같은 hagios 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는 죄에 오염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1~2) 하셨다.

베드로전서1:14~17 말씀을 통해서 거룩한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 주시는 도전으로 격려하시는 말씀으로 마무리 하자.

①과거의 행실을 본받지 않는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14) 그리스도인이 된지 1주가 되었던 30년이 되었던 과거를 본받지 않는 것이다. 과거에서 확실히 돌아서야만 한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4:3) ②부르심을 되돌아봐야 한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15) 십자가의 부르심에 응한 것을 늘 돌아봐야 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을 것을 다시 당부하신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16)

③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7) 이것은 소심한 것과 다르다. 매맞는 아내나 학대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거룩하심을 깨닫는 가운데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 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두려움으로 행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